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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42)] 107. 피지(Fiji)-1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42)] 107. 피지(Fiji)-1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피지 재무장관과, 1997.8 (c)시사타임즈
▲피지 지도와 위치 (c)시사타임즈
▲< 국기 > 하늘색 바탕에 식민지배국인 영국과 피지의 문장이 그려져 있음.. < 국장 > 방패에는 영국 사자가 코코넛 포트를 붙잡고, 십자가에는 피지의 농산물인 사탕수수, 코코넛 팜, 바나나와 비둘기가 그려짐. (c)시사타임즈

 

 

< 국가 개황 >

 

피지는 남태평양 도서 14개 국가 중 가장 큰 나라이다. 1870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힌디인을 이주시켜 현재는 인구의 반이 힌디인이어서 종족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70년 독립 이후 전통적인 우리의 우방국이며 북한과는 1987년 KAL기 폭파이후 국교를 단절하였다. 우리나라 남태평양 원양어선의 전진기지이다. 1987년, 2000년, 2006년 쿠데타로 민간 정권이 붕괴되어 서방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남태평양의 파도가 넘실대는 때 묻지 않은 섬에 아름다운 리조트가 있어 지상의 마지막 천국으로 알려져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The Republic of Fiji locates in the South Pacific Ocean about 2000km northeast of New Zealand. Fiji's islands were formed through volcanic activity starting 150 million years ago. Fiji has been inhabited since the second millennium BC. In the 17th century, the Dutch and the British explored Fiji. Fiji was a British colony until 1970; British administration lasted almost a century. Today, the main sources of foreign exchange are its tourist industry and sugar exports. Following a coup in 2006, Ratu Epeli Nailatikau became Fiji's president.

 

▲Nausori Highlands (c)시사타임즈

1. 국명(Country) : the Republic of Fiji

2. 수도(Capital) : 수바(Suva)

3. 면적(Territory) : 18,274 km2

4. 인구(Population) : 950,000명

5. 국민소득(GNI) : US$6,500불

6. 언어(Language) : 영어 (English)

7. 독립일(Independence) : 1970.10.10

 

 

지상 마지막 낙원, 피지여

 

남태평양 한가운데

푸른 파도 다독이며

지상의 마지막 낙원으로

기계에 지친 우리를 웃으며 맞아주네

 

작다고 얕보지 마라

나에게는 존경하는 큰형과 자랑스러운 둘째 형

그리고 사랑하는 열하고도 세 동생이 더 있노라

그뿐이랴 4촌은 2백도 넘고…

 

사시사철 푸르고

바나나, 파파야, 망고, 아보가도는 지천이라

우리는 배불러 화음으로 부르노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 신비로움을…

 

그리고 너와 나의 사랑을…

 

멜라네시안이여 폴리네시안이여 그리고 힌두인이여

아침 해 찬란한

빅토리아 파나니미 산으로, 비티레부로 바누아레부로…

지구촌 모든 친구 다 불러 모아

축제 한번 신명나게 열어보자

사랑하며 노래하며 춤 한번 추자

 

덩실 덩실 더덩실…

더덩실 덩실…

 

앞 바다에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는 곳

 

지구촌 하루가 시작되는 곳

지상 마지막 낙원 피지여,

지구촌에 희망과 사랑을 전하라

 

참조 영상

1. (아름다운 세계) : https://youtu.be/76dMor10LL0

2. (KOICA와 평화마라토너) : https://youtu.be/t0BR3hnENfw

3. (모로코) https://m.youtube.com/watch?v=dgKoCjCsQ8U&t=14s

 

Fiji, the Last Paradise!

 

You at the very center of South Pacific Ocean

Caressing the blue waves

Welcome with a big smile

Us who are tired with machines

 

Not look down upon me for my smallness

I have respectable first brother and proud second brother

And as for my loving younger brothers, I have ten and three more

What’s more, as for my cousins, more than two hundreds!

 

Green, green and green all year round

Bananas, Papayas, Mangos, Avocados, Abundant Everywhere Always

Being satisfied, we always sing together with a harmony

The mysteries of nature and its beauty…

 

And the love for you and me…

 

Melanesians, Polynesians and Hidians,

Let’s invite all our friends of the global village

To Mt Victory Panonimi, Viti Levu and Vanua Levu

Where the First Morning Sun shines brightly

Let’s sing with joy and dance with love!

