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7)
4대 강국에 발길질 한번 해보자!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나도 그렇지만 헝가리 사람들도 내게 친근감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흘끔흘끔 쳐다보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하고 나를 세워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한국 유명배우의 이름을 대고 아느냐고 묻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음료수도 주고 먹을 것도 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올 때 주인 여자가 골목길까지 배웅을 나오더니 “나도 당신처럼 훌훌 털고 머나먼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웃으면서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떠나자고 했더니 대답이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였다. 바보의 의미를 하루 종일 생각했으나 답을 얻지는 못했다.
어제 내가 이곳에 이 여인숙에 들어왔을 때 이 여자는 나의 이상한 행색을 보며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었었다. 내가 웃으며 설명을 하자 그녀는 농담하지 말고 진짜로 말해달라고 했다. 다시 나는 정색을 하며 내 여정을 쭉 설명했더니 눈이 똥그래지면서 “당신 미쳤어!” 하며 정색을 하고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내게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으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을 거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니 정말 미친 사람을 본 양 혀를 끌끌 찼었다.
아침에 내 기척 소리가 들리자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빵과 치즈, 요거트 등을 내밀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아침도 못 먹고 출발하는 내가 측은해 보였나보다. 사진을 함께 찍자고 하더니 내가 자기보다 작다고 생각했는지 내 어깨에 팔을 두른다, 팔에는 가녀린 여자의 힘까지 더해진다. 가늘고 길고 하얀 여자였다. 그리고 정 많은 여인. 그녀는 내 손을 마주 잡고 “신께서 당신을 보호해줄 거에요, 내 귀여운 양이여! 성모마리아는 당신의 발걸음을 축복할 거니 나를 믿어요.!” 라고 쓸쓸한 어조로 소곤소곤 말해주면서 안아주었다. 그녀의 신보다 그녀의 진심을 믿었다. 환대를 받던 곳을 떠나는 일은 달리는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 햇살에 작은 마을 풍경은 아름답게 빛났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 이 말은 하찮은 인연도 다 인연이라는 말인 줄 알았다. 스친다는 단어의 가벼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옷깃은 아무렇게나 스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아니다. 옷깃은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목 부분에 있는 것이다. 가슴 윗부분에 있는 것이다. 옷깃은 우연히 지나면서 서로 살짝 닿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옷깃을 스치려면 내가 상대에게 다가가고 상대 역시 나를 피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한 사람은 다가가고 그 사람은 마주와야 옷깃이 닿는다. 나는 그녀와 옷깃이 스쳤고 우리는 인연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단 발걸음을 돌리고 나니 따뜻한 햇살 아래 휘파람이 나왔다. 나의 영혼은 지금 헝가리와 유라시아와 사랑에 푹 빠졌다. 매일 40에서 50km를 달릴 때 오는 육신의 고통은 사랑하는 연인과 밤새 사랑을 나누고 오는 황홀(恍惚)한 나른함과 같은 것이다. 가을 안개가 짙게 깔린 이른 아침 오늘도 나는 헝가리의 남부지역 더바시, 케치케메트 지역을 달리며 내 영혼의 불꽃을 더욱 찬란하게 피우려 풀무질을 한다. 사랑을 하면 언제나 그렇듯 좋은 날들이 소나기 쏟아지듯 마구 쏟아져 내릴 것 같다. 헝가리를 사랑하는 즐거움에 여행의 피로를 잊는다. 견딜 수 있는 만큼의 피로감은 아무 이유 없이 자신감과 함께 낙관론자로 만들기도 한다.
헝가리 작은 마을이 보여주는 소소한 즐거움에 취해 달리고 있으려니 경적을 울려주며 손을 흔들고 지나가는 차들이 간혹 즐겁게 방해를 한다. 이번에는 아예 내 옆에 픽업트럭을 바싹대고 놀라게 하더니 자기차에 내 짐을 올려싣고 어디까지 가는지 태워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일 년여 동안 차를 타서는 안 되는 징벌을 자발적으로 받고 있는 중이고 헝가리 작은 마을이 선사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포기할 마음은 절대 없었다. 차를 올라타지 않은 포상은 금방 받았다. 조금 더 지나니 작은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내게 오라고 손짓하여 다가갔더니 시원한 맥주를 한 병 내밀었다.
