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규의 행복칼럼 ] 두 갈래 길 Ⅳ
김봉규 논설위원 ⒞시사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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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같은 공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술 마시는 것도 아니지만, 노래방을 가거나 밤새 전화로 수다를 떤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두 사람이 아이 낳고 키워 혼인시키고 몇 십 년을 한 이불 덮고 자더라도 만남은 아닐 수 있다. 만남은 자녀양육하기도 아니지만, 몇 십 년 한 이불 덮고 자기는 더 더욱 아니다.
요즘 황혼이혼의 비율이 신혼부부의 이혼비율을 추월했다고 한다. 황혼이혼은 보통 50대 이상이고 20년 이상 부부의 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갈라섬을 의미한다. 그런데 황혼이혼을 하는 부부들이 그 나이에 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이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어쩌면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지도 모른다.
라캉(J. Lacan)은 남녀의 섹스는 없다고 했다. 실제 성관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만남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함께 있어도 서로를 그리워한다. “왜 너는 내가 바라보아주기를 원하는 그 곳에서 날 바라보아주지 않니? 우리는 이렇게 오래 함께 앉아, 그렇게 많은 말을 나누었는데 왜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걸까?”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말은 넘쳐난다. 그런데 의미는 없다. 홍수 속 가뭄이다. 물이 넘쳐나는데 마실 물이 없다.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영화에선 주인공 남녀가 가는 길이 늘 동일하다. 우연한 만남, 첫 눈에 반한 사랑, 하지만 주변의 반대, 둘은 그래도 모든 시련과 시험을 이겨내고, 사랑을 완성해 간다. 결국 사랑이 승리하고 둘은 행복의 키스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에 자막이 뜬다. “The End" 당연하다. 그 뒤는 없다. 행복해 보이는 행복감의 정열적인 키스 뒤엔 아이 젖 주고, 우는 아이 달래고, 설거지하며 정신없이 돈 벌러 하루를 보내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낭만적 사랑이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것, 존엄한 존재가 죽음에 이르면 단지 먼지에 불과한 것임을 아는 것, 그리고 인생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은 것임을 자각하는 것. 그것은 누구에게나 직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다. 그래서 영화는 가장 보기 좋은 장면에서 잘라버리고, 누군가 죽으면 빨리 매장하거나 화장해버린다. 보지 않으면 아픔도 적다. 시선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하지만 주사 맞는 것이 무서워 계속 뒤로 미루는 아이에겐 기다림의 두려움만 증가할 뿐이다.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 계속 응시를 주저하는 학생에겐 상상하는 만큼의 스트레스만 불어난다. 석가는 인생이 고(苦)라고 했다. 사는 것이 모두 고통이라는 말이 아니다. 인생의 마지막엔 반드시 이별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을 두려워한다. 천년을 함께 살아도 한 번은 헤어져야 한다. 헤어짐은 배고픔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죽음과 동일한 확실성이다.
왜 그런 것일까? 왜 나는 너를 만날 수 없는 걸까? 고상하고 심오한 철학적 질문 같지만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문제이다. 그렇게 보이는 것과 그런 것은 다르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누군가는 없고, 당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누군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만나는 그 사람은 지금 당신 앞에 분명히 구체적으로 현존한다. 하지만 분명히 실존하는 그 존재가 당신 앞엔 없다. 당신이 죽였기 때문이다.
처음 우리나라에서 황혼이혼이 있었을 때 담당판사가 말했다. “할머니! 오랫동안 할아버지와 잘 살아왔고, 특별한 문제도 없었다면서요?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러세요? 솔직히 이제 얼마 남지도 않으셨는데 대충 사시죠!”
판사는 할머니가 이혼하려는 남편과 같았다. 40년을 한 이불 덮고 살며 남성은 늘 여성을 안다고 자부했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 남성은 여성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해(understand)는 내가 상대방의 밑에(under) 서서(stand)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감을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그렇게 이기적인 존재는 늘 ‘이해한다’라고 말하며 내가 상대방의 밑에 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내 밑에(under) 세운다(let stand). 그리곤 맘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며 추측한다. “당신은 가정주부야, 가정주부면 가정주부답게 굴어야지, 무슨 친구동창회를 따라다니고 또 이 나이에 공부를 한다구?” 이해를 가장한 판단은 늘 타자성을 침해한다. 타자성은 단순히 다름이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거나 판단될 수 없는 개인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속성이다. 그래서 유태인을 개와 돼지로 규정한 나치는 그러한 존재론적 폭력을 바탕으로 가스실이라는 물리적 폭력을 현실화할 수 있었다.
물론 단순히 나치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르다고 같은 반 학우를 집단따돌림하며 책임은 별나게 노는 아이에게 있다고 말하는 아이들이나, 여자는 조숙한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느니 그런 남편에게 “너는 돈벌어오는 기계니 나가서 돈이나 벌어와”라고 말하는 아내는 이해를 말하며 이해는 거부하는 자들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인간이 없어” 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늘 자신을 배우자에게 투사할 뿐이다.
이기적인 마음, 모든 사람이 나만을 존경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욕망, 그것은 사실 나만 인간이고 다른 모든 존재는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라는 말이며, 스스로 모든 존재를 소유하고 싶다는 은폐된 욕망의 현실적 기호이다. 그런 존재에게 대화는 없다. 관계도 없다. 당연히 만남도 없다. 그래서 외롭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애완견이나 난을 키우며 고상함으로 자기보상심리를 충족시킨다. “얘가 사람보다 나아요!” 그러면서 은근히 자신을 절대적 재판관의 위치로 옮겨 놓는다. 말은 하지 않지만 결국 자신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위에 군림한다. 그래서 황혼이혼은 논리적 필연이다. 그들은 사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번도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한 적이 없다.
글 : 김봉규 본지 논설위원, 서강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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