 

DeongSil Deongsil- DeoDeongSil…

DeoDeongSil DeongSil…

 

Where the sun rises over the front sea

Where the new day breaks first in the global village

The last paradise on the earth, oh, Fiji,

Extend hope and love all over the world!

 

1. 지상 마지막 낙원 피지로

 

(피지 발령을 받고)

 

1996년 6월 중순 나는 외교부 국제경제국에 파견 나와 정부종합청사 7층에서 근무하던 중 피지 근무 명령을 받았다. 외교부 근무 명령을 나는 지난 1995. 12월 아프리카 출장 중에 받았었다. 가나를 거쳐 DR 콩고 대사관에 도착하여 KOICA 본부에 전화해보니 송창훈 팀장 후임으로 외교부 파견 근무 명령이 나왔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그래서 정주년 총재가 나를 아프리카로 그렇게 급히 출장을 보냈구나. 6개월 전에도 정 총재는 나를 외교부로 파견 보내려고 작정하고 성낙수 인사부장을 통해서 알려 왔지만 내가 강력히 반대하자 그답지 않게 이를 수용하고 대신 송창훈 팀장을 외교부에 보냈었다.

 

피지 대사관으로의 인사 명령 소식은 정 총재가 전화로 알려왔다. “송 팀장, 피지는 조그마한 나라지만 영어권이야. 그래서 내가 송 팀장 아이들을 생각해서 특별히 그곳으로 보내는 거야. 열심히 해!” 그때 아들 규영이는 초등학교 5학년, 아영이는 2학년 학생이었다. 총재의 전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성낙수 인사부장의 전화가 걸려 왔다. 똑같은 내용이었다. 마치 도청한 것처럼…….

 

그 당시는 피지에 대한항공이 1주일에 3회 직항을 개설하자 각 여행사에서 지상 마지막 낙원이라고 선전하며 관광객을 모으던 시절이었다. 며칠 후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와 모두 한 번 방문하겠으니 기다리고 있으란다. 나도 영화 남태평양을 떠올리며 가슴이 설렜다. 가자, 피지로. 남십자성 하늘 아래로, 산호의 나라로! 지상 마지막 파라다이스로! 나는 피지에 대해서 아는 게 그게 다였다. 멜라네시안이나 폴리네사아인이 살 것으로 막연히 짐작만 하고, 주민 중 반이 인도인인 줄은 알지 못했다.

 

(피지의 첫인상과 개황)

 

피지는 남반구에 위치한 나라로, 7월이 가장 시원한 계절이지만 7월에 도착한 피지 난디 국제공항은 덥기만 했다. 또한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하기까지 했다. 웬 지상 낙원이 이렇담? 조그마한 나라인데 국제공항에서 수도까지 가려면 다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다. 자동차로는 4시간 거리다. 웬 작은 섬나라가 이렇게 크담? 우리 일행 6명은(우리 내외, 아들, 딸 그리고 조태섭 부소장 내외) 12인승 비행기로 갈아타고 수바 공항에 내리니 이연수, 이지영 소장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피지 축제에서 원주민과 함께, 1998.1 (c)시사타임즈

우리는 시내 중심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가장 시설이 좋다는 호텔인데도 방이 눅눅하고 쾌쾌한 냄새가 상당히 났다. 사무실은 대사관 안에 위치한 조그마한 방으로 책상 3개가 들어가니 응접의자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여기에 소장, 부소장이 함께 근무하고 비서도 같은 공간에서 근무한단다. 웬 지상 낙원이 이렇담? 다시 한 번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문병록 대사, 한광섭 차석, 양종혁 영사와 인사 하고, 전임자로부터 하루 만에 업무를 인수 받고, 전임자가 떠나고, 드디어 집구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다행히 조 부소장은 이지영 소장의 집을 인수 받아 바로 이사를 갔지만, 나는 3주일이 되도록 집을 못 구했다. 아내와 애들은 냄새나는 호텔방이 싫다고 성화였다. 나는 복덕방, 한인회, 피지 외무성 등에 백방으로 알아 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은 4,000불 이상을 불렀다. 한도액은 2,000불인데…….

