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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5)]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4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5)]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4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3. 내가 만난 사람들 (2)

 

(허선행 한국어 선생) 

 

1963년생으로 전남 사범대학 출신으로 교민일보 편집장이며 한국어를 고려인과 우즈벡인에게 보급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려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라는 은사의 권유를 받고 우즈베키스탄에 이민 온지 9년째 된다고 하였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의 한국어 보급이 자기 사명이라고 말했다. 알아보니 9년 동안의 그의 행적이 그러했다.

 

▲(허선행 한국어 교수). ⒞시사타임즈

 

KOICA의 지원을 원했으나 그러려면 한국에 가서 봉사단에 지원하는 길 밖에 없다고 안내했다. 소장이나 대사 직권으로 봉사단원이 되는 길이 없느냐고도 물었다. 알면서도 답답해 물어 봤을 것이다. 나는 한국어 보급 목적으로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국제교류재단과 상의하라고 안내했다. 

 

그는 교민회 총무, 부회장, 편집장으로 봉사하며 한국어 보급에 신명을 바치고 있다. 대학 강단에도 강사로 나가지만 교수 월급도 100불이 안되었는데 시간강사 급여는 교통비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는 광주 지인 몇 명이 보내준 성금에 자비를 보태어 광주한글학교라고 이름 짓고 무료로 가르치지만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 학교를 굴지의 한국어 교육기관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허 선생, 그때 힘이 못 되어줘 미안했어요. 그래도 꿋꿋이 한국어 보급을 하는 허 선생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답니다.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세요. 내 소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하다가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유라시아 16,000 km 횡단 마라톤 일정중 딱 절반인 타쉬켄트를 통과할 때,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쾌히 나의 제안을 받고, Gyrat 교육장관과 협력히여 고려인과 교민들은 물론 우즈벡 대학생들을 500여명 동원하여 평화마라톤 대동제를 성대하게 치루는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중학교에 다니는 그의 예쁜 딸이 타쉬켄트에 입성하는 강명구 평화마라토너에게 화환을 걸어줬다.

 

▲(허익배 교장, 따냐 UTV 앵커, 필자, 허선행 교장, 타쉬켄트, 2018.4) . ⒞시사타임즈

 

(브라디미르 신 고려문화협회 회장)  

 

1949년생으로 고려인 2세이다. 원래는 권투선수로서 미들급 동양 챔피언이었다. 뉴욕 매디슨 스퀘어에서 세계 타이틀 도전을 했으나 우세한 게임을 펼치고도 편파적인 판정으로 승리를 놓치고 분루를 뿌렸다고 했다. 185cm에 지금은 100kg이 넘는 거구이다.

 

1991년에 우즈베키스탄이 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한 후 고려문화협회를 창립하여 지금까지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25만 고려인을 대표하며, 지방에 46개 사무소가 있다. 그는 과묵하고 한민족의식이 강하다. 장기 집권한다는 비난도 있어 20027월에는 안조야가 중심이 되어 고려인사회연합회가 분리되어 나갔다.

 

우리 사무실에 여러 번 찾아와 고려인협회를 지원해주길 요청했으나 사업 성격이 협력단과 맞지 않아 나는 재외동포재단을 안내해 주곤 했다. 그의 요청을 한 번도 공적으로 들어주지 못했으니, 아마 나를 일을 회피하는 공직자로 오해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신 회장님, 고려인 숙원 사업 중에 한국 정부의 지원이 꼭 필요한 사업이 있으면 동포재단과 상의하세요. 협력단 말고요.” “아니 또 그 소리예요? 송 소장은 그 말 밖에 모르세요?”

