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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소통

[엄무환 칼럼] 소통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유재화 씨라는 분이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 중에서 ‘적군과의 소통’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난 2010년 여름, 아프간에서 40여 년간 가족과 함께 살며 그곳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온 미국인 안과의사 톰슨과 일행 10여 명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간 오지의 가난한 환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런 일정은 다른 나라에서 온 봉사자들과 그 안과의사에게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던 일행 앞에 뜻밖에도 불쑥 나타난 것은 두건을 쓴 무장괴한들이었다. 괴한들은 일행을 위협하며 숲으로 데려갔다. 공포스런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일행의 대표로서 톰슨은 침착하게 자신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의사입니다. 아프간 사람들을 치료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총성이 이어졌고 일행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의료 활동을 해온 봉사자들조차도 그들에게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의료구호 단체들이 아프간 현지인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안전을 보장받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 당시의 아프간을 움직이는 대세가 탈레반임을 간과했던 것이다. 톰슨이 속한 구호단체가 대화상대로 삼은 것은 실세인 탈레반이 아니라, 아프간 지방정부와 지역 원로들이었다. 정작 총을 가진 사람들은 탈레반인데 말이다.

 

이 사건은 결국 구호단체들과 아프간 사람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탈레반 세력과의 소통 부재로 야기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구호단체들 사이에서는 탈레반과의 대화 창구를 열어야 한다는 절실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도움을 준다 해도 우리의 진심을 탈레반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지 않으면 의료진의 목숨은 언제든지 이슬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들과 만나야 합니다.”

 

그로부터 신변안전을 도모하면서 의료구호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정한 협력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게 되었고, 마침내 구호단체와 탈레반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구호단체들이 탈레반에게 아프간 정부와 같은 위치에서 협상할 것을 제의하자 뜻밖에도 선뜻 만남에 응해 왔다. 상대방을 적이 아닌 대화상대로 대우하자 탈레반도 기꺼이 구호단체를 존중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협상을 거친 한 구호단체는 탈레반의 경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활동하기에 이른 것은 물론, 탈레반 고위 관료나 가족들까지 진료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재화 씨는 이 사연을 소개한 후 “이것이 바로 대화와 소통의 힘이 아니겠느냐”며 “무시하고 대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때는 그저 서로에게 적군이었을 뿐이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의 필요성을 알고 이해하기 시작하자 적극적인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대화와 소통, 협상의 중요성을 알게 된 수많은 국제 구호단체들은 그 후로 탈레반을 아프간 정부 대하듯 대우함으로써 이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탈레반 지역사령관과도 직접 마주 앉아 협상을 벌일 뿐 아니라 함께 진료일정을 상의하는 정도로까지 나아갔다.”며 “근본적으로 전쟁 역시 극단적인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소통과 관련하여 유재화씨가 쓴 또 하나의 글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40대의 장OO 씨는 다니던 회사가 구조조정에 휘말리자 부장이던 자신에게 팀원들 몇몇을 해고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동안 동고동락해온 동료직원들을 차마 자신의 손으로 자를 수 없어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는 차라리 자신이 사표를 던지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말았다. 그로써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그에게도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마침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이 된 그는 사표를 낸 며칠 후 아내와 함께 결혼기념일 여행을 떠났다. 승용차를 운전하여 고속도로를 달려가던 중 휴게소에 들렀던 그는 담배를 피운다며 화장실 쪽으로 갔다.

 

‘무슨 담배를 이렇게 오래 피우는 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든 아내가 남편을 찾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아내는 화장실 뒤편에서 그를 발견했다. 남편은 이미 화장실 뒷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던 철제 사다리에 밧줄로 목을 맨 뒤였다.

 

“여보----!!!!” 아내의 비명을 들은 사람들이 달려와 필사적으로 그를 끌어내렸으나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결국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죽을힘을 다해 남편을 구하려 했음에도 결과가 그렇게 되자 시부모는 그녀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죽어도 못 헤어진다며 결혼하더니 결국은 네년이 남편을 잡아먹는구나. 독한년 같으니라고!”

 

남편의 죽음을 목격한 당사자로서의 충격과 스트레스만으로도 그녀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도 주위에서조차 싸늘하고 냉담하게 반응하는 것은 더욱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것을 견디다 못한 그녀 스스로도 자살 충동을 느끼곤 했다. 누구보다 위로하고 감싸주어야 할 시부모가 그렇게 나오자 그녀는 어디에도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몇 년째 날마다 불면증과 우울증, 죽은 남편에 대한 분노로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기만 했다. 그러던 중 자살자 유가족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임에 나가서야 그녀는 비로소 조금씩 닫힌 마음이 열리고 쌓여 있던 분노와 고통스러운 감정이 희석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는 이 두 개의 글을 읽고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특히 부부간의 소통이야 말로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필수 요인임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장OO 씨가 자신의 고민을 아내에게 털어놓고 함께 나누었다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OO 씨는 자신의 고민을 혼자 삭히다가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극단적 선택을 했고, 그의 선택으로 인해 살아 있는 가족들은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프간에서 의료봉사를 하다가 탈레반에 의해 목숨을 잃은 톰슨 씨의 경우도 소통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이 사건 이후 적군인 탈레반과 소통이 이뤄지자 상황이 180도로 달라졌다는 사실은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사실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룻기에도 소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과의 소통 말입니다.