 

▲문병록 대사와 봉사단원 현장 방문, 1998.5 (c)시사타임즈

문대사가 한인교회에 한인들이 거의 참석하니 송 소장도 종교에 관계없이 참석하여 한인들에게 인사하라고 권유하여 도착한 첫 일요일, 교회에 나갔다. 그때 교민인 이건춘사장의 부인이 한인교회 옆에 “우리 집이 하나 더 있어 1,800불에 세놓으려는데 한 번 보라.”고 권유하자 문대사 사모님이 “송 소장 댁은 자녀가 2명이나 있어서 큰 집을 봐야한다.”며 만류했다. 나는 교민의 집을 보고 맘에 안 든다고 말하기가 미안하여 그 집은 재껴두고 수바의 웬만한 집을 보고 있었다. 3주일을 허비하고 이건춘사장의 그 집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볼 기회가 있어 살펴보니, 방이 크진 않지만 세 개에 큰 거실이 하나가 있어 우리 네 식구가 살만했다. 더욱이 양지 바른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방에 냄새가 없고 멀리 남태평양이 눈 아래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날 바로 계약을 하고 눅눅한 호텔생활을 청산했다. 가까이에 인연을 두고 먼 길을 돌아 온 것이다. 나는 그 집에서 피지 근무가 끝날 때까지 잘 살았다.

 

피지는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양 종족의 복합 문화 형태를 지니고 있다. 면적은 18,500평방 km로 경상북도 크기만 하며 제주도의 10배가 넘는다. 최호중 외무장관의 자서전 『둔마가 정상까지』에는 자신이 1976년 피지를 방문했을 때를 기록해놓았는데, 제주도보다 작은 섬이라고 기술하였다. 아마 굉장히 작게 느낀 모양이다. 332개의 섬으로 구성 되었으나 남북 두 섬이 전체의 87%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90만 명이며 1980년대에는 피지인과 힌디인이 반반이었으나 1987, 2000, 2006년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힌디인이 많이 떠나 힌디인이 44% 정도로 줄었다.

 

힌디인이 피지에 오게 된 것은 영국이 1874년 식민지로 병합한 이후,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로 힌디인을 1890년대에 10만 명 정도를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원래 피지는 연중 더워 의복이나 주택이 필요 없다. 또한 과일이 풍성하고 땅이 비옥하여 카사바 재배가 잘 되어 먹을 것 걱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영국인 농장주들이 아무리 돈을 주어도 피지인들은 노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에서 힌디인을 이주시켰다. 지금도 피지에는 거지가 없다.

 

피지 본토인과 힌디인은 통혼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상권은 힌디인이 군인과 경찰은 본토인이 잡고 있어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피지는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섬에 리조트까지 갖추어져 있어 연중 60여만 명의 관광객이 사시사철 찾아와 전 산업의 60%를 관광산업이 차지하고, 사탕수수가 15%를 차지하며 1인 국민소득은 4천불 정도이다.

 

▲의료기자재지원, 문병록 대사, K 간호단원 (c)시사타임즈

전통적인 친한 국가로, 북한과도 1985년 수교했으나 북한의 지령으로 김현희가 KAL기를 폭파하자 1987년에 북한과 단교 후 지금까지 수교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1987, 2000, 2006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민간 정권이 붕괴되자, 서방국가들이 피지 군사 정권에 대하여 압력을 가했지만 우리나라는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2년 7월 21일 피지 정부는 서울에 상주공관을 개설하는 등 우리나라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

 

2. 나의 업무

 

도착하자 나는 Raki Raki 병원 완공에 주력했다. Raki Raki 병원은 이 나라에 협력단이 시행하는 최초의 프로젝트 사업으로, 나의 전 전임인 김용표 소장과 이태주 부소장이 발굴하여 1년 전부터 시작된 사업이었다. 내가 출발할 때 정주년 총재가 특별히 신경을 쓰라고 요청한 사업이기도 했다.

 

규모는 건축비와 의료 장비 등을 합하여 1백만 불 규모로,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규모이다. 일본은 1985년에 2천만 불을 투입하여 수도에 종합병원을 건축해 주었다. Raki Raki 병원 준공식 때 본부에서 정 총재가 오기로 예정되었으나 그가 갑자기 YTN사장으로 전임되어 김용표 서남아 팀장이 대신 왔다. 그는 자기가 첫 삽을 뜬 사업에 한국을 대표해서 축하사절로 온 것에 대하여 감개무량하며 문병록 대사와 보건부장관에 이어 멋진 축사를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하여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식전 식후 행사인 피지 전통 무사춤은 멋졌으며 김용표 팀장의 축사 모습은 피지 TV에서 1주일 동안 계속 방영되었다.