 

(기업가 이흑연, 김종규, 임성수, 박양균사장) 

 

이흑연 보우(BOW, Best of World) 사장, 김종규 부사장, 임성수 금성사 사장, 박양균 금성지관 사장은 우즈벡 내 한국 대표 기업인으로 금성 TV 조립공장, 지관, 자루, 비닐 백 등을 생산했다, 사업 규모는 중소기업이나 타고난 경영자 자질로 사업이 탄탄하다고 했다. 그들은 정기호 회장과 더불어 교민회 회장을 이어 받으며 한인회를 이끄는 중추 세력이다.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의 사업이 어려울 때는 나머지가 힘을 모아 도와줬다. 우리 교민들이 다 이들과 같이 합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흔히 우리 민족은 모래와 같아 개인의 자질은 단단하지만 합해지기 어렵고 일본 사람들은 흙과 같아 무르지만 합해지기 쉽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나는 1인 사무소로 바쁘고 그들도 사업으로 바빠 우리는 식사 한 번도 같이 한 적이 없으나 나는 열심히 사는 그들을 존경했다. 그런데 내가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뜻하지 않게 다음과 같은 분에 넘치는 감사패를 보내왔다.

 

<감사패 : 송인엽 박사님은 KOICA 우즈베키스탄 사무소장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특히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항상 봉사하였고 교민화합에 적극 임하였기에 교민의 일원인 지인들이 이 감사패를 드립니다. 2004.4.3. 우즈베키스탄 경공업부 차관 김태봉, 우즈베키스탄 교민회 부회장 임성수, 금성지관 사장 박양균, 보우사장 이흑연, 부사장 김종규 일동>

 

김차관님, 이 사장님, 김 부사장님, 임 회장님, 박 사장님, 지금도 다들 사업 잘하고 계시지요? 다음에 제가 은퇴하고 타쉬켄트에 가면 사업거리 하나 만들어 주실 수 있지요?”

 

 

(이성희 정순진 사장 부부)

 

▲(이성희 사장 박사 학위 수여식, 2004.4). ⒞시사타임즈

 

이성희 사장은 타쉬켄트 골프장 사장이며 부인 정순진은 우즈베케스탄 국립극장인 나보이 극장 3층에 위치한 타쉬켄트 한국 식당 사장이다. 이성희 사장은 1956년 생으로 인천출신이다. 정순진 사장도 인천 출신으로 정 사장의 모친은 인천 요식업계의 대부로 재벌이라고 했다.

 

이성희 사장은 2000년 한인회를 결성 초대 회장을 지냈다. 경영이 뛰어나 적자였던 골프장을 서건이 사장으로부터 인수 받아 서건이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직접 경영하여 흑자로 전환시켰다. 또한, 타지키스탄 대학에도 기부를 많이 하여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근무할 때 타지키스탄 러시아사범대학으로부터 명예경영학박사를 수여 받았다. 그 때 나도 초청되어 축사를 했다.

 

이 사장의 딸 진이와 아들이 타쉬켄트 국제학교에서 우등생이었으며 졸업 후 런던으로 유학 갔다. 내가 떠난 후 이성희 사장이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으나 특유의 강단으로 재활치료를 열심히 하여 많이 좋아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사장님, 괜찮지요? 나 은퇴하면 타쉬켄트에 갈 테니 서건이 대사님과 정기호 회장이랑 라운딩 주선 할 거지요? 그 후에 꿀 마사지도요?” 이사장이 개발한 꿀 마사지는 타쉬켄트 골프장의 세계적인 자랑거리로 이를 찾아오는 손님으로 서울-타쉬켄트 아시아나 항공은 연일 만원사례라고 당시 아시아나 박현수 지사장이 항상 입이 찢어진 채 다녔다.

 

그런데, 2018.4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타쉬켄트를 통과할 때, 나는 응원하기 위하여 타쉬켄트에 갔다. 그곳에서 평화대동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평화마라토너와 카자흐스탄 국경까지 동반주 하고, 그를 카자흐스탄에 보낸 후, 나는 타쉬켄트로 돌아와, 이성회 사장의 초대로 정기호 회장과 셋이서 그의 골프장에서 오랜만에 라운딩을 했다. 물론 우리 셋은 파의 대행진이었다. 더욱 물론 그들은 그냥 파의 행진이고 나는 양파의 행진이였지만.......

 

 

(양태규 대사와 김종수 박사) 

 

양태규 대사는 1938년생으로 군산이 고향이며 고려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외교부에 입부하여 공직 생활에 발을 들였다. 조용한 성품에 합리적 성격의 소유자이나 작정한 일은 끝까지 밀어 붙이는 집념도 갖고 있다. 아이티 초대 대사와 몬트리올 총영사를 마지막으로 오랜 외교관 생활을 2000년에 마치고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1주일에 3시간씩 강의하며 지냈다.

