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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4)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4)

베를린에서 품는 한반도 통일의 꿈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어느 나라든 대도시에는 살기 위해서, 보다 나은 삶을 찾아서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기를 잃고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리고 휘청거리는 모습을 흔히 본다. 베를린 같은 대도시는 여행자에게 야릇한 유혹을 끊임없이 제공하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낙오한 사람들이 다시 기회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노릇이다.

 

홀로 일어서 걷기도 힘든 듯한 사내가 지붕이 둥근 오래된 벽돌 건물을 짚고서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그 건물도 더는 버티기 힘든 듯 곧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저 힘겨운 모습에서 과거 어느 한때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던 정염이 겹쳐 보인다. 저 사내가 향하는 곳이 어딜까? 도로 한가운데는 메르세데스 벤츠가 질주하며 힘겨운 사내의 가래 끓는 기침 소리마저 삼키며 지나간다.

 

아침에 오랜만에 늦잠을 즐기고 일어나니 주인도 없는 원불교 교당에서 권헤순씨가 김치찌개와 고기까지 구워놓았다. 아침부터 잘 먹고 새 유모차를 찾아왔다. 지난번에 미대륙횡단할 때는 나 자신이 돈키호테 같다고 생각되어 유모차의 이름도 ‘로시난테’로 하였었다. 그래도 나는 그 로시난테와 함께 미대륙횡단도 마쳤고 남한을 해안가를 따라 제주도 독도를 포함해서 남한일주도 했고 부산에서 광화문까지 종단도 했고 이번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독일의 베를린까지 왔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번에 새로 장만한 유모차는 ‘한혈마’라고 명하고 싶다. 한 번에 천 리를 달릴 수 있고 달릴 때는 온몸이 피를 흘리는 것 같이 빨갛게 된다 해서 한혈마 또는 천리마(千里馬)라 불리는 이 말은 한무제 당시 대완국이라 불리던 키르기스 지역에서만 산출되는 천하의 명마라고 일컬어진다. 한무제는 이 명마를 그리운 사랑 그리듯이 갖고 싶어 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타고 다니던 부케팔로스도 한혈마라는 설이 있다. 이제 최고의 명마 한혈마와 함께 유라시아 실크로드를 달리며 평화의 휘파람을 불 것이다.

 

21일은 유엔 평화의 날이다. 평화의 날을 맞아 이곳 훔볼트대학에서 유엔 산하 국제평화분과위원회 주최 세미나가 개최되어 이곳의 재독 한인 평화여성운동가인 한정로회장과 정연진대표와 함께 우리 일행이 참석하였다. 훔볼트대학은 2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두 번째로 많은 학생 수를 자랑하는 학교이다. 프로이센 제국 시대에 세워진 현대적 대학이다. 내 눈엔 금방 이 대학이 동독쪽 거리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오래된 석조 건물 안은 칙칙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밝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늙은이 냄새가 나는 할아버지의 정겨움 같은 것이 묻어났다. 그곳에는 1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세미나는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의 처참한 피해 상황을 보여주는 동영상으로 시작되었다. 흑백 영상은 자칫 한반도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는 참담한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세 명이 국제 갈등 해결과 전쟁 없는 세계를 주제로 발표를 하였는데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해 아쉬웠지만 한정로 회장님이 간단하게 통역을 하여주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한정로회장이 질문을 통해 한국 평화통일의 중요성과 나의 유라시아대륙 1만6천km 16개국을 14개월에 걸쳐 한국의 평화를 위해 달린다고 설명하자 서양인들 특유의 큰 눈이 더 커지면서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지지를 표해주었다. 특히 세계평화회의 공동의장인 라이너 브라운 씨 등 주제 발표자들은 지지하는 서명도 해주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나씨는 내년 7월부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자기는 자전거를 타고 나의 일정에 동참하겠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베를린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3세기경이다. 동베를린은 통일 전에도 동독의 수도였으나 서독은 수도를 통일이 될 때까지 본으로 하였다. 1990년 드디어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통일되기 전 서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면제되었다. 자연적으로 무정부주의자를 비롯한 자유 사상을 가진 많은 사람이 유입되어 예술과 사상의 자유를 누리던 곳이다. 이제 베를린은 정치, 문화, 사상, 예술, 학문, 관광의 중심으로 옛 영화(榮華)를 되찾았다.

 

냉전 시대는 분할(分割)과 불통(不通)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갈등과 충돌의 최전선이 베를린 장벽과 휴전선의 철조망이었다. 베를린의 분할과 불통은 이제 화합과 소통의 상징이 되었는데, 30년 동안 한 나라 더 나아가서 세계를 둘로 구분해 놓던 베를린 장벽을 무너졌는데 우리의 휴전선 철조망은 70년이 되도록 녹슬지 않고 있다. 독일 사람들이 장벽을 예술의 공간으로 만들었듯이 우리는 DMZ를 생명이 넘치는 평화의 생태공원으로 만들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믿는다.

