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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6)]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5​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6)]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5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구광일, 최영미 봉사단원 : 사랑만이 기준이다!)

▲구광일, 최영미 부부와 승효 (c)시사타임즈

구광일(1979년생, 한국어) 봉사단원과 최영미(1976년생, 한국어) 봉사단원은 2003년 7월에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 동기이다. 그들은 두 달간의 현지적응훈련 기간 동안 누구보다도 러시아어에 열심히 했다. 훈련 후 두 단원은 경제외교대학교와 동방대학교에 각각 배치되어 한국어를 가르쳤다. 최영미 단원은 한국어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인성교육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특히 구광일 단원은 협력단의 동 대학 도서관 전자화 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아들 규영이가 여름 방학을 이용 우즈베키스탄에 왔을 때 구광일 단원과 침간산을 같이 갔는데 구 단원이 넘어져 팔목에 기브스를 하고 다녀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박근우 사범이 지도하는 우즈베키스탄 태권도 대표선수의 훈련에 규영이가 1주일 동안 참여 했는데, 그때 허리를 다쳐 고생하다가 결국은 한림대학교 성심 병원에서 허리수술을 했다. 규영이는 우즈베키스탄 태권도 대표선수 훈련 강도가 높아 실력이 한국에 근접한다고 나름대로 평가했다.

 

구 단원과 최 단원은 같이 잘 다녔으나 나는 한 번도 연인이라고 생각하질 않았다. 그저 동기생이고 오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이 봉사 활동 2년을 훌륭히 마치고 나서 서울에서 만났을 때 결혼한다기에 놀랐다. 생각해 보니 그들은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최수종 하희라 못지않은 아름다운 커플인데, 나는 처녀가 3년 연상이라는 생각에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힌 진부한 사람인가?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하며 밤새워 작성한 결혼 축시를 그들에게 선물했다.

 

구광일 단원은 유창한 러시아어, 영어 실력과 그의 협력단에서의 봉사활동이 높이 평가되어 2006년도에 외교부 특채에 선발되었다. 그는 해외공관과 본부를 드나들며 우리나라 외교일선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

 

그들에게 떡 두꺼비 같은 아들 승효가 있고 2013년 2월에 공주도 태어났다. 지금 보니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준 나의 스승이다. 오직 사랑만이 결혼의 기준이다.

 

(김문옥 동방대 한국어학부장, 김춘식 한국어교수)

 

내가 2002년 3월 우즈벡에 도착했을 때 김문옥(1935년생) 박사는 고려인 1세로 우즈벡 동방대학교 한국어학부 부장으로 오래 근무하고 있었다. 175cm의 키에 66kg정도 되는, 보기 좋게 마른 체구이며 은빛 머리가 보기에 좋은 학 같은 인상이다. 동방대학교에서, 1992년까지는 북한에서 교재와 선생을 지원 받아 북한어를 가르쳤단다. 1993년 이후에는 협력단에서 교재, 선생을 보내 주어 진짜 한국어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7년부터는 KOICA 협찬으로 한국어 웅변대회를 매년 개최한다고 좋아 했다. 김 박사는 나에게 자기가 주한 우즈벡 대사로 내정되었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영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김춘식(1953년생) 동방대학 교수는 성균관 대학교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십 여 년간 준비하다 성공치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한국어 보급에 관심을 갖고 우즈벡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부인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결혼 후 고시 공부를 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다했단다. 그런데 고시를 포기한 지금도 명색이 교수이지 한 달 급여가 100불이라 부인이 생활비를 부쳐 온다며 부인께 항상 죄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김 교수를 처음 만난 2002년 4월, 김춘식 교수는 부인이 보내주는 생활비를 쪼개어 4년째 방대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고려인 대학원생 2명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하여 러‧한사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2,000페이지가 넘는 국내 최대 러‧한사전이 목표였다. 90%정도 완성되었다면서 자료를 보여 주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90% 진척되었다지만 결과에 대하여 반신반의 했다. 대형 어학사전이 개인이 몇 년 만에 할 수 있는 일일까?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자본을 대주고 여러 전문가가 합심하여도 어려울 텐데……. 러시아어나 한국어를 전공하지도 않은 법학도가 자기가 사비로 고용한 아르바이트생 2명과 함께?