 

▲(김종수 박사 병원 앞에서). ⒞시사타임즈

 

동년배로 외교부 입부 동기인 서건이 전임 우즈베키스탄 대사가 몬트리올에 있던 양 대사를 우즈베키스탄으로 초청했다. 양 대사는 친구도 보고 싶고 친구가 만들었다는 타쉬켄트 골프장에서 운동도 하고 싶어 기꺼이 날아 왔다. 1주일쯤 타쉬켄트에서 지내던 양 대사는 티쉬켄트의 따뜻한 날씨에 반했다. 그는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에 데려다 달랬다.

 

그는 총장실에 무작정 찾아가 한국의 퇴임 대사라고 밝히고 총장 면담 신청을 했다. 그 대학은 동방대학교로 협력단이 한국어 교수 파견, 교자재 지원을 하는 대학으로 한국과 인연이 각별한 대학이었다. 총장은 한국 대사라고 하니까 쾌히 면담을 수락하였다. 양 대사는 퇴직 대사로서 현재 몬트리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나, 이곳 타쉬켄트를 방문하니 날씨가 너무 좋아 이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것과 대학에서 기회를 주면 1주일에 몇 시간씩 무보수로 강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 당시 동방대학에서는 나에게 한국학을 강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나는 업무를 이유로 수락치 못하고 있었는데, 전직 대사이고 현재 몬트리올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이니, 고소원이나 불감청인데 어찌 수락치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양 대사의 우즈베키스탄 생활은 시작되었다. 1주일에 4시간씩 동방대학에서 강의하고 운동도 하며 지냈다. 사모님은 몇 달에 한 번씩 다녀갔다. 그러다 국제교류재단에서 전문가로 등록되어 상당한 사례도 받게 되었다며 항상 대접하던 나에게 식사 대접도 가끔 하였다.

 

양 대사는 여행이 취미였고 사진 촬영이 수준급이었다. 나는 지방 출장 때나 겸임국 출장 때에 양 대사와 같이 다녔다. 같은 방을 함께 쓰니 비용도 더 크게 들지 않았다. 양 대사는 꼭 협력단 직원처럼 행동하고 나를 도와주었다. 출장에서 돌아오면 행사 사진 등을 촬영하여 CD에 담아 나에게 주곤 했다.

 

김종수 박사는 1941년 생으로 황해도가 고향이며 6.25 때 부모를 따라 월남했다 한다. 익산에서 자리 잡고 남성고등학교와 전남의과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전문의가 되고 결혼 한 후 몇 년 근무하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 이민 간 이유는 선친이 우리나라는 다시 북한의 침략을 받게 될 것이고 월남한 사람들을 반동으로 제일 먼저 처형할 것이므로 너는 의사가 되어 최고 선진국인 미국으로 가서 살아라.”라고 유언했단다.

 

김 박사는 미국에서 자리 잡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다가 신앙심이 깊은 12년 연하인 꽃과 같은 부인의 영향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87년에 미주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티에 봉사하러 가서 당시 아이티 대사였던 양태규 대사를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는 뜻한 바 있어 미국 병원을 정리하고 가족과 같이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와서 타쉬켄트 위성도시에 자비로 병원을 짓고 무료 진료 봉사활동을 하며 밤과 주말에는 우즈벡 의과대학 학생들을 불러, 큰 딸이 영어를, 자신은 의학을 가르쳤다. 주중에는 부인과 큰 딸이 약사로 간호사로 같이 봉사활동을 한다.

 

1987년에 아이티에서 친구가 된 양태규 대사와 김종수 박사는 15년이 흐른 2002년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다시 우연찮게 만나게 되어 친 형제처럼 지냈다. 나도 우리 가족이나 협력단 봉사단원들이 아플 때면 김 박사의 도움을 번번이 받았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아닐 수 없다.

