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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43)] 107. 피지(Fiji)-2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43)] 107. 피지(Fiji)-2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나의 이임을 아쉬워 하는 Vunibobo 외무장관, 1998.2)) . ⒞시사타임즈


3. 피지에서 만난 사람들

(Mara대통령과 Rabuka수상)

 

피지가 197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Kamisese Mara는 초대 수상으로 선출되어 16년을 집권하였으나 1896년 선거에서 인도계가 주도하는 노동당에 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피지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힌디인 수상이 선출되자 피지 본토인이 장악하고 있는 군부가 흔들렸다. Sitiveni Rabuka중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선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사정권에 이어 자신이 민선 총리가 되었으며 Mara 전 수상을 대통령에 옹립하였다. 영국은 민선 정권을 무너뜨린 Rabuka정권을 인정치 않고 영연방에서 피지를 축출하려 했다. 그러자 피지는 영연방에서 자진 탈퇴했다. 재미있는 것은 피지가 영연방에서 탈퇴했지만 장관 집무실에 대통령 사진 위에 영국여왕의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는 것이다. 내가 1996년, 피지에 도착했을 때는 Rabuka정권이 국내외의 비난을 그런대로 잠재우고 안정을 취하던 시기였다.

 

▲(한광섭 참사관, 문병록 대사, Mara 대통령, 송인엽 소잗, 1997.9). ⒞시사타임즈


나는 Mara 대통령을 1997년 9월에 문병록 대사와 함께 대통령궁에서 면담하였다. 협력단이 대통령 실 소속 화물선에 항법장치 등의 기자재 지원에 대한 사의를 표명하기 위하여 대사와 협력단 소장을 초청한 자리였다. 그는 한국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하며 자리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Rabuka수상은 공식적으로는 면담 기회가 없었으나 수바골프장에서 세 번 조우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Rabuka수상은 1995년도에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고 자기가 아팠을 때 협력단 단원이 간호해준 인연을 이야기하며 협력단을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게 따로 연락하겠으니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했으나 실제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도 연락을 미리 취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면담을 요청했을 때 줄 선물(협력사업)이 마땅치 않아 포기했다.

 

Mara대통령이나 Rabuka수상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들이다. Mara대통령은 키가 크고(185cm 정도) 영국신사와 같은 외모에 근엄한 풍모의 소유자였다. Rabuka수상은 전형적인 멜라네시아인으로 당당한 체구에 얼굴은 호랑이 상이었다. 작은 나라의 지도자들이지만 풍채나 얼굴, 카리스마는 어느 나라의 지도자와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았다.

 

▲ (Rabuka 수상). ⒞시사타임즈



Rabuka수상은 2000년도 선거에서 인도계에 패하고 Mara대통령과 함께 야인이 되었다. 그러자 바로 피지 본토의 민간인이 주도하여 다시 정변을 일으켜 인도계를 무너뜨렸다. 피지는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다가 2006년 군사령관이던 바이니마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에 이어 자신이 민선으로 수상에 올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마이니마라 수상을 2012년 2월 말에 장우주 휘지 명예 총영사와 함께 인천공항 귀빈실에서 3시간 동안 만나 휘지 발전 방향에 대하여 대화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을 배우기 위하여 2012년 내에 주한 휘지 대사관을 개설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실제로 실행했다.

 

(Vunibobo 외무장관)

 

Vunibobo(1932년생)는 내가 피지에 도착했을 때 상공장관을 마치고 재무장관 이었으며, 내가 피지에 근무 하는 중에 외교부 장관이 되었다. Vunobobo장관은 전형적인 멜리네사안인으로 UN에서 오래 근무했으며, 특히 UNDP 서울사무소장을 6년이나 역임하여 우리나라에서 UN의 지원 사업을 많이 수행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의 근면성과 역동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전임인 김용표 소장과 이태주 박사로부터 이연수, 이지영 소장도 Vunibobo장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피지에 도착하자 재무장관인 Vunibobo는 1996년 9월, 나를 만찬에 초대하며 극진히 대접했다. 피지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한국의 협력 사업을 많이 유치하고자 했다. 그는 의료개선 사업, 발전소, 공무원 훈련, 정부종합청사 건립 등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의 새마을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으나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피지의 국민성 때문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접목시켜야 되는가에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이임을 아쉬워 하는 Vunibobo 외무장관, 1998.2)) . ⒞시사타임즈


Vunibobo재무장관은 1997년 10월에 외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내가 피지를 떠날 때에도 외교부에서 환송 다과회를 베풀어 주었다.