일요일이면 이곳의 여인들은 화려하면서도 우수가 풍기는 의상을 입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예배를 보러 간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남자들도 구식의 양복에 번쩍이는 구두를 신고 앞장서 간다. 저쪽에는 어린 소녀 목동이 양 떼들을 몰고 얕은 개울을 건너게 한다. 양 떼들을 물을 첨벙첨벙 튀기면서 신나게 개울을 건넌다. 소녀의 머리에는 빛바랜 스카프가 쓰여있었다.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던지다 수줍어하며 고개를 돌렸다. 교회에 다녀온 사람들은 양의 목을 따고 기둥 같은 곳에 매달고 껍질을 벗기는 손길은 능숙하다. 방금 꺼내 낸 푸른색 내장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구경꾼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깔깔대고 떠든다. 마을 잔치가 시작될 모양이다.
달리는 발밑에 낙엽 밟히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리는 것이 기분도 상쾌하다. 땀을 떨구어 내는 일은 이 가을 나무가 잎을 떨구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것처럼 장엄한 일이다. 나무는 낙엽을 떨구며 새 시대를 준비하지만 나는 땀을 떨구어 내며 새 시대를 준비한다. 가을바람은 떨어지는 낙엽을 날리고 내 땀을 날려 보낸다. 코스모스를 흔들고 억새를 흔들고 내 마음을 흔든다. 가을길을 조깅하던 두 소녀가 지나쳐가더니 담을 뻘뻘 흘리며 유모차를 밀고 달리는 모습을 보고 다시 돌아와 엄지척을 하며 기념사진을 찍자고 한다.
달리면서 모공(毛孔)이 열려 온몸이 땀으로 적셔질 때 세상을 바라보는 맑은 눈이 뜨이고, 나뭇가지의 가녀린 떨림으로 전해오는 바람의 소리에 귀가 열린다. 겹겹의 미망 몇 꺼풀 벗어버린 듯 마음이 가벼워진다. 무엇보다도 세상과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고픈 마음의 문이 열린다. 탁 트인 헝가리 평원을 달리니 움츠려 있던 감정의 답답함이 가을바람에도 봄바람을 맞은 꽃망울처럼 한꺼번에 톡톡 터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하루하루 기쁨의 감정을 꽃망울 터트리듯이 가슴을 채우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무엇 때문에 깨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때가 많았다. 삶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가슴 설레는 일이란 벌어지지 않았었다. 삶의 목표나 꿈도 다 잃고 헤메였었다. 난파선의 잔해, 좌절의 파편들이 시간의 밀물에 밀려 내 고독한 섬에 켜켜히 쌓이기 시작했었다. 그 쓰레기 더미 위에 기적처럼 장미가 한 송이 피기 시작한 것은 달리기 시작한 이후였다. 장미 덩굴은 금방 고독의 섬을 덮었고 곧 새들이 날아들어 지지배배 노래하기 시작했다.
달리며 나는 누구도 상상 못 할 생명력을 자신의 내면에 비축(備蓄)하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생명력이라면 유라시아를 충분히 완주할지 싶다. 달리며 바람에 묻어오는 세상을 읽었으며, 달릴 때 나는 그 어떤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들을 때보다도 더한 집중력으로 나의 내면에 수줍게 숨어 있는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달리기는 에너지를 소모하면 기운이 쇠락(衰落)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며 내게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달리기는 운명적인 사랑과도 같아서 한계가 왔을 때 그것을 훌쩍 뛰어넘게 해주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내 가슴에 조그만 불씨 하나 날아든 것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시집간 딸 하나 남겨놓고 어린 다섯 아들 북어 엮듯이 엮어 손잡고 피난 내려와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내 할머니의 한숨에서 날아왔는지. 아니면 고향에 두고 온 내 어머니보다도 더 그리웠을 아버지의 첫사랑의 고개 숙인 그림자로부터 인지도 모른다. 혹시 그것은 한반도 구석구석 어디에도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니는 것인지 모른다.
