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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순종

[엄무환 칼럼] 순종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구약성경 룻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룻이라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인 룻을 위해 뭔가 계획을 하나 세웁니다. 그것은 며느리가 이삭을 줍는 일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베들렘의 부자인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그때 보아스가 룻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룻을 통해 듣고선 나오미가 룻과 보아스와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모종의 작전을 지시합니다.

 

“내 딸아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다.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릴 것이다. 그러니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러면 그 다음은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할 것이다. 알았느냐”

 

그러자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제가 다 행하겠습니다” 세상에 요렇게 말 잘 듣는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 얼마나 행복할까요. 말만 들어도 예쁘지 않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시어머니라지만 며느리에게 어떻게 이런 지시를 합니까. 아니 외간 남자가 잠자기를 기다렸다가 가만히 들어가서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우라니요. 우리 상식으론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선 기업무르기, 즉 고엘 제도라는게 있어서 이 일이 가능했습니다. 기업무르기란 남편이 없는 과부들의 경우 가까운 친족 중에서 남편이 되어 경제적 문제와 후손까지 해결해주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둘 다 과부인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위해 이 일 생각하여 계획을 추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스라엘 사회에 이런 기업무르기 제도가 있을지라도 룻은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 이웃나라 모압 여인이었기 때문에 이런 제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또 안다고 해도 익숙하지가 않아 선뜻 응하기가 그리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러나 룻은 기꺼이 시어머니의 말에 “어머니의 말씀대로 제가 다 행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말만 한 게 아니라 그녀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그대로 행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말에 순종했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은 물론 다윗 왕가와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오르는 그야말로 인생 대박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들에게 순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합니다. 순종은 내 머리로 계산하여 빼거나 더하거나 하여 내가 하고 싶은 분량만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지시하는 분의 말을 한 치도 빼거나 더하거나 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행동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내 계산이 들어가면 순종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것,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오직 지시하는 분의 말에 내가 따르는 것만 요구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 믿음이 없으면 하기가 어렵습니다. 나에게 지시하는 분, 나에게 말하는 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순종도 없습니다. 따라서 순종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내가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순종을 통해 믿음이 확증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수백 번 수천 번 말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그건 못 믿겠다는 증거입니다.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에게 “어머니 말씀대로 제가 다 행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했을지라도 실제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건 불순종이며, 룻이 시어머니를 신뢰하지 않는, 믿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룻이 시어머니의 말에 불순종했다면 보아스와의 결혼은 이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룻이 인생 대박을 터뜨린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100%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룻이 시어머니의 말을 신뢰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순종은 항상 믿음과 함께 갑니다. 믿음의 열매가 순종이요, 순종이 믿음을 확증합니다.

 

이처럼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나에게 말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하는 말만 믿고 그대로 순종했다간 쪽박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순종과 관련하여 함께 살펴보고 싶은 것은 내가 나에게 순종하는 일입니다. 누가 나에게 지시해서가 아니라 내 생각, 내 마음의 지시에 내가 순종하는 일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그 무엇인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에 순종하며 살아가느냐는 겁니다. 나를 움직이는 내 생각, 내 마음을 신뢰할 수 있느냐,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 마음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순간순간 내 생각을 불어넣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나로 하여금 뭔가에 순종하게 한 그 장본인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가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가룟유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한 그 생각은 마귀가 집어넣은 생각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귀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생각을 집어넣는 존재구나’를 알게 되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이 한 말을 대변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선 곧이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1급 비밀을 알리신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주여, 우리가 주님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스승을 정말로 생각한 말이지요. 하지만 베드로의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몸을 돌이키시며 뭐라고 하셨느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고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책망이 이해가 되었을까요. 자기 딴에는 예수님을 정말로 생각해서 한 말인데 사탄이라니요. 그러나 베드로는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생각 속에 사탄이 개입했음을 아셨습니다.

 

▶저는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이 두 사건을 통해 내 생각 속에도 마귀 사탄이 개입하고 있구나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셨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에게 사탄이 인간적인 생각을 불어넣어 교묘하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는 사실도 동시에 지적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제 생각을 곰곰이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내 생각에 너무나 순종을 잘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며, 도대체 이런 생각을 누가 집어넣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제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거의 100% 제 생각에 순종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현재의 제 삶은 제가 제 생각에 100% 순종한 삶의 결론입니다.