“한국을 그렇게 잘 아시고 좋아하시고 배우고 싶어 하셨던 브니봄보 장관님, 지금도 건강하시지요? 제가 한 번 곧 찾아가 한국 소식 전하겠습니다. 갈 때, 좋아하시는 백김치를 꼭 갖고 가겠습니다.”

 

(Emitai & Asinate Boladuadua 부부)

 

Emitai Boladuadua는 1940년생으로 멜라네사이아계이며, 외교부 차관보로 나와 대 피지 협력사업 전반을 협의하는 파트너였다. 그는 내가 피지 근무를 마칠 무렵 차관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영국 대사로 부임하여 7년 동안 영국에 거주하였다. 피지는 유럽에 영국과 벨기에 두 곳에만 상주 공관이 있기 때문에 겸임국가가 많다. 심지어는 이집트도 겸임국이었다. 내가 이라크에 근무할 때 영국으로 초청을 했지만 나는 시간을 낼 수 없었다.

 

 

▲(Boladuadua 외무차관 기족과, 1997.2). ⒞시사타임즈


부인 Asinate Boladuadua는 당시 보건부 차관보로로, 나와는 Raki Raki 병원과 Vatulele 보건소 건립을 할 때 실무 파트너였다. Boladuadua부부가 안팎으로 나와 업무 파트너였기 때문에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더욱이 집도 가까워 가족 모두가 형제처럼 지냈다. 그러니 대 피지 협력 사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만 우리의 지원 규모가 크지 않아 피지 측의 요청을 대부분 받아주질 못하여 우리가 지원해 주면서도 오히려 빚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피지는 1987년 북한의 KAL기 폭파 후 북한과 단교한 유일한 국가로, 우리나라에 항상 우호적 자세를 견지하는 나라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도 많았다. 2012년 7월, 피지로서는 11번째 상주 대사관을 서울에 개설했다. 나는 부임할 때 고려청자 4개 한 세트를 구입하여 집에 갖고 있다가 근무를 마치고 올 때 두 점을 Boladuadua부부에게 선물했다.

 

Boladuadua 부부는 슬하에 딸만 네 명을 두었으며 막내딸 Veshi가 아영이보다 한 살 많아 친구로 지냈다. 수원대학교 영문학 교수인 이미재 박사가 영어 방언 연구차 피지에 3개월 간다기에 Boladuadua집에 기거를 부탁했더니 기꺼이 응해 주었다.

 

지금은 부부가 모두 은퇴했으며 세 딸은 출가했고 막내딸과 같이 산다며 나한테 피지를 방문하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아직 갈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꼭 가서 만나고 싶다.

 

(Lailun Khan 부부)

 

▲칸 상원의원과 Lailun 국장 부부와, 1998.1). ⒞시사타임즈


Lailun Khan은 1954년생이며 힌두인 여성으로 내가 재임할 때 외교부 협력국장이었다. 인도계로서는 최고위직이었다. 170cm를 넘는 훤칠한 키에 뛰어난 미모를 지녔다. Boladuadua차관과 더불어 나의 업무 파트너였다. 부군은 상원의원이었다. Khan 부부도 열렬한 친 한파로 우리 가족과 형제처럼 지냈다. 두 부부는 늦둥이 아들을 두었는데, 내가 떠나올 때 그 아들이 2살이었다.

 

나는 가져온 고려청자 네 점 중 Boladuadua차관에게 두 점을 선물하고 나머지 두 점을 Khan부부에게 선물했는데, 선물한 그날 밤 그 자리에서, 그 아들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엉금엄금 기어가서 깨뜨려 버렸다. Khan부부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Khan부부는 그 깨진 조각들을 정성스럽게 모두 모았다. 그것을 전문가를 시켜 잘 복원하겠다면서……. 나는 기르고 있던 순종 도베르만도 Khan부부에게 선물했다. 왜냐하면 후임 김기웅 소장은 단신으로 부임하여 아파트를 임대하기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사나운 도베르만이 필요 없었다. 그 도베르만은 정병원 참사관이 수의사로 활동하던  협력단 봉사단원인 김정화의 추천으로 구입한 순종 도베르만이었으나 너무 사나워 그의 어린 애들이 무서워하자 우리에게 준 도베르만 한 쌍이었다.

