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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칼럼] 개인의 생명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의 상호관계

[칼럼] 개인의 생명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의 상호관계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1)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Ⅰ. 인간은 대립물의 통일을 이루어진 존재

 

사물이 서로 결합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성질을 가진 새로운 사물이 발생할 수 없다. 물질세계의 발전과정은 곧 각이한 성질을 가진 보다 단순하고 저급한 물질들이 서로 결합되어 보다 복잡하고 고급한 운동능력을 가진 물질로 변화되어 온 과정이다. 이것은 결국 다른 성질을 가지고 대립되어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하나로 통일됨으로써 물질세계가 발전할 수 있다는 변증법적 진리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모든 삶의 요구가 실현되어도 만족하지 않고, 영생하는 사회적 집단을 부러워하며 사회적 집단과 함께 영생할 것을 염원한다. 개인의 생명을 사회적 집단의 생명과 결부시키려는 욕망이 명예욕으로 표현된다. 명예와 함께 물질적인 이익이 동반될 수도 있지만 명예 자체는 물질적인 이익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모든 물질적인 이익을 독차지하고 있는 제왕들에게 물질적인 표창은 의의가 없지만 명예욕은 버릴 수 없으며 남달리 강하다.2)

 

만일 인간이 다 같고 차이점이 없다면 서로 분리되어 있을 필요가 없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하나의 생명체로 살면 될 것이다. 같은 것이 아무리 결합되어도 양적으로는 커질 수 있어도 새로운 질을 가진 존재로 발전할 수는 없다. 만일 인간이 차이성만 가지고 공통성이 없다면 서로 결합될 수 없을 것이며, 결합을 통한 발전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인간은 공통성과 함께 차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연속적인 존재인 동시에 불연속성을 가진 독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결합되어 발전할 수도 있고, 그 결합이 원만하지 못할 때에는 분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의 결합과 통일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의 대립과 분열도 절대적이 아니다. 인간의 통일과 대립이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것은 결코 통일과 대립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인간이 결합과 통일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거나 대립과 분열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때는 대립물의 통일의 기본 구조 자체가 부정되어 인간의 본질적 속성 자체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버림받은 자의 비참한 최후는 결합과 통일 자체를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대립과 분열을 절대적으로 긍정한 결과 초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이 발전하면서 대립되는 요소들의 대립 방식도 변화되고 대립되는 요소들을 통일시키는 결합방식도 달라지게 된다. 무생명 물질들을 통일시키는 물리, 화학적인 결합방식과 생명물질들을 통일시키는 유기적인 결합방식, 사회적 존재인 사람들을 통일시키는 목적의식적인 사회적 결합방식은 결합방식이라는 공통성도 있지만 질적 차이가 있다. 보다 발전된 물질과 덜 발전된 물질을 대비할 때 대립방식이나 결합방식의 공통성만 보려고 하거나 차이성만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개인들은 사회적 집단으로 결합시키는 요인은 사회적 관계만이 아니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성원들의 공통적인 정신적 유대라고 볼 수 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사상과 문화를 모르고서는 사회의 한 성원으로 살 수 없다. 사회에는 많은 사회적 재부가 있다. 사람들은 사회적 재부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사람답게 살 수 없다. 사회적 의식과 사회적 재부와 사회적 관계는 다 객관화되고 사회화되어 있으며 개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계속 발전한다. 개인은 사회적 의식과 사회적 재부,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다. 개인들은 서로 다른 삶의 요구와 이해관계로 하여 서로 대립되어 있으면서도 사회적 의식과 사회적 재부, 사회적 관계의 공통성으로 하여 사회적 집단으로 결합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생물학적 존재로부터 사회적 존재로의 이행이 생명체 발전의 기본 방향이기 때문이다.

 

Ⅱ. 개인은 고독할 때 심한 고통을 느끼고

 

개인도 생명을 가지고 있고 집단도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양자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단이 개인의 생명을 자기 생명의 구성요인으로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인도 집단의 성원으로서 집단의 생명을 자기의 생명으로 체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인들의 생명이 끊어질 때 집단도 아파하고 집단과 개인의 생명이 끊어질 때 개인도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3)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적 집단과 함께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본성을 배반하였을 때에는 배반자를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 처벌하게 되는데, 이 처벌이야말로 외부적으로 가해지는 어떤 다른 처벌보다도 가장 고통스러운 처벌이라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사회적 본성의 진수는 어디에 있는가.