 

1949년 동독이 세워진 이래 동독이 마주친 최고의 난제는 수많은 주민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동독인들의 탈출은 경제뿐 아니라 사회 혼란까지 일으켰다. 젊은이와 지식층이 탈출하여 고급 노동 인력의 공백은 경제에 큰 타격이었다. 초소를 증가시켰지만 주민 이탈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동독 정부는 탈출자를 막기 위해 서베를린과의 경계에 장벽을 쌓아 탈출을 차단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1961년 8월 16일 베를린에 장벽이 설치되었다. 장벽이 설치되자 서베를린 사람들은 고립(孤立)되었다. 처음에는 45km의 철책으로 만들어졌으나 나중에는 3.6m의 높이에 155km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바뀌었다. DMZ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서유럽세력과 구소련세력을 40년간이나 나누었던 경계선이다. 동유럽과 서유럽을 나누는 경계는 북해의 핀란드부터 흑해에 이르기까지 23개의 유럽 국가를 지나 총 8,500km에 이르렀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한혈마를 찾아서 독일 교포 간담회가 있는 한국문화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국문화원은 분단의 장벽이 지나간 바로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에 두 줄의 박석이 장벽이 지나간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장벽을 다 부숴버리지 않고 일부 남겨서 그림을 그린 예술작품으로, 아픈 과거의 유물(遺物)로 보존하고 있다. 가장 길게 남아있는 곳이 뮈레스트라세에 있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이다. 1.3km의 장벽에 1989년부터 다양한 예술적 낙서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모습이 임진각의 철조망을 바라보고 출발한 나그네에게는 감회가 남다르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장벽이 서 있던 자리엔 우리 정부가 세운 통일정이 서 있었다. 베를린 한국문화원에 마련된 교포간담회에서 교포들은 나를 따뜻하고 열렬하게 맞아주었다. 한정로 선생이 사회를 보고 나는 미대륙횡단 이야기와 이번 유라시아 평화마라톤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정연진 선생은 풀뿌리 통일운동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녀는 국내외에서 강력한 사회운동, 문화 운동이 일어나 여론을 바꾸고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를 한다.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이 시기 국제 반전운동과 연대해 평화의 큰 흐름을 만들어가자고 강조했다.

 

교포가 약 30여 명, 현지 독일 평화운동가들이 대여섯 명 정도 참여하여서 자못 열기가 대단하였다. 특히 통역을 맡으신 한정화 선생은 말하는 나를 한결 편하게 특별한 통역을 해주었다. 한국고전무용단의 공연까지 곁들어져 뜻깊은 자리가 되어주었다. 나는 사실 나의 짧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리보다는 통일의 현장에서 통일을 지켜본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독일의 통일을 이야기할 때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이다. 그는 1982년부터 평화의 기도를 인도했다. 1989년 9월 4일 월요일 동독의 리이프치히의 니콜라우스 교회에서 평화의 기도를 마친 시민들은 교회 앞 광장에 모여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다. 7년 동안 조용히 기도만 하던 사람들이 서서히 밖으로 모여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라이프치히의 월요 시위는 드레스덴과 할레 등 주변 도시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10월 9일, 광장엔 점점 사람들이 많아져 7만 명에 육박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은 경찰도 막지를 않았다.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먼저 진압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아직도 명령의 주체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동독 공산당은 호네커의 퇴진을 위해 10월 10, 11, 모였다. 결국 호네코는 물러나고 1960년 베를린 장벽 설치 총책임자였던 호네코는 재판에서 장벽을 탈출하다 희생된 자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인정하였으나 죽는 날까지 지난날의 행동을 후회하거나 반성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이 지난 11월 9일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날 저녁 동독 정부는 기자회견에서 모든 국경과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여행 자유화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11월 10일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는데 대변인의 실수로 발표 즉시 유효하게 되었다. 그날 밤 수많은 동독인은 서베를린으로 몰려들었고 베를린은 동, 서독인의 축제의 장이 되어버렸다.

 

독일은 45년의 고통스러운 분단의 고통을 겪은 후 1990년 10월 3일, 우리의 개천절날 역사적인 통일을 이루어냈다. 콜 총리는 “오늘을 기해 독일 민족은 평화와 자유 속에 통일이 되었으며, 독일 영토에서 일어나 유럽과 전 세계에 끔찍한 고통을 주었던 제 2차 대전이 끝난 지 45년 만에 독일인들의 고통스럽던 분단은 끝이 났다.”고 전 세계에 독일이 통일되었음을 선포했다.

 

독일은 2차 대전의 결과인 동서분단의 아픔을 경험했다. 세월은 흘러 유럽의 분단은 해결되었고 독일도 다시 통일되었다. 통일된 독일에는 아픈 상처를 지우지 않고 간직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보인다. 독일의 저력을 그곳에서 본다.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곱씹으며 잊지 않으려 한다. 바로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그렇다.

 

독일 문제는 유럽의 평화 유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력 포기는 서독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의 기본 원칙이었다. 냉전의 한 축인 독일 통일과 유럽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탈냉전의 마지막 꼭짓점인 한반도의 통일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절실해졌다.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있다. 통일 27주년을 맞는 독일은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리면서 유럽문화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동북아의 통합과 세계의 평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된 한반도는 단숨에 세계평화와 문화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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