 

내가 피지를 떠난 후 Khan은 차관보로 승진한 후 피지 투자진흥청장으로 근무한 후 지금은 은퇴했다.

 

(류병팔 목사 부부)

 

1948년생, 고향은 전주이다. 전북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6년간 성실히 하며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아 인간관계도 좋았다. 그러다 신앙심이 깊은 아내를 맞았다. 그도 침례교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열심히 공부했고, 기도했으며 늦깎이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8년, 선교사 직분을 받고 피지로 왔다. 피지에서 본토 피지인과 힌디인을 전도하는 선교사였으나 수바 한인교회의 담임 목사가 갑자기 서울로 가는 바람에 내가 피지 부임 당시에는 한인교회도 잠시 맡아 사역하고 있었다.

 

 

▲ (류병팔 목사, 문병록 대사, Bainimarama 군사령관, 1997.9 : 2008년 이후 현재 수상). ⒞시사타임즈


나는 문병록 대사의 권유로 한인들에게 인사하기 위하여 피지 도착 첫 일요일에 한인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 류병팔 목사는 고난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설교 후 광고 시간에 교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예배 후에는 다 같이 점심을 한단다. 교인은 30명 남짓이었다. 식사 중에 갑자기 문대사가 나한테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느냐 물었다. 전주고등학교라고 하자 류 목사가 “어 나하고 동문이네.”하면서, 자기는 45회졸업생 이라며 나보고 몇 회 졸업생이냐고 물었다. 류 목사는 나의 고교 4년 선배였다. 문병록 대사는 내외간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나를 전도하기 위하여 한인에게 인사시킨다는 명분으로 교회에 오게 하고, 류 목사와의 인연을 일부러 부각시켰던 것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계약한 우리 집은 막다른 골목의 끝집이었는데 그 골목 어귀에 한인교회가 있었으니 영락없이 목사 수중에 내가 사로잡힌 꼴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피지 체류동안 교회를 다녔다. 그래도 신앙심은 생기지 않았으나 찬송가는 열심히 따라 불렀다. 찬송가는 부르면 신이 났다. 교회가 이렇게 번창하는 것은 찬송가가 큰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만히 설교만 듣고 오는 것보다 얼마나 참여 의식이 강한가?

 

류 목사 내외는 우리 애들을 무척 사랑하였다. 그렇게 예쁘단다. 특히 아영이를 끼고 살았다. 하기야 두 분께는 슬하에 자녀가 없으니 더욱 그런 것 같았다. 한 번은 왜 자식이 없느냐 물으니 “우리 집사람은 불 끄고 누우면 1초 내에 골아 떨어져 송장이 되었다가 새벽기도 시간에 어김없이 부활하여 벌떡 일어난다네. 예수님은 한 번 부활하셨지만 우리 아내는 새벽마다 부활한다네.”하였다. “할렐루야!” 아무튼 두 분은 우리 애들을 우리 내외보다 더 사랑했고, 애들도 우리보다 류 목사 내외를 더 따랐다.

 

류 목사는 피지인 교회, 힌두인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고 한인교회도 한 1년 가까이 사역하여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그러나 시간만 나면 우리 집에 와 애들을 예뻐해 주었고 식사를 같이하며 사랑을 나눴다. 피지 본토인과 힌디인은 통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리도 같이 하질 않아 교회도 따로 개척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다. 1년 쯤 지나 한인교회에 임성택 목사가 안양에서 부임해와, 류 목사는 원래의 모습대로 피지인 선교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울에는 4-5년 마다 한 번씩 들린다. 나도 해외로 떠도는 몸이니 형제처럼 지냈으나 만나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수바 인근에서 피지인들과 그 특유의 웃음을 터뜨리며 2,000년 전의 예수의 사랑을 전파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모님은 새벽마다 부활하실 것이고……. 초등학교 2학년이던 우리 아영이가 이제 처녀가 되었는데 알아볼까? 만약 알아본다면 덥석 안아 전처럼 무릎에 앉힐까? 모르겠다. 하여간 그립고 보고 싶다.