 

마르크스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경제관계)의 총체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탁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생명을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속성으로만 이해하였으며 사회적 생명에 대한 인식을 가지지 못하였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은 연속적인 존재인 동시에 불연속적인 존재이다. 부모로부터 자식이 태어나고 그 자식으로부터 또 자식이 태어난다. 이것으로서 생명체의 존재가 혈연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은 똑같은 존재가 아닐 뿐 아니라 자식은 부모의 한 부분이 아니다. 자식은 사회적 집단의 한성원으로서는 독자성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의 생명의 사회적 속성인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 힘의 경우에도 계승성과 함께 매 세대들의 독자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연속적인 존재인 동시에 불연속적인 존재이며 집단적인 존재인 동시에 개별적인 존재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대립물의 통일을 이루고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Ⅲ. 사상은 삶의 요구와 이해관계의 반영으로

 

삶의 요구와 이해관계는 사회적 의식인 사상의식을 통하여 표현된다. 사람들의 삶의 요구를 사회적인 방법으로 결합시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성원들이 사회적 집단의 삶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올바른 사상을 가지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민족의 모든 성원들이 자기 민족의 삶을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애국애족의 사상을 가지게 되면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자기의 고유한 생명을 가진 민족, 제 정신을 가진 민족이라고 볼 수있다. 이러한 민족의 생명은 필승불패이며,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기 운명을 자체의 힘으로 확고하게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단언할 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삶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회적 의식인 사상을 생명과 결부시켜 이해하지 못하는 데로부터 사상적 결합의 중요성에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의 생명만을 생명으로 인정하고 사회적 집단의 생명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개인의 사상만을 사상으로 인정하고 사회적 집단의 사상을 사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 민족의 삶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상을 진지하게 연구하여 인민들 속에 보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상의 다양성만 강조하면서 저마다 사상의 대가로 행세하는가 하면, 남의 사상을 소개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는 형편이다.

 

민족이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데 있어서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인가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것처럼 민족의 삶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상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민족 공동의 사상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과 견해를 종합하는 것이 필요하며, 어느 개인의 사상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상적 견해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과 같은 사상적 독재는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상적 진리의 존재와 사상적 통일성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사상의 자유만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상이 인간의 생명, 민족의 생명, 더 나아가 인류의 생명과 관련되어 있는 만큼 인간의 생명, 민족의 생명, 인류의 생명을 해치는 사상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릇된 사상을 비판하는 사상적 자유는 응당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보호하려는 욕망이 앞서지만, 극장에 가서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려는 본성, 즉 생명을 같이 하려는 본성이 거침없이 발로될 수 있다는 사실과 인간이 기쁨을 같이 할 뿐 아니라 슬픔과 고통을 같이 하려는 것도 사회적 인간의 본성의 표현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과 적대관계가 없는 조건에서는 고립적으로 사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결합되어 기쁨과 고통을 같이 나누며 사는 것이 비할 바 없이 행복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Ⅳ. 명예는 사회적 집단이 주는 것

 

혼자 고생을 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공동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다같이 고생하는 것은 고통스럽지 않다. 이 때에는 공동의 고생에서 면제되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운 법이다. 혼자서 죽는 것은 무섭지만 공동의 운명을 위하여 같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이때 혼자 살아남을 것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인간은 오히려 사회적 집단의 공동의 운명에서 제외되는 것을 고통으로 여긴다. 공동의 운명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집단의 생명과의 연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혼자 잘 살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선 자기부터 잘 살고 보자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 개인적이라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면, 다같이 함께 잘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집단적이라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 두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마치 극장에서와 같이 개인의 자주성을 침해당할 우려가 없도록 민주주의적 질서가 철저히 보장된 기초 위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침없이 결합되어 생사운명을 같이 해나가는 사회적 집단이야말로 가장 힘있는 생명을 지닌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러한 사회적 조건이 마련된 사회일수록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맞는 훌륭한 사회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고립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은 개인의 생명의 원천이 사회적 집단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개인의 삶은 아무리 잘 살아도 한 대에서 끝난다. 영생하는 것은 사회적 집단의 생명뿐이다. 개인의 생명은 오직 사회적 집단의 생명과 결부됨으로써만 영생하는 생명의 한 부분으로서 영생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생명을 사회적 집단의 생명과 결부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의 중요한 표현이다.