 

20123월에 양태규 대사와 전화 통화를 하였는데 카리모프 정권이 인권문제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비자를 연장해 주지 않아 김박사의 가족과 양 대사는 조지아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김 박사는 여전히 무료 진료 봉사를 하고 있고 자신은 소규모로 와인 생산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지아가 와인 종주국이기 때문에 유기농 최우량 와인을 생산하고 싶어서 조지아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나의 유투브 방송(아이티편)을 듣고 며칠 전에 양태규 대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오랜만에 만나 옛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이제 양 대사님이나 김종수 박사님이 연세가 있어, 김종수 박사는 3년 전부터 외국생활을 접고, 미국 인디애나주 에반스빌에서 한가롭게 지낸다고 했다. 양 대사님은 코로나 때문에 조지아를 10개월 째 못 가서, 올해는 와인생산이 중단되어 아쉽다고 했다. 양대사님은 84세인데도 불구하고, 코로나가 종식되면, 캠핑카를 하나 구입하여 세계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가히 84세의 젊은 청년이 아닐 수 없습니다.

 

▲(35년 외교관, 12년 교수, 10년 와인메이커, 그리고 84세에 세계일주 꿈꾸는 양태규 청년과). ⒞시사타임즈

 

(크세니아 최) 

 

크세니아 최는 1987년생으로, 고려인 4세다. 페르가나 고등학교와 우즈벡국립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우즈벡 대우은행과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나의 권유로 동포재단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아버지는 태권도 사범이었으나 그만두고 농업에 종사하였고 어머니는 독일계 이주민이다.

▲(크세니아 최). ⒞시사타임즈

 

나와 크세니아의 만남은 KOICA 봉사단원으로 한국어 교수인 송영순 단원을 통해서였다. 200210월쯤 봉사단 기관 방문차 지방도시인 페르가나에 갔는데 크세니아가 고등학교 학생인데도 청강생으로 가장 열심히 공부한다면서 자기가 준비한 장학금을 나보고 전달해 달라는 거였다. 직접 전달하라고 했지만 송 단원은 내가 전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하여 내가 대신 장학금을 전달했다. 

 

그리고 얼마쯤 있다 우리 사무실에서 한국어 연수생 선발 시험을 실시했다. 선발되면 한국에 가서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오게 된다. 당시에 협력단은 주로 연세대 어학당, 경희대, 아주대에 위탁하여 한국어 교육을 실시했다. 우즈베키스탄에 배정된 연수생은 6명이었다. 응시생은 주로 각 대학 한국어과 3-4학년 학생이나 졸업생이었고 유일하게 크세니아가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시험결과는 고등학생인 크세니아가 1등이었다. 나는 고민하였다. 성적순으로 할 것인가? 나와 같이 면접 시험관이었던 정재진 참사관과 협의하여 대학생 선발을 우선하기로 하고 1등인 크세니아를 제외시켰다. 왜냐하면 크세니아는 대학생이 되면 기회가 또 올 것이므로……. 그렇지만 나는 그녀에게 항상 빚진 느낌을 받았다. 면접 때 크세니아가 참으로 영특한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서울로 귀임할 때 김동호 소장에게 크세니아를 소개 시켰으며 김 소장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타쉬켄트로 유학 온 크세니아를 자기 집에 기숙시키며 김소장 부부가 같이 러시아를 크세니아에게서 배웠다.

 

김동호 소장 부부는 참으로 나에게 고마운 사람들이다. 나는 서울 근무를 20044월부터 하도록 인사명령을 받았으나 국제학교에 다니던 딸 아영이는 6월 말이 졸업이었다. 두 달 여 남은 딸아이를 졸업시키고 싶어 거처할 곳을 물색했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2,000불이나 하는 현재 집에 머물게 하기에는 부담이 크고……. 이런 고민을 김 소장에게 이야기 했더니 자기가 데리고 있겠단다. 고맙지만 힘든 일이니 부인과 상의해 보라고 했다. 부인도 대찬성이라 했다. 부인은 한 발 더 나가서 자기들은 타쉬켄트 새내기들인데 아영이가 다 안내할 것이므로 도움이 더 크단다. 나는 하숙비를 주려 했지만 김 소장 내외는 끝내 받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내외가 타쉬켄트를 떠나 왔지만 아영이는 공주방 같이 꾸민 자기 방에 그대로 머물면서 타쉬켄트 국제학교를 졸업하였다. 김성환 대사가 딸을 어떻게 하기로 했냐고 묻기에 사실을 말해주니 참으로 하기 힘든 결정을 후임 소장이 했다고 놀라워했다.