 

문제는 제가 제 생각에 100% 순종한 것이 하나님에게 불순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내 생각에 순종한 것이 하나님에겐 불순종이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지자 상황은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100% 내 생각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왔던 지난날 저의 삶이 하나님에 대해 불순종이었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붙잡고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내 생각을 내가 믿을 수 있느냐. 누가 내 생각을 불어넣는 것이냐. 이런 것을 알기 위해 성경을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베드로처럼 나도 내 생각 속에 사탄 마귀가 생각을 불어넣었다면 그럼 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인데 이건 한 마디로 최악의 삶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은 쪽박 인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 특히 윗사람의 말이나 의견에 순순히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이라는 단어엔 매우 중요한 의미가 하나 내포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를 살펴보면 ‘순종’이라는 단어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종의 히브리어는 ‘샤마’로 그 의미는 ‘듣다’입니다. 즉 순종은 듣는 것과 연관된다는 의미이지요. 그리고 순종의 헬라어는 휘파쿠오’인데 이 단어는 ‘~아래에’라는 뜻의 ‘휘포’와 ‘듣다’라는 뜻의 ‘아쿠오’가 결합된 단어로 문자적 의미는 ‘~아래에 서서 듣다’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모두 ‘순종’이라는 단어가 ‘듣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순종’의 또 다른 헬라어가 있어요. 휘포타소’입니다. 이 단어는 ‘명령하다’란 뜻의 ‘타소’와 ‘~아래에’라는 뜻의 ‘휘포’의 합성어로 그 뜻은 ‘~명령 아래에 있다’라는 뜻에서 ‘복종하다’는 의미입니다.

 

순종의 반대말이 ‘불순종’이지요. ‘불순종’에 대해 한글사전은 ‘순순히 따르지 않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뜻이 다릅니다. 헬라어는 ‘파라코에’라고 하는데, 그 뜻은 ‘~옆에, 대항하여, 거슬려’라는 뜻의 ‘파라’와 ‘듣다’라는 뜻을 가진 ‘아쿠오’가 결합된 단어로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듣다’라는 뜻입니다. 불순종 역시 ‘듣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순종과 불순종은 둘 다 ‘듣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말을 듣는다고 했는데 그럼 누구의 말을 듣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에 순종과 불순종의 대표적 사건이 하나 소개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모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 즉 사탄 마귀의 말을 듣고 그 말대로 반응하는 바람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분명히 말을 들었고 그 말대로 액션을 취했습니다. 말에 순종한 것이지요. 그런데 누구의 말을 들었느냐. 누구의 말에 순종했느냐 하면 마귀의 말입니다. 성경은 마귀의 말에 순종한 이것을 가리켜 ‘죄’라고 하며, 그 죄의 결과가 뭐냐 하면 죽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의 상태를 성경은 저주요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16절과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나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아담이 들었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내가 이제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는 선택의 과제가 따릅니다. 즉 말씀대로 내가 액션을 취할 것이냐 아니면 말씀을 흘려버릴 것이냐 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뱀이 등장합니다. 이 뱀은 사탄 마귀의 앞잡이입니다. 뱀이 먼저 하와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의 말에 여자가 대답합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가 한 이 말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을까라는 말은 죽을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다 뭐 이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제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와가 덧붙인 말입니다. 하와의 말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즉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단단히 새겨듣지 않고 귓전으로 흘려버린 거라는 겁니다. 이게 불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것이 불순종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쉐마 이스라엘,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쉐마, 들으라는 겁니다. 누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마음에 확실히 새겨들으라는 겁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왜 이렇게 하라는 걸까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와처럼 된다는 겁니다. 하와처럼 하나님 말씀을 귓전으로 흘러들으면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교묘하게 변질시켜 나를 미혹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와의 경우를 다시 살펴봅니다. 뱀이 하와의 말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시선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의 이 말이 맞나요? 틀립니다. 문제는 하와가 이때 만해도 죽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의미를 아십니까. 죽음이 뭔가요? 소멸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닙니다. 죽음은 분리입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분리되는 것, 죽음입니다. 나무가 흙에서 분리되는 것, 죽음입니다. 물고기는 반드시 물에서 살아야 하고, 나무는 흙에서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창조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는 물에서 생명활동을 하기 위한 온갖 영양분을 공급받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나무는 흙을 통해 생명활동에 필요한 모든 영양분을 공급받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되면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에 생명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생명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받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되면 공급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은 살아 있으나 영으론 죽은 사람들입니다.

 

죽은 물고기가 물을 거슬려 올라갈 수 있든가요.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려 올라갑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이 세상의 풍속과 죄에 대해 싸울 수 없습니다. 그냥 타협하며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절대로 세상풍속이나 죄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맞서 싸웁니다. 목숨 걸고 싸웁니다. 그러므로 세상풍속을 쫓아가거나 타협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결정적인 어퍼컷을 한방 날립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이 던진 이 말에 하와가 그야말로 뽕 갔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이 말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나무를 보는데 어떻게 보이느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뱀의 말을 듣기 전과 들은 후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뱀의 말을 듣기 전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반대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하와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여 그 열매를 따먹었다는 겁니다.