 

명예는 개인의 삶에 대한 사회적 집단의 긍정적인 평가다. 개인은 자기의 삶이 사회적 집단의 요구에 맞는다고 평가될 때 커다란 기쁨과 만족을 느낀다. 사회적 집단은 사회가 발전할수록 개인의 명예를 더욱 존중히 여기고 명예욕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개인의 생명활동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평가를 주어야 하며, 그것이 개인의 생명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을 통일시키는데 이바지하도록 깊은 관심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사회적 집단에게 명예를 강요하는 독재자들의 반인민적 권력행사와 개인숭배를 고취하는 기만선전을 배격하여야 하며, 사회적 명예를 얻어보려고 가면을 쓰고 사회적 집단의 환심을 사기 위한 사기협잡을 일삼는 자들의 정체를 폭로 비판하여야 할 것이다.

 

개인의 생명은 집단의 생명의 한 구성 부분이다. 그러므로 집단의 생명은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하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민족의 생명보다는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인류는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결합되지 못하였다. 지금 역사는 민족이나 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는 생활공동체로부터 단일한 인류공동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개인에게 가장 귀중한 생명은 민족의 생명이다. 개인은 자기 민족의 생명을 구원하고 발전시키는데 1차적인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민족발전의 방향은 인류 발전의 요구에 부합되어야 할 것이다.4)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민족사적 당면과제인 민족의 평화통일에 먼저 일로매진(一路邁進)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인간중심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유 민족주의(liberal nationalism)를 나비(butterfly: 민주주의)와 고치(cocoon: 민족주의)의 상관관계로 예를 들면서 역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1) 황장엽,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시대정신: 1999, 12. 15), pp.382.

2) 세익스피어의 희곡의 주인공인 팔스타프(Falstaff)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명예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명예란 단어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기(空氣)이다." 명예는 실질적인 이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다만 그 단어를 발음할 때 진동하는 공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팔스타프가 조소한 허망한 명예를 존중히 여기는 봉건귀족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명예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명예를 주는 주체는 명예를 받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이다. 제왕은 자기에게 명예를 안겨주도록 사회적 집단에게 강요하지만, 강요에 의하여 얻은 명예는 진짜 명예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 제왕이나 독재가가 사회적 집단에게 명예를 강요하는 것은 명예를 주는 주체가 사회적 집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3) 고리끼는 전설을 취급한 자기 작품에서 사회적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의 신세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옛날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는 어느 한 공동체에 큰 독수리가 날아와 처녀를 채어 날아갔다. 그 후 20년이 지난 다음 그 처녀가 20세 가량 되는 청년을 데리고 돌아왔다. 여자의 말에 의하면 깊은 산속에서 독수리와 함께 살았는데, 독수리가 늙어 죽었기 때문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독수리의 아들인 청년은 끝없이 교만하여 공동체의 원로들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원로의 한 사람의 딸이 자기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원로들 앞에서 처녀를 무참히 밟아 죽였다. 격분한 공동체 성원들은 그 청년을 결박해놓고 어떤 방법으로 죽이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을 주겠는가에 대해 오래 토론하였다. 마침내 한 현자의 제의에 의하여 그 자를 그냥 풀어주어 혼자서 자유롭게 살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정하였다. 이때부터 청년은 인간의 집단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존재로 되었다.

청년은 집단과 싸워 자기가 이겼다고 우쭐거리며 혼자서 자유롭게 살았다. 공동체의 가축도 훔쳐가고 양곡도 약탈해갔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상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청년은 먹는 데는 걱정이 없었으나 점차 고독을 느끼게 되었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때려주고 죽여줄 것을 바라게 되었으나 그 누구도 그에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고독과 슬픔은 극도에 도달하였다. 그는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오직 슬픔만이 가득 찬 고통의 화신으로 되어 그림자와 같이 말라죽게 되었다."

고리끼는 "그의 아버지는 짐승인 새였기에 고독하게 자유롭게 살 수 있었지만, 그 청년은 사람이었기에 아버지와 같이 고독하게 자유롭게 살 수는 없었다"고 결론을 지었다.

4) 개인들은 집단에 종속된 한 부분이 아니라 평등한 공동의 주인이다. 이러한 관계는 인류에 대한 민족의 관계에서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글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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