 

특히, 당시에 피지에는 협력단 초대 부소장이었던 이태주 과장이 휴직하고 박사학위 논문 자료 수집 차 피지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병원 준공식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그 뒤 이태주 과장은 피지 종족에 관한 논문을 완성하여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 분야 박사학위를 수여 받고 협력단에 복귀하여 6년 정도 근무하다가 한성대학교 부교수로 전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ODA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재 한국 ODA워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국내외 ODA 컨퍼런스의 발제자로 자주 초청되고 있다.

 

나는 북섬의 Manua 지역에 협력단 최초의 소수력발전소 사업을 발굴하여 전기 없는 6개 마을에 최초로 전기를 공급해 주기로 했다. Manua 지역은 북섬의 북쪽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 자동차 길이나 우마차 길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보트를 타고 가는 지역이다. 나는 에너지 청 기술국장과 현지를 실사하여 정밀조사하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여 본부로부터 어렵게 사업승인을 받았다. Manua 마을은 밤이 되자 캄캄한 밤하늘에 별만 초롱초롱 빛나며 파도소리만이 들려왔다. 태고의 조용함이랄까? 내가 구석기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아리송한 기분도 들었다. 나는 완공을 한 달여 앞두고 본부로 발령이 나서 완공식은 후임 김기웅 소장이 맡았고, 문병록 대사, 정병원 참사관이 함께 참석 했다. 협력단 사업중 전력분야 1호 사업을 내가 발굴하고 시행한 것이 자랑스럽다.

 

1997년에 이 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인 Vatulele에 보건소를 설립하여 주민들에게 현대적 진료를 받게 했다. 또한 라카라키 병원에 이강국 산부인과 전문의를 장기 파견하여 피지 신생아와 산모의 건강에 기여토록하고 피지 종합병원에 의료기자재를 지원하였다.

 

또한 피지 각 분야 공무원 20여 명을 선발하여 한국에 연수 보내어 공무원 역량강화에도 기여했다.

 

피지는 우리나라의 원양어업의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통령실의 전용 상선이 고장이 나자 우리에게 수리지원 요청을 하여 한국 장비와 기술자를 불러 수리함으로써 한국의 높은 선박 기술을 남태평양 도서국가에 홍보했다. Mara 대통령은 문병록 대사와 나를 대통령궁으로 불러 치하해 주기도 하였다. Mara 대통령은 1970년 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국무총리로 16년을 집권하였고 1986년 인도계 노동당에게 패배하였으나 인도계의 집권을 반대하는 Rabuka중령의 쿠데타로 대통령에 다시 옹립되었다.

 

또한 우리의 봉사단원이 20여 명 파견되어 간호사, 물리치료사, 관광청, 양봉, 컴퓨터 각 분야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펼쳤다. 그중 컴퓨터 단원으로 나와 있던 L단원은 영국에서 파견된 컴퓨터 전문가와 연애하고 있다는 말이 단원들과 교민들로부터 이러쿵저러쿵 들려 왔다. 사랑은 좋은 것 아닌가? 나는 그들에게 애정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했다. 그리고 L에게는 사랑은 하되 그 행동은 봉사 단원답게 하라고 했다. L은 그러겠다고 했고 둘은 결혼할 계획이라고 했다. 부모들은 현재는 반대하고 있으나 설득할 생각이란다. 꼭 부모님을 설득한 후 결혼하라고 당부했다.

 

▲피지 한국 영국 봉사단원들과 함께, 1997.10 (c)시사타임즈

나는 그 영국 총각도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하면서 그의 의중을 확인했다. 그는 잘생긴 영국 청년으로 L과 결혼할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덧붙였다. 한국의 풍습은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결혼하니 L과 합심하여 부모를 설득하고 결혼한 후에는 절대 이혼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얼마 후 그들은 영국으로 같이 여행 간다면서 L이 휴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같이 간다는 말만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허가할 사안이었으나 이제는 간단히 허락할 사안이 아니었다. 부모의 허락을 받아 오라고 했다. 며칠 후 L의 어머니로부터 허가한다는 전화가 왔기에 휴가를 허가했다. 그래도 혼전이니 행동에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그런데 휴가를 다녀와서 몇 달 후 봉사단원 사표를 제출했다. 사유를 물어 보니 임신이란다. 단원의 혼전 임신은 면직 사유가 된다. 사표를 수리하고, 귀국하여 결혼 날짜를 빨리 잡으라고 하니 부모가 임신 사실을 알면서도 국제결혼에 반대한단다. 그럼 전에 휴가 동반 허가는 왜 했느냐고 물으니 그것은 그냥 휴가였을 뿐 결혼을 승낙한 게 아니란다. 결혼을 고집하는 총각 처녀를 함께 3주일이나 동반 휴가를 보내면서 결혼에는 반대하다니,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럼 뱃속의 아기는 어떡하라고? L과 영국 청년은 애를 꼭 낳고 결혼도 하겠단다. 나는 L의 어머니에게 국제전화를 했다. L의 부모는 낙태를 시키란다. 사유는 집안 망신이니 국제결혼은 불가하고, 20년 살다가 이혼도 하는 데, 지금 헤어지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영국청년을 한국에 보낼 터이니 면접 후에 반대를 하든지 하라고 했다. 영국 총각에게 무조건 L의 부모에게 큰 절을 하고 평생 사랑하며 서울에도 1년에 두 번씩 오겠다고 말하고 꼭 결혼 승낙을 받아 오라고 하며 L과 영국총각을 서울로 보냈다.