 

(이건춘 사장)

 

1935년생으로 대전고등학교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베테랑 파일럿이었다. 대령으로 예편하고 고향 선배의 영향으로 피지로 오게 되었단다. 하는 일은, 공사를 졸업했음에도 바다에 관한 일이다. 참치 잡이 배 300톤급 3척을 구입하여 참치를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 배는 한번 출항하면 2주일 만에 돌아온다. 나는 피지에 도착하여 우여곡절 끝에 이건춘 사장의 집을 임차하여 올 때까지 거주하였다. 그래서 1주일에 한 번씩 싱싱한 참치 10kg 이상을 얻었다. 집에서 개를 네 마리 키웠는데, 참치 뼈다귀를 삶아서 개들에게 먹였다. 아마 우리가 얻어먹은 참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우리가 낸 월세의 10배는 될 것이다. 우리 집에 봉사단원, 정부인사, 공관직원을 집으로 많이 초청했는데 싱싱한 참치 회와 매운탕이 있으니 따로 돈이 많이 들지 않았다. 이건춘 사장의 공사 5년 후배인 김계동 사장도 피지에 이민을 왔었는데 둘의 관계는 얼마나 막역하고 깍듯한지 옆에서 보기 좋았다.

 

나는 피지를 떠난 온 이후 이건춘 사장을 만나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 한 번 만나면 그때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꼭 해야겠다. 이 사장이 준 그 싱싱하고 푸짐한 참치로 우리 가족과 봉사단원의 식욕도 채웠지만 많은 피지 인사들에게 한국음식의 맛깔스러움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한 피지 명예총영사 장우주 장군)

 

1927년 생으로 함흥이 고향이며 함흥공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백골부대장, 국방차관, 남북회담 사무총장, 해외건설협회 회장, 현대종합상사 사장, 현대건설 사장, 육사발전위원회 회장, 한미 경영원 이사장(현), 주한 피지명예총영사(현). 그가 거친 주요 직책이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직책들이다.

 

함흥 공고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고자 친구 1명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다 8‧15를 맞았다 한다. 진군하는 소련군과 같이 평양에 왔으나 공산당 행태가 싫어 월남하고 육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학하여 군문의 길에 들어섰다. 6‧25 때에는 맨 처음 평양과 원산에 입성했다.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이 한미 합동작전에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그의 영어실력은 1964년 국방부 차관보 재임 시 한국군 월남파병 때 미국과의 조건 협상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거의 우리 안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해외건설협회장 때 중동에서의 굵직한 건설 수주는 다 그의 작품이며, 이를 지켜본 정주영 현대 회장은 그에게 현대종합상사와 현대건설을 맡겨 1977년 우리나라가 수출 100억불 달성했을 때 현대가 업계 처음으로 10억불 탑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수상했다고 한다.

 

1996년 12월, 피지 수바에서 그를 처음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초인이었다. 나는 그 후 그의 신봉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내가 하는 일 또한 참으로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나를 항상 친구로 대해 주었다.

 

내가 에티오피아 참전기 『강뉴』를 발간할 때 그에게 추천서를 의뢰하니 깜짝 놀라며 어떻게 강뉴 용사들의 용맹함을 알게 되었냐고 물었다. 장우주 장군은 6‧25때 직접 그들의 전투를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승리에 대한 집념과 용맹함을 잘 알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생생한 추천서를 써주었다. 숨겨진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송 소장이 발굴하여 잘 정리했다고 과찬의 말을 하면서…….

 

“나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공산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친 용맹스러운 에티오피아 강뉴부대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충성심과 용기, 업무에 대한 헌신 그리고 오직 승리만을 인정하던 강력한 전투력은 정말 대단했다. 강뉴부대를 비롯한 참전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지켜진 자유의 땅 한국은 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강뉴부대의 위대한 업적과 숭고한 희생을 영원히 가슴 속에 새기게 될 것이다. (전 백골 부대장 장우주)”

 

또 나의 『페쉬메르가의 연인』을 한 권 증정했더니 바로 그 다음 날 전화를 걸어와, 하도 재미가 있어서 하룻밤 만에 다 읽었다는 것이다. 장 장군이 해외건설협회 재직 시 중동에서 일 년에 아홉 달은 지냈기 때문에 그곳에서 펼쳐지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어 책장을 중도에서 덮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82세였다. 그러한 열정으로 평생을 산분이다. 그는 말한다. 자기는 죽을 때까지 항상 영원한 현역이라고…….