 

똑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왜 다르게 보이지요? 나무가 달라졌나요 내 마음이 달라졌나요?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이지요. 나무는 똑같습니다. 내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왜 달라졌습니까. 왜 하와의 마음이 바뀌어졌습니까. ‘약한 자여 그대는 여자이니라.’ 그래서입니까. 원인이 뭡니까. 뱀의 말을 들은 것, 그것이 원인입니다. 뱀의 말을 듣지 않았었다면, 뱀의 말을 들어도 그냥 흘려버렸었다면 하와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가 바로 이겁니다. 누구의 말을 들었느냐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을 때 하와의 마음과 뱀의 말을 듣고 난 다음의 하와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나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명활동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야만 합니다. 다른 말이 들어오면 안됩니다. 그러면 나도 하와처럼 얼마든지 마음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약한 자여 그대는 여자이니라’가 아닙니다. ‘약한 자여 그대는 엄무환이니라’ 입니다. 내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이상 바뀔 수 있습니다. 얼마나 미혹에 약한지 모릅니다. 듣는 말에 따라 춤추는 나의 이 마음을 나도 어찌해볼 수 없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게 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내 마음을 미혹하여 하와처럼 하나님이 하지 말라시는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순간순간 내 마음에 들려옵니다. 그런데 난 그 생각들을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하와처럼 순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에게 불순종인데 말입니다.

 

▶성경은 뱀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하쉬’입니다. 이 단어는 ‘쉿 소리를 내다, 속삭이다, 점치다, 요술을 행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드럽게 속삭이면서 누군가를 속이는 사람, 점을 치거나 요술을 행하여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거짓된 술수에 빠뜨리는 사람을 가리켜 ‘나하쉬’, 즉 뱀과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단 마귀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나하쉬’의 전매특허가 하나 있습니다. ‘간교’입니다.

 

간교하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아룸’입니다. ‘아룸’은 원래 ‘신중하다, 슬기롭다, 지혜롭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지혜로우냐하면 들짐승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다른 짐승들은 뱀을 이길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처럼 ‘아룸’ 즉 신중하고 슬기로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뱀은 하나님이 주신 ‘아룸’을 악용하고 말았습니다. 교활하고 악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아룸’이 간교라는 의미의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단 마귀의 속성입니다.

 

간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가 ‘간사’입니다. ‘간사’라는 말의 헬라어는 ‘돌로스’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 시의 목마(木馬) 등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합니다.

 

‘간교’나 ‘간사’는 사탄 마귀의 특성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사용했던 방법이 바로 이 ‘간교’와 ‘간사’입니다. “이것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미끼에 하와가 그만 낚이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불순종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마음에 미혹되어 반응한 것, 즉 뱀의 미끼에 낚여 반응한 것 말입니다.

 

문제는 사탄 마귀의 이 간교와 간사에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가 갖고 있는 간교와 간사함은 천하 인간에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최상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분만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그 주인공이십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세 번씩이나 미끼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못했지요. 예수님이 마귀보다 더 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비진리인 마귀가 아무리 미혹한들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진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지금도 미끼를 던집니다. 하지만 진리의 사람은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마귀의 미끼, 즉 간교나 간사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붙잡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보호가 있으며 승리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아담을 미혹하여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게 만든 마귀는 가룟 유다의 생각 속에 예수를 팔 생각을 불어넣었고 베드로의 생각 속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말라고 부추기게 했습니다. 이 마귀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생각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생각을 불어넣어 사용했다면 우리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마귀가 나에게 불어넣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같았는데 죽기 직전에서야 내 생각들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이었다면 어찌되는 겁니까. 이 얼마나 무서운 겁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마귀의 말에 미혹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불순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불순종은 죄입니다. 그 죄의 결과는 저주요 죽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입니다. 태양이 사라지면 지구의 모든 생명활동이 스톱이 되듯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우리의 삶엔 생명활동이 중단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존재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근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함, 우울증 등은 하나님과의 관계 중단에서 오는 증상들입니다. 이것을 초래한 원인이 불순종입니다. 마귀의 말을 듣고 내 마음이 미혹된 그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불순종은 마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하와처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분순종이 됩니다.

 

나를 움직이는 내 생각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까, 아니면 마귀에게서 온 것입니까. 그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내 생각이 나를 속이고 하나님에 대해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것의 결과는 오롯이 내가 져야합니다.

 

롯이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시어머니를 신뢰해서입니다. 시어머니의 말을 믿어서입니다. 이처럼 순종은 신뢰와 믿음을 수반합니다.

 

▶내가 뭔가를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은 내가 무엇엔가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꼭 집어서 누가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 마음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과 그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내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순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성경은 크게 두 군데에서 나에게 지시가 전달된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과 마귀 사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에 순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든지 아니면 마귀 사탄에게 순종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마귀를 믿겠습니까. 누가 마귀를 믿겠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마귀를 믿고 있습니다. 나타나는 인생의 결론이 이를 사실적으로 증명하고 있어요. 저 같은 사람에게도 그것이 보이는데 하나님에게야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정작 우리 자신들은 이것이 안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마귀가 불어넣은 생각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자기 생각을 의심없이 받아들여 그 생각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외일까요. 그러므로 긴장해야 합니다.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 대해서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생각, 나의 마음입니다.

 

마귀가 불어넣은 생각에 하와가 순종했고 가룟 유다가 순종했고 베드로가 순종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 순종은 하나님에 대해선 불순종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순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마귀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말이 아닙니다. 나의 삶입니다. 나의 삶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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