 

며느리 룻이 집으로 돌아와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하루 동안 주운 이삭을 보입니다. 이날 룻이 주운 이삭이 자그마치 한 에바가 되었습니다. 한 에바는 23리터로 약 열두되 정도의 분량인데 이는 결코 적지 않은 양입니다. 게다가 며느리 룻이 보아스 밭에서 배불리 먹고 음식을 정성껏 남겨 가지고 시어머니에게 드립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며느리 룻의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그러자 시어머니 나오미가 놀랍기도 하고 또 궁금하기도 하여 며느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어디서 이삭을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에게 이처럼 친절하게 배려해 주신 분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복이 있기를 원한다.”

 

나오미의 이 말 속엔 며느리 룻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신변의 염려도 살짝 담겨 있습니다. 며느리가 아직 젊었기 때문입니다.

 

룻이 시어머니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어머니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며느리의 대답을 들은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여기서 생존한 자란 나오미와 룻을 가리키며, 사망한 자란 모압 땅에서 죽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말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이 살아 있었을 때에도 자신의 가정에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자신들에게도 이렇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다는 사실에 감격해 합니다. 이처럼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 주는데 어찌 고맙지 않겠습니까. 어찌 진심어린 축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그 순간 나오미에게 섬광처럼 번뜩이는 그 무엇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을 룻에게 말합니다.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나오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기업 무를 자’라는 이 말은 룻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나오미가 말한 ‘기업무를 자’란 ‘고엘’이라는 제도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열두 지파가 서로 땅을 분배할 때 각자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제도입니다. 따라서 고엘이 된 사람은 반드시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는데 그 의무를 보면 첫째로,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 주어야 했고, 둘째로, 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져야 했으며, 셋째, 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 주어야 함은 물론 심지어 그 친족의 죄 값을 대신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 고엘의 자격이 주어지느냐. 첫째, 혈연적 관계에 있는 사람, 즉 형제나 친척입니다. 둘째, 자원한 사람, 셋째, 고엘로서의 능력을 구비한 사람 등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오미는 베들레헴 성에서 유력한 자이며, 자기 가족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친족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 즉 고엘로서 가장 합당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기업무를 자라는 이 말의 뜻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룻이 시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시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통관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왜냐하면 소통은 반드시 순종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소통과 순종은 함께 합니다. 그러나 불통은 불순종과 함께 합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보아스라는 분이 제게 말하기를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저더러 자기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했어요”

 

그러자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고 코치를 합니다. 룻이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코치를 해준 그대로 순종한 것은 물론입니다. 우린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과의 이런 관계를 보며 얼마나 두 사람이 소통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며느리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 두 사람 사이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고부간에 갈등을 느끼며 살았었다면 어떤 상황이 생겼을까요.

 

우선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남겨서 갖다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미주알고주알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오늘 어디서 이삭을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고 물을 때 묵묵부답으로 대답을 하지 않거나 “뭐 그런 것까지 알려고 하세요.”하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시어머니의 마음엔 근심과 염려가 쌓일 것이며 며느리에 대한 오해가 생긴 나머지 마음이 힘들어져 함께 살기가 매우 거북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령 했다손치더라도 룻이 시어머니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되면 나오미는 물론 룻의 인생도 별볼일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이고 룻기라는 성경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룻이 나중에 보아스와 결혼합니다. 그 결과 룻과 나오미는 가난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받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았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인생 최대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대박 인생의 주인공이 된 것이지요. 이렇게 된 주된 요인이 소통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 시어머니 나오미와의 소통 말입니다.

 

소통이 고부간에 화해관계를 갖게 했고 시어머니를 통해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시어머니의 코치를 받아 룻이 보아스와 결혼에 골인하게 되어 인생 최대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며느리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와의 아름다운 이 소통관계는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소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이 이뤄질 때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영으로 소통관계를 이루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소통이 깨어지고 불통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통,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모든 저주와 죽음을 몰고 왔습니다. 마치 우리 몸의 혈관이 막혀 피가 순환되지 않아 병이 오고 죽음이 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과 불통한 사람은 사람과도 불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소통이 이뤄지는 사람은 사람과도 소통이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뤄지는 사람에게만 부어집니다. 하나님과 불통인 사람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수도꼭지를 잠근 것처럼 말입니다. 수도꼭지를 털어야 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소통이 되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와 평강 형통 감사 등의 축복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았습니다. 불통 관계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통 관계는 곧 마귀와의 소통을 의미합니다. 마귀와의 소통은 마귀의 근성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옴을 의미합니다. 이 삶엔 근심과 염려와 미움과 다툼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 있습니다. 마귀와의 소통으로 인해 마귀로부터 이런 쓰레기들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지옥과 같은 삶입니다. 하나님과 불통 관계에 있으면 이같은 삶을 극복하거나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노예처럼 고스란히 당해야 합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불통인 삶이 지옥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과 불통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바벨탑을 쌓습니다. 그리고 도무지 동문서답(東問西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말을 귓전으로 흘러버리는 마이동풍(馬耳東風)입니다. 이것이 자고이래로 모든 인간이 처한 영적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불통으로 인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이 죄를 해결하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통케 하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불통 관계를 초래한 죄를 해결하시어 죄로 인해 불통되었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소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통됩니다. 그 증거가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의 삶, 이것이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진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고.