 

나는 20056월에 타쉬켄트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항상 빚진 기분이 들었던 크세니아에게 대학 입학 선물을 하고 싶었다. 당시 크세니아는 김 소장 집에 머물면서 김소장 내외와 딸 가윤이에게 러시아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큰마음 먹고 컴퓨터 최신형을 한 대 구입하여 선물했다. 장학생 선발시험에서 1등한 크세니아를 탈락시킨 빚을 반이나마 갚는 기분이었다.

 

그 후 우리는 이메일을 통해 계속 연락하였다. 나는 크세니아를 딸로 생각하고 크세니아도 나를 아빠로 생각한다. 나는 그 애에게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최세아(崔世娥). 그 애는 이 한국 이름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사실은 크세니아와 음이 비슷한 최세나라고 하려다 내 딸 아영(娥英)이와 비슷하게 하려고 세아라 명명했다. 자매간에는 이름이 비슷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크세니아가 대학 졸업 후 한국대사관에 근무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크세니아에게 재외동포재단의 시험을 봐서 한국에 유학 오라고 강력하게 권유하고 시험날짜와 자격조건 등을 파악하여 알려 줬다. 크세니아는 나의 기대대로 재외동포재단 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였고 앞서 말한 대로 연세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수여 받고 귀국하여 협력단 우즈베키스탄사무소에서 근무하다가 캐나다로 이주했다. 나는 크세니아가 한국에 돌아와 한-러 동시통역사 겸 동시통역대학 교수나,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학교수를, 혹은 경제 관료가 되기를 아빠로서 바라고 있다.

 

 

(나탈리아 심묘브나 피아노 선생) 

 

1945년생으로 모스크바 음악원(피아노) 출신으로 우즈벡 음대 교수이다. 남편도 음악인이다. 늦둥이 무남독녀 외딸도 음대에 다니는 음악 가족이다. 우리 아영이의 피아노 선생으로 초빙했으나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도 따로 배웠다. 실력이 너무 좋은 선생이라면서……. 서울에 있는 어느 유명 교수 못지않은 분이란다. 강사료는 서울의 20% 수준이었다.

 

▲(나탈리아 피아노 교수님과 아냐와 딸, 2002.12). ⒞시사타임즈

 

성실하기도 해서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우즈벡 2년 반 동안 아내와 딸은 이 선생님 덕에 피아노에 흠뻑 빠졌다. 우리 가족과 선생 가족은 1주일에 한번은 타쉬켄트 나보이 볼쇼이 극장에 가서 오페라나 발레를 관람했다. 

 

언젠가 내가 한국에 정착하면 서울에 꼭 초청하고 싶다. 너무 저렴한 가격에 좋은 교육을 아내와 딸아이가 받았기 때문이다.

 

 

(알라 김)

알라 김(1953년 생)은 고려인 2세로 우리 집 도우미다. 전임 옥이호 소장 부인이 서울로 부임하는 삼성 지사장의 집에서 일하던 도우미를 우리에게 소개해줬다. 우리는 알라 아주머니라 불렀다. 한국 요리는 무엇이든 잘 했다. 성실해서 한 번도 늦거나 안 온 날이 없다.

 

그녀에게는 시집간 딸만 하나 있었다. 그런데 5년 전에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보고 싶어 했다. 우리 아영이를 친 딸보다도 더 예뻐했다. 우리가 우즈벡을 떠나 올 때 후임인 김동호 소장에게 연결시켜 줬다. 김동호 아내는 지금도 만나면 좋은 분 소개시켜주었다고 우리에게 사의를 표한다.

 

알라 아주머니는 내가 서울에 정착하면 꼭 한번 서울에 초청해야 한다. 그렇게 한국을 보고 싶다고 소원했다. “알라 아주머니, 몇 년 만 기다리세요. 내가 서울에 가면 초청하여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한국을 구경시켜 드릴게요. 그것보다도 우리 아영이가 아주머니를 더 보고 싶어 하니까요.”

 

(우즈베키스탄 이야기 계속)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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