 

1주일 만에 둘은 함께 돌아 왔는데 총각은 L의 부모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사유는, L에게 여자 형제가 셋이 더 있는데 L은 둘째였다. 과년한 딸이 넷이나 있는 집안에 외국청년이 드나들면 집안 망신으로 혼삿길이 막히니 절대 집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영국청년에게 미안했다. 둘은 부모가 승낙을 안 해도 2개월 후에 결혼할 예정이라며 나에게 부모가 안 올 때에는 나에게 신부 아빠 역할을 해달라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둘의 사랑이 확고했고 애를 낳겠다니 이 정도면 성인들이기 때문에 부모의 허락이 없어도 결혼은 해야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문병록 대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더니, L은 이제 단원신분이 아니니 결혼을 하든 말든 나보고 손을 떼라고 했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왜 남인 송 소장이 거두어 주냐는 뜻이었다. 후에 부모로부터 무슨 원망을 듣고 싶어 그러냐고 덧붙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두 젊은이의 사랑과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서 나는 나중에 누구한테 원망과 책임 추궁을 당할지라도 도와야겠다고 작정하였다. 그리고 두 달 후에 그들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L의 부모는 계속 반대했고, 물론 피지 결혼식장에 신부 가족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문병록 대사는 초청장을 받고, 신부 가족이 참가하지 않는 결혼식장에 갈 수 없다더니, 식장에 나왔다. 참으로 인간다운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나도 문 대사에게 사의를 표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L이 부모님과 함께 대사관에 위치한 내 사무실로 찾아 왔다. L의 어머니 품에는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내가 L의 부모에게 “이제 기쁘시죠?”하고 물으니, L의 어머니께서 “기쁘긴 뭐가 기뻐요. 하는 수 없이 온 것이지.”라고 하면서도 L의 어머니나 아버지의 얼굴에는 기쁜 모양이 역력했다. 나에게 건어물 선물 한 보따리를 내놨다.

 

그 후 L은 영국으로 신랑과 아이와 같이 가서 영어를 더 배우며 영국에 잘 정착하였다. 그리고 미국으로 신랑과 같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KOICA의 피지에서 근무한 것이 인정되어 유엔 OCHA에 근무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씩은 협력단 당직실로 전화하여 나의 연락처를 알아낸 다음 나에게 전화로 인사를 하곤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5-46째 전화가 없다. 이제 나를 잊었는지 아니면 성공하여 바쁜 나날을 보내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려운 일을 당했는지……? 연락은 안 해도 좋으니 마지막 경우가 아니길 바랄뿐이다.

 

▲피지 국회의장과 국회 대표단장 김봉호 부의장 일행과 1997.9 (c)시사타임즈

1998년 7월에 국회 김봉호 부의장을 단장으로 한 국회 사절단이 피지를 방문했다. 당시 우루과이 라운드 무역협상 타결 이후 벼농사 보조금과 쌀 시장 개방 문제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우리나라는 농민 보호가 가장 시급한 상황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은 우리나라의 벼농사의 어려움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그 당시 김봉호 부의장이 농민 보호를 위해 가장 선두에 나서서 대처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그를 쌀봉호라는 닉네임을 붙여주고 그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큰 상황이었다. 나는 국회사절단이 마라 대통령 예방과 피지 국회의장 면담 시에 통역을 맡았다. 김 부의장은 나에게 KOICA의 활동상황을 보고하자 큰 관심을 보이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면서 격려를 했다.

 

(피지 2번째 이야기로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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