 

하나님과 소통이 이뤄지면 내 안에 있던 미움이 점점 사라지고 용서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죄를 밥 먹듯이 지었는데 죄짓는 게 두려워지고 싫어지는 마음이 생깁니다. 매사에 짜증이 생기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데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내 주위의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돌아보며 친절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걱정근심에 사로잡혀 살았는데 환경은 그대로일지라도 그러나 내 마음엔 평강이 밀려옵니다.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도무지 이렇게 변화되는 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있다면 딱 한 가지,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것밖에 없습니다. 그랬는데 이런 변화가 내 마음에서 일어나더라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변화의 주인공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금방 미움과 짜증과 분노와 혈기와 근심과 염려 등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마귀가 내 마음에 심어놓은 이런 쓰레기들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뤄지면서 점점 내 마음에서 이런 쓰레기들이 하나 둘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천국의 삶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며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가를 알게 됩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통은 막힘이 없이 서로 잘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명절 때 고속도로에 차들로 인해 불통이 되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짜증도 나고 그렇지요. 그러나 고속도로가 뚫려 소통이 원활하면 마음도 뻥 뚫리지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도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소통되려면 죄가 해결되면 됩니다. 그 죄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해결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소통이 이뤄집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과도 소통이 이뤄집니다. 하나님과 내가 소통되었음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입니다. 경청하는 자세, 배우려는 자세를 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소통을 이룬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전달하십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뤄지자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미를 통해 룻에게로 흘러갔습니다. 룻이 하나님과 소통 관계를 가졌던 보아스와 결혼하자 보아스를 통해 룻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전달되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은 물론이요 무엇보다도 모압 여인 룻이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인생 대박이 터졌습니다.

 

죄 때문에 마귀와 소통관계를 이뤄 마귀의 근성이 내 안에 충만하여 쪽박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소통이 이뤄지면 룻처럼 대박 인생의 주인공이 됩니다.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영원한 천국 시민이 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내 주위의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과 복이 흘러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섬기는 군 교회에 참 많은 은혜와 복을 붓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불통이었던 병사들이 하나님과 소통관계가 되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병사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부대 지휘관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관심병사들도 마찬가지로 교회에 와서 하나님과의 소통관계가 되자 변화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군에 오기 전에 한 번도 교회를 간 적이 없었던 병사들도 하나님과 소통되면서부터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소통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에 기쁨이 있습니다. 평강이 있습니다. 아무리 고된 훈련을 받아도, 아무리 부대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교회에 오면 눈 녹듯이 녹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힘을 얻고 충전을 받아 부대로 돌아갑니다. 결코 쉽지 않은 40키로 행군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해낼 수 있는 힘이 부어지더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과의 소통으로 인해 나타나는 열매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제가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통해 우리 병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 병사들을 통해 생활관과 부대에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길 기도합니다. 그리되면 우리 부대가 꿈의 동산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기만 하면 대박 인생이 된다고.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과 불통이 되면 가룟 유다나 구약의 사울 왕처럼 쪽박 인생이 된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되고 로마에 의해 무너지게 된 것은 하나님과의 불통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과의 소통이 원활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국민의 고단한 삶을 만져주며 마음의 쉼터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며 경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반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으며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나라 경제는 물론이요 한국 교회의 재정적 상태에도 빨간 신호등이 켜졌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었으며, 교회를 떠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불통이 그 원인입니다. 문제가 너무나 간단한데 그러나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많은 신학자들과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궁금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간의 분쟁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언론에 한국교회의 추한 모습들이 자꾸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하나님과 불통 관계에 놓였다는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답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정말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답입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이뤄지면 내 인생은 물론이요 내가 속한 가정이나 공동체, 그리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과 축복이 강같이 흐릅니다. 승리의 인생, 대박 인생이 됩니다.

 

별 볼일 없었던 모압 여인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고 후대까지 낳았으며,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의 반열에 오르는 축복의 주인공이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그야말로 쪽박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순교의 인생으로 생을 마감한 대박 인생의 주인공이 된 근원적인 요인은 무엇입니까. 스펙이 변변찮은 고기잡이 어부 출신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 역시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순교로 생을 마감한 대박 인생의 주인공들이 된 요인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인은 딱 한가지,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저 역시 쪽박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박 인생의 주인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하시는 일들이 너무 놀랍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과 저의 인생을 바꾼 주된 요인이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답입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들과 교인들이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하나님과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엄무환 이전 칼럼]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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