 

▲ (앞줄 : 장기호 대사, 바르자니 총리, 장우주 장군, 필자). ⒞시사타임즈


2008년 2월, 아르빌의 니체르반 바르자니 총리가 방한하여 내가 신라호텔에서 조찬을 대접한다고 하니 장장군이 본인이 초대 해외건설협회장을 10년 지내는 동안 주로 활동한 무대가 중동이어서 중동에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자기 2째 아들이 현재 두바이 금융계에서 활동한다며 자기도 초대해달라고 하여 나는 그렇게 했다.

 

2012년 2월에 갑자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피지 Bainimarama 수상이 두바이 가는 길에 인천공항에 6시간 체류하니 같이 가서 영접하자는 것이었다. 비록 마이니마라 수상은 쿠데타로 집권하여 문제가 있기는 하나 엄연한 피지의 수상이니 피지 명예총영사로서 장 장군은 안 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동행하여 마이니마라 수상을 영접했다. 우리를 만난 바이니마라마 수상은 금년 7월, 서울에 피지대사관을 개설할 예정이라며 한-피 양국 우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해에 주한 대사관을 서울에 개설하였다. 우리 외교부에서는 공삭방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누구도 나오지 않고 귀빈실 사용만 허락했다. Bainimarama 수상은 2021.8월 현재도 수상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장 장군이 2011년에 목 수술을 하여 말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 지금도 40대처럼 꼿꼿하고 위풍스럽다. 또 내가 필리핀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가장 반겨줄 분이다.

 

▲(국격의 그림들 : 장우주 저, 2014). ⒞시사타임즈


내가 필리핀에서 2013년 4월에 돌아오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자서전을 집필하고 있다면서, 나에게 감수룰 부탁했다. 나와 그는 수시로 만나, 내용과 목차를 협의하고, 초고가 완성된 후 나는 교정도 여러 번 봐주었다. 그리고 완성된 원고를 2014년 1월 출판사에 보낸 뒤, 바로 2월 4일에 홀연 서거하였다. 그의 큰 아들인 장순흥 KAIST 교수가 한동대학교 총장에 부임하는 날이었다. 그는 생을 치열하게 조국의 방위와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 기록을 완성하자 생의 끈을 놓은 것이다. 그렇게 2014년 4월에  탄생한 책이 <국격의 그림들>이다. 나는 지금도 그가 보고 싶다. “장 장군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달려갑니다. 충성!!!”
 

 

(김규회 원장)

 

김규회(1958년생) 원장은 경북고와 경북의대를 졸업하고 일산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지역사회에서 봉사하는 가정 의학 전문의이다. 그는 다른 나라에도 관심이 많아 일 년에 한 두 번씩은 외국여행을 부인과 같이 한다.

 

▲(김규회 원장 부부). ⒞시사타임즈


1997년 4월쯤 수바에서 근무하고 있는 나에게 한국에 있는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피지에 관심이 있어 가려한다면서 피지 사정을 물었다. 또한 피지에서 관광 외에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정병원 서기관과 협의하여 그에게 고아원을 방문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올 때 어린이 여름옷과 학용품을 이민가방 두 개에 가득 담아왔다. 나는 정병원 서기관과 같이 그를 안내하여 수바 고아원을 방문하고 그가 가져온 선물을 전달하였다.

 

김규회 원장은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근무하던 2003년도에 타쉬켄트를 찾아와 고아원을 방문하여 선물을 전달했다. 그는 부인과 같이 사마르칸트 등 역사 유적지를 관심 있게 구경했다. 특히 15세기 초에 건축된 울르그베그 천문대에서 하루 길이를 오늘날과 거의 같게 측정한 것에 놀라며 당시 우즈벡의 발달된 문명에 감탄했다. 또한 8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사마르칸트 왕 즉위 지하 벽화에 통일신라 사신으로 추정되는 2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의 관계가 오래된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김 원장, 내가 은퇴하면 김 원장이 관심 있어 하는 세계문명 4대 발상지를 꼭 같이 가서 구경합시다.”  

 

참조 영상 1. (아름다운 세계) : https://youtu.be/76dMor10LL0

              2. (KOICA와 평화마라토너) : https://youtu.be/t0BR3hnENfw

              3. (미 대통령 축시) https://www.youtube.com/watch?v=pHMWElMOs04&t=170s

 

(108번 째 나라 호주 이야기로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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