내 가슴 속에서 그리 오래 절인 배추처럼 돌덩이에 눌려있던 것이 이제야 움찔거리는 것도 이상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재 속에서 불씨로 숨죽이던 그 염원(念願)이 달리면서 일어나는 바람에 뜨겁게 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마음을 열고 내 가슴 속의 불씨를 보여주었더니 그 사람도 가슴에 그런 불씨가 있단다. 불씨는 불씨와 만나 불꽃으로 피어난다. 아직은 작고 부끄러운 불씨에 불과하지만 서로의 가슴 속에 품었던 통일의 불씨를 꺼내 이으면 누구도 막지 못할 통일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내 마음에도 있고 너의 마음에도 있는 통일의 소망을 활활 타오르도록 달리면서 풀무질을 한다. 도공(陶工)이 정성껏 빚은 흙을 불가마 속에 넣고 1,300도의 푸른 불꽃이 일어나도록 온 정성을 다해 풀무질하듯 통일의 불꽃을 일으켜보겠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린다. 흙은 어디에나 널려있다. 통일의 염원도 어디에나 널려있는지 모른다. 어디에도 있는 흙을 빚어 도자기가 완성되려면 수십 차례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명품 도자기를 만드는 일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불 때기이다. 명품 평화통일을 이루어내는 일에도 불 때우는 일이 중요하다. 가슴에서 살아나는 작은 불씨, 통일의 의지를 횃불에 담아 우리 모두가 손에서 손으로 횃불을 이어주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그을음이 나지 않는 푸른 불꽃이 일어나 춤을 출 때까지 온 정성으로 풀무질을 하여야 한다. 불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영혼이 있는 생명이다. 불을 자기 내면에 품은 사람만이 다시 그 불로 다른 사람을 타오르게 할 수 있다.
명품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십 번도 더 불구덩이 같은 고통과 고난 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여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안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不條理)와 모순(矛盾), 불공정(不公正)의 대부분이 남북분단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의 가장 큰 오류(誤謬)는 환자보다는 질병에 매달려 왔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우주와 같은 것이어서 온몸의 기관과 세포가 서로 얽혀서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도 우주를 0.1 %도 알지 못하듯이 현대의학은 인체를 0.1 %도 알지 못한다. 현대의학이 원인치료를 외면하고 증상치료에만 매달려 왔지만 고칠 수 있는 병은 별로 많지 않다. 병균 침투를 제외한 모든 질병은 유전자(遺傳子)의 변질로 생기는 데 삶의 방식을 바꾸고 생활습관을 바꾸면 유전자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질병이 치유된다고 한다.
한반도의 휴전선은 유전자 변이(變異)이다. 한반도가 앓고 있는 모든 병의 원인은 휴전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통일운동의 가장 큰 오류도 어떤 하나의 현상에 일희일비하면서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을 양산하는 악순환에 있다. 남북평화통일을 이룩하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거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불공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불의와 일일이 대응하기보다는 전체를 아우르고 통합하고 소통하는 통일운동이 절실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휴전선을 걷어내고 건강한 사람 몸에서 혈액순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듯이 사람들이 남북을 자유롭게 오간다면 한반도는 바로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라비안나이트의 거인 지니처럼 호리병에 갇혀서 누가 우리를 꺼내 주기만을 기대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호리병은 생각보다 훨씬 약해서 조금만 힘을 줘도 깨져버리는 달걀 껍질 같은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4대 강국은 어쩌면 달걀 껍질보다 약할지 모른다. 발길질 한번 힘을 모아 제대로 하면 깨질 텐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발길질 한번 멋지게 해보자!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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