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9)
‘유럽의 보석’ 프라하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빌어먹을 저 쌩쌩 달리는 자동차 대신에 마차가 거리를 누비고 있다면 난 완벽하게 유럽 중세의 도시에 “뿅”하고 떨어진 늠름한 동방에서 온 유모차의 기사일 것이다. 밤마다 지금껏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화려한 무도회를 기웃거리며 멋진 파트너를 탐할 것이다. 프라하는 거리를 하나 사이에 두고 13세기의 구도시와 14세기의 신도시가 나뉘어 있다. 지나온 시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천년고도, 나이가 들어도 기품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중년의 신사처럼 중세의 오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프라하. 역사와 전통과 시간이 찬란한 기품으로 승화되어 미학적으로 완벽한 구도(構圖)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이곳에서는 서먹서먹하던 사랑도 용기를 내어 고백을 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프라하는 ‘사랑의 도시’ ‘연인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다.
넬라호제베스에서 프라하로 가는 길은 거리는 30여km밖에 안 되지만 아직도 산악지형의 수많은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프라하에 사는 교포 오미정씨가 프라하에 도착하면 연락을 달라고 하여 부지런히 고개를 넘었다. 2시 정도 도착 예정이지만 부지런히 달리면 1시면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러면 지겨운 혼밥을 안 해도 되겠다 싶었다. 1시 20분에 올드타운 스퀘어의 얀 후스 동상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열심히 달렸지만 결국 처음 만나는 프라하의 여인을 쌀쌀한 날씨에 40분이나 기다리게 하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심술궂은 바람은 나무에서 잎을 뜯어내 땅바닥에 굴리고 있었다.
광장 옆으로는 이곳의 상징과 같은 천문시계가 한참 보수공사 중이다. 얀 후스 동상 앞에서 간단히 기념촬영을 하고 바로 한식당 마미로 가서 난 제육볶음 2인분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웠다. 거리에는 추석 연휴로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았다. 프라하는 2차 대전 때에도 드레스덴으로 오인한 비행 편대가 폭탄 몇 발 잘못 떨어뜨린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무자비한 전쟁의 귀신도 차마 이 ‘사랑의 도시’는 범하지 못했다. 너무 온전하게 보전되어서 과거의 영화로운 시간 속에 영원히 박제(剝製)된 전설 속 도시의 신비롭고 처연한 느낌에 소름마저 돋게 한다. 도시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나른함을 함께 보여주었다.
프라하를 표현하는 말은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프라하는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런 곳에서는 왠지 기대한 것 이상이 이곳에서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온다. 연인의 도시, 유럽의 보석, 전설과 역사의 도시, 모든 도시의 어머니, 황금의 도시, 첨탑의 도시, 매혹의 도시, 악의 도시, 에로틱의 도시 등이다. 프라하는 문지방, 언덕, 불로서 숲을 태우다, 강물의 소용돌이 등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켈트족이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녀는 멋진 애인을 부모에게 소개하듯 프라하를 소개해주었다. 그녀의 안내로 식사 후 바츨라프 광장으로 향했다. 어느 나라 건 광장에는 광장의 이야기가 있다. 제육볶음 2인분은 애게 광장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을 에너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에게 ‘촛불혁명’의 성지 광화문 광장이 있다면 체코 시민들에게는 바츨라프 광장이 있다.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이 있다면 바츨라프 광장엔 바츨라프 기마상이 있다. 이곳이 바로 시민들의 힘으로 1989년 평화적으로 공산정권을 몰아낸 ‘벨벳혁명’의 진원지이다. 프라하에는 봄이 왔는데 서울과 평양에는 언제나 봄이 오려나?
광장에 들어서니 프라하의 봄을 꽃피운 평화의 봄기운이 내 몸에 감돈다. 소련의 탱크를 온몸으로 막아섰던 특별한 기운이 서린 곳이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체코에 자유화 물결이 일기 시작하자 공산당은 개혁성향의 두부체크를 내세워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그는 서방세계와 관계개선을 통한 독자적인 경제발전을 약속했고 시민권을 대폭 보장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했다. 역사 깊은 광장의 역사를 읽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만 명의 소련군을 주축으로 한 바르샤바 연합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프라하로 진격했다. 바츨라프 기마상 밑에는 소련군 탱크에 맞서다 분신자살한 대학생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를 추모하는 비석이 있다. 나그네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모자를 벗어들고 묵념을 했다. 독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본 50만 명의 시민들이 광장에 다시 모여들었을 때 ‘프라하 봄’의 주역이었던 두부체크가 숙청(肅淸)당한 후 21년 만에 다시 시민들 앞에 섰다. 노 정치인은 눈물을 흘리며 진심 어린 연설을 시작했다. 시민들도 함께 울었고 이로부터 한 달 후 벨벳혁명은 평화적으로 완성되었다.
이곳에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섰다. 3만 명의 시민 앞에서 그는 “핵 없는 세상”을 외쳤다. 그 소리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노르웨이의 한림원은 그해 9월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의 의미로 오바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을 사용한 나라, 미국의 대통령이 핵 없는 세상을 언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해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만나 핵탄두 2,200기를 1,550기로 줄이고 미사일 1,600기를 800기로 줄이는 조약에 서명했다. 안 줄인 것보다는 났지만 눈 감고 아웅 한 격이었다.