 

1인 사무소로 일에 파묻혀 김춘식 교수를 잊고 있었는데 2002년 12월, 김교수가 대사관 우리 사무소로 나를 찾아 왔다. 두꺼운 러‧한사전을 갖고서……. 한권에 싸인을 해서 나에게 선물했다. 살펴보니 ‘발행 : 고려대학교 러시아문화연구소 저자 : 김문옥, 김춘식’. 제본도 민중서관 사전처럼 튼튼했다. 손색이 없었다. 아니 더욱 방대했다. 나는 안다. 이 모든 것이 김춘식 교수의 자본과 노력과 5년 동안의 집념의 산물이라는 것을…….

 

나는 김문옥 교수가 퇴임 했는지 김춘식 교수가 아직도 우즈벡에 있는지 소식을 전혀 모른다. 아무튼 어디에 있든지 우즈베키스탄 한국어 보급의 개척자 김문옥 박사와 개인이 방대한 러‧한사전을 편찬한 김춘식 교수에게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마 그 동안에도 한 일이 많을 것이고 나에게 하고픈 말도 많을 것이다.

 

(이인나 박인나)

 

이인나(1976생)와 박인나(1981년생)는 고려인 3세로 모두 동방대학교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협력단 사무소 비서로 근무했다.

 

▲이인나, 박인나와 함께 (c)시사타임즈

내가 타쉬켄트에 도착했을 때 이인나는 우리 사무소에서 5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예쁘고 성실했다. 5년 동안 휴가를 하루도 못 갔단다. 일을 워낙 잘해 소장들이 그녀가 없으면 불안하여 휴가를 보낼 수 없었단다. 전임 옥이호 소장의 말이다. 박인나는 내가 도착했을 때는 동방대학 졸업반이었다.

 

이인나는 특히 동시통역에 능했다. 아마 대통령 통역을 해도 손색이 없었으리라. 나는 그녀와 각 대학이나 기관을 다니며 업무나 특강을 실시할 때 내가 러시아어를 못해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아주 기초적인 것 밖에는 러시아어를 못한다.

 

나는 이인나를 한국에 연수과정 동시통역으로 2주일 파견했다. 그녀로서는 처음 한국 방문이었다. 말없고 표정 없는 그녀였지만 참 좋아했다. 서울에서 돌아온 후 나는 그녀에게 1년 후에 재외동포재단 장학생 시험에 응시하여 한국에 가서 석사 공부를 하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바로 한 달 후에 내게 사직서를 주며 한국에 가겠다는 거였다. 바로 그 해의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나는 그녀가 없는 사무소를 상상할 수 없었지만 자기 발전을 위해 좋은 기회인데 말릴 수가 없었다. 새로 비서를 채용하면 일을 할 때까지 가르치려면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소요될 것인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한 그녀를 격려해주고 떠날 때 금일봉도 줬다. 이인나는 서울대에서 학위 취득 후 모스크바로 진출하여 현대자동차 모스크바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후임으로 선발시험을 거쳐 대학을 갓 졸업한 박인나가 채용되었다. 처음 일주일은 나도 야근하며 독하게 훈련시켰다. 왜냐하면 외환위기로 1인 사무소로 운영되어 일할 사람이 나와 비서뿐이기 때문에 산적한 일을 처리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3-4일 지나자 박인나가 힘들어서 사직하겠다고 했다. 나는 사직서를 수리하려다 박인나를 위해, 직장인의 자세, 힘든 시기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 등을 이야기하며 사표를 반려했다. 그러자 박인나는 나의 우려와는 달리 열심히 배우려하고 똑똑하여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스스로 터득하였다. 스스로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사무 파일도 읽고 또 읽어서 있는 곳과 내용을 한 달 만에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이인나가 있을 때처럼 행복하게 박인나와 함께 근무하다, 자랑스럽게 후임 김동호 소장에게 박인나를 인계했다.

 

그 후 박인나도 재외동포재단 장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시통역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또한 나와 같은 시절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어 교수로 봉사단원 생활을 한 이은구 단원(현재는 고교 국어교사)과 결혼하여 박사과정을 밟으며 동시통역과 번역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6학년이 졸업하면 5학년 학생이 6학년이 된다. 나는 이인나와 박인나를 보고 역사의 발전을 믿는 계기가 되었다.

 

2018. 12월 이인나는 내 딸 아영이의 결혼식장에도 직접 찾아와 축하해 주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정송현 국제기아대책기구 소장)

 

▲정송현 소장과, 우즈벡 코뮈스칸, 2003.5 (c)시사타임즈

내가 처음 정송현(1939년생) 소장을 2002년도에 만났을 때 첫 인상은 인자한 선생님이었다. 실제로 그는 영어교사를 30년 봉직하고 명예 퇴직한 다음 3년 전에 우즈베키스탄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시범농장을 건설하는 사업을 맡았단다. 잡초를 뽑아내고 바위 덩어리를 파내고 흙을 파는 일을 현지인들과 같이 한다. 아니 앞장서서 한다.

 

타쉬켄트에서 30km 떨어진 코뮈스칸 산골마을의 비탈진 곳을 8만평쯤 시로부터 불하 받아 개간하고 있었다. 일감이 없는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취로 사업을 제공하며 농법을 가르치고 새마을운동을 펼쳤다.

 

우리 협력단은 국제기아대책기구를 지원하여 그 시범농장에 교사동을 건축하여 새마을 교육장으로 사용토록 하고 봉사단원을 파견하여 훈련교관으로 근무하게 했다. 또한 니자미 사범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신재은 봉사단원의 아이디어를 받아 염소 새끼를 농가에 4마리씩 무상 분양한 다음, 다음 해에 새끼 2마리씩을 상환 받아 이를 다시 분양해 주는 주민 소득증대 사업도 펼쳤다.

 

정송현 소장은 온누리 교회 장로이다. 한번은 군산 신흥교회의 장로인 최성윤 매형과 송영혜 송영숙 누님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였다. 매형이 정송현 소장의 시범 농장을 한 번 갔다 오더니 그 곳의 뜻있는 봉사사업에 매료되어 갈 때까지 그곳에서 기거하며 봉사했다. 두 장로는 새벽 예배를 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같이 땀 흘리며 삽질하고 땅을 개간 했다. 10년 지기 같았다. 뜻이 같으면 그러나 보다. 최성윤 매형도 정년퇴직하면 이 시범농장에 다시 와서 정 소장과 같이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매형이 시무하던 신흥교회의 사정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고약한 집주인 Z)

 

나와 나의 전임인 옥이호 소장은 한 달 간 합동 근무했다. 옥 소장이 떠날 때 우즈벡 사람 Z로부터 임차하여 살던 주택 계약기간이 3개월 남았다. 옥 소장은 집주인 Z에게 미 경과된 3개월분 월세를 계약에 따라 돌려달라고 하자 Z는 돈이 없다면서 후임인 내가 대신 3개월 살도록 나와 옥소장에게 부탁하였다. 옥소장도 주인의 말대로 하도록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을 수용하여 옥 소장 이 살던 Z의 주택에서잔여 3개월 동안 살기로 했다. 옥 소장이 떠날 때 Z도 공항에 나와 그를 웃으며 배웅했다.

 

그런데, 내가 호텔에서 짐을 정리하여 Z의 집으로 가니 Z가 문을 열어주지 아니하며 나에게 집 파손 보전비용 10,000불을 내야 들어오게 하겠다는 거였다. 나는 그 문제는 옥 소장에게 제기하고 문을 열라고 하자 옥 소장이 떠나고 업으니 승계자인 내가 내야한다는 억지를 부렸다. 내가 그 문제는 옥 소장이 떠나기 전에 옥 소장에게 제기했어야지, 옥 소장을 당신이 웃으며 배웅한 다음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하자, Z는 옥 소장이 외교관이기 때문에 집을 잘 관리했으리라 믿고 배웅했는데, 그가 떠나고 지금 집을 조사해 보니 천정이 갈라지고, 식탁이 부서지고 등등 만 불의 집 수리비를 내지 않으면 나를 그 집에 살지 못하게 하겠다는 거였다.