미국은 러시아의 장거리 미사일로부터 유럽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체코와 폴란드에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려 했었다. 오바마는 체코와 폴란드에 미사일 방어시스템 설치를 포기하고 핵 감축 협정을 얻어냈다. 미사일 방어망이 없는 유럽은 지금 더 안전하다. 성주에 사드가 없어도 되는 이유이다. 성주의 사드를 포기하고 북한과 핵감축 협상을 벌여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녁때 혼자 한식당을 찾았는데 마침 옆에서 식사하던 블라디미라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학식이 너무 좋아 가끔 한식당을 홀로라도 찾아와 먹는다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로는 그때 체코는 단호하게 미사일 방어망 설치를 거부했고 미사일이 없는 지금 체코는 너무 안전하고 평화스럽다는 것이다.
다음날 나는 12시까지 곤한 잠을 푹 자고 느즈막이 일어나 슬슬 걸어서 카프카 상이 있는 곳을 먼저 찾았다. 프라하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20세기 문학의 거장 프란츠 카프카는 평생 프라하를 벗어나지 못하며 유혹적이며 미로(迷路)와 같은 골목길을 거닐며 작품을 썼다. 그 길을 따라 GPS를 보면서 가도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길을 몇 번이고 잃어버리고 다시 발걸음을 돌리곤 하였다. 그래서 프라하를 신비의 도시, 마술의 도시라고 부르고 추리소설의 무대로 자주 등장하나 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미로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그네의 발걸음은 프라하성으로 향한다. 9세기에 프라하성이 만들어지면서 프라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말도 있다. 성안에는 높은 첨탑의 비투스 성당이 있어 멀리서도 잘 보인다. 성으로 오르는 언덕길은 작은 화랑과 레스토랑이 정겹게 있고, 악사들의 연주 소리가 감미롭게 흥을 돋운다. 성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보안 검색을 하는데 난 순간 아찔했다. 바로 조금 전에 등산용품점에서 취사용 가스를 두 통이나 샀기 때문이다. 이곳 한식당이나 식료품점에서 김치를 사면 한 1주일은 김치찌개로 입맛을 돋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프라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입구를 지나면 바로 대통령 집무실이 나온다.
왠지 그럴 거 같더니 정말 이 도시에서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 오미정씨로부터 내일 주 프라하 대사가 점심을 초대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 잠시 후에 드레스덴에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맥도날드 야외마당에서 노숙하려 할 때 나를 구해준 신중욱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프라하에 지금 가고 있으니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과 내일 점심이 일거에 해결되었다. 주의하지 않으면 바로 길을 잃어버릴 이곳에서 기분 좋은 발걸음은 카를교를 건너고 있었다.
14세기에 황제 카를 4세의 지시로 블타바강 위에 지어진 카를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이다. 그는 프라하의 황금시대를 연 인물이다. 이 돌다리는 더 이상 강을 건너는 다리가 아니라 그곳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느끼고 음미(吟味)하며 사랑을 나누는 곳이 되었다. 그 다리 위에 조각상들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약 17세기경부터이다. 양쪽에 15개씩 30개의 조각상이 다리 위에 놓여 있어 마치 야외 조각 전시장을 찾은 느낌이다.
마침 거리의 악사가 다리 위에서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이 바이올린의 선율이 느리면서 때로는 곧게, 때로는 젊은 날을 추억하는 중년 신사의 발걸음처럼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질투하듯이 사랑의 언약을 하는 연인들 사이를 비집고 음악이 흐른다. 이 다리에서 사랑의 언약을 하면 다음 해에 함께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이 다리는 그래서 관광객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이 다리 위에서 ‘통일된 조국’과 사랑의 언약을 한다. 내년에 유라시아 열차를 타고 ‘통일 조국’과 이곳에 다시 오고 싶다.
그중에서도 단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성 얀 네포무첸 석상이다. 석상 앞 부조(浮彫)는 행운을 비는 사람들이 하도 만져 금색을 칠해 놓은 듯 반짝인다. 나도 행운을 빌며 손을 얹었다. 당시 대주교였던 그는 카를 4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 시절 왕비의 부도덕한 내용의 고해성사(告解聖事)를 들었다. 왕은 그를 불러 왕비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고해성사를 들은 대로 고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고해성사로 들은 이야기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버티다 지하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한다. 고문에 못 이겨 그가 죽자 왕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를 묶어서 강물에 던져버렸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킨 얀 네포무첸의 전설이 강물에 두둥실 떠서 흘러갈 줄 모르고 다리 위에 선 관광객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대체 왕비는 어떤 비밀을 그에게 고해성사했을까? 배고픈 건 참아도 궁금한 건 못 참는 내 발걸음은 그 자리에서 흘러가지 못하고 한참을 서서 귀를 기울여본다. 갑자기 배에서 꼬르르 소리가 난다. 8세기에 그가 성인으로 추대되어 무덤을 여니 왕의 고문과 회유에도 의연히 “아니”라고 외치던 혀는 아직도 핏기가 남아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건축양식의 시대적 변화를 공부하려거든 이리로 오면 된다. 블타바강 변을 따라 고딕에서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아르누보 그리고 현대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1000년의 건축양식이 전시장처럼 줄 서 있다. 초현실적인 환상에 빠져있는 동안 어디선가 필젠 맥주의 향기가 나그네를 유혹한다. 연인의 도시 프라하에서 오늘은 필젠의 유혹에 잠시 빠지련다. 오랜만에 이곳에서 연휴를 즐기게 됐다. 아까 다리 위에서 ‘통일된 조국’과 사랑의 언약을 했으므로 자축연이라도 펼쳐야 했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sisatime@hanmail.net
'사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0) (0) | 2019.02.25 |
---|---|
[칼럼] 正名운동으로 바라보는 근대사의 비극 (0) | 2019.02.25 |
[엄무환 칼럼]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0) | 2019.02.21 |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8) (0) | 2019.02.20 |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7) (0) | 2019.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