 

나는 옥 소장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자 옥 소장은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이니 주인을 잘 설득하든가 아니면 재판신청을 하라고 하였다. 나는 Z에게 옥 소장의 말을 전했으나 Z는 만 불 배상 주장만 되풀이하며 내게 소송을 제기하라고 억지를 부렸다. 나는 소송을 제기하려고 마음을 정리하고 장훈 대사에게 이를 알렸다. 그러자 장훈 대사의 반응은 신중했다. 재판이 진행되면 내가 그 집 파손이 안 된 것을 증명해야 되는데, 막말로 Z가 천정을 부수고 식탁 등을 부숴 넣고 옥 소장이 했다고 하면 대처가 어려워 내가 승소할 확률이 높지 않다는 거였다. 더욱이 우즈벡에 무상원조하기 위하여 대사관에 근무하는 자가 현지인과 민사사건으로 재판정에 오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일 뿐만 아니라 재판이 장기화될 터인데 바쁜 공인이 일은 미루고 재판정에만 다닐 건가하는 거였다. 아예 월세 3개월분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낫다는 거였다. 나는 옥소장과 상의하고 장훈 대사의 조언을 따르기로 하였다.

 

옥소장과 나는 악덕 주인을 만나 3개월 분 집세를 손해 봤으나 협력단 본부에는 이런 일을 보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협력단 업무와 관계된 것이 아니고, 생활하다 사기에 걸린 일이기 때문에 협력단이 이를 보전해줄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Z는 억지를 부려 3개월분의 임차료 이득을 보는데 성공했다 할 수 있으나, 자신의 인격을 속이고 자신의 나라 이미지를 크게 훼손한 우를 범한 것을 Z는 알아야 할 것이다.

 

4. 우즈베키스탄 근무를 마치고

 

나는 우즈베키스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의 나와 아내의 대화를 소개한다.

 

“당신 우즈베키스탄이 무섭고 추울 것 같아 오기 싫어했는데 이곳 생활이 어땠어?”

“아주 좋았어요. 지금껏 살아온 에콰도르, 캐나다, 피지보다도 좋았어요.” “그래? 다행이네. 근데, 뭐가 그리 좋았는데?”

“첫째 날씨가 좋았어요. 적당히 기온이 높았지만 습도가 낮아 항상 쾌적했잖아요? 둘째 과일이 싸고 풍부한 점, 셋째 고려인 아주머니가 있어 집안일에서 해방된 점, 넷째 심묘브나 선생님이 있어 피아노를 다시 배울 기회가 있었던 것 등 참으로 잘 지냈어요. 그런 기회를 준 협력단에 감사해요.”

“그렇군. 그러나 감사할 곳은 협력단이 아니라 펜 우즈벡 대사잖아? 당신, KOICA에서 기회를 주었어도 오기 싫다는 것을 대사님이 설득해서 오게 된 것 기억 안나?”

“맞아요. 그랬었지요. 당신이 내 대신 펜 대사님 식사 대접 제대로 한번 하세요.”

“한번으로 되겠나? 좋은 점이 그렇게 많았다며?”

우리는 손을 잡고 까르르 웃었다.

 

하기야 우즈베키스탄에는 초대 서건이 대사는 타쉬켄트 골프장 회장이어서 상주하고 있고, 2대 최영하 대사, 3대 장훈 대사는 개인적으로 자주 방문하였고, 4대 김성환 대사는 현직이니 당연히 타쉬켄트에 상주하여 어떤 시기에는 네 명의 대사가 모두 우즈벡에 체류하는 진풍경도 있었다. 거기에 양태규 대사마저 동방대학 교수로 근무하여 동방대학교 고려인 1세 김문옥 박사는 “한국 사람은 모두 대사냐”고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우즈베키스탄이 살기 좋긴 좋은 모양이다. 외국생활을 싫어하는 아내도 좋았다고 하니…….

 

우리를 실은 아시아나 여객기는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서울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서울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 나의 조국이 가까이에 다가 오고 있다. 오, 대-한민국!!!”

 

축구 변방국에서 단숨에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발전을 이루고 군부독재에서 민주정부 국민정부 참여정부를 쟁취한 대한민국이다. 수많은 정부기관이 우리 국민을 위하여 일하고, KOICA 우리 국제협력단이 지구촌을 위하여 땀방울을 흘리는 대한민국이다.

 

(우즈베키스탄 이야기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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