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
한 기자의 질문으로 시작된 유라시아 대륙횡단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간혹 인류의 역사나 개인의 삶은 사소한 곳에서 시작하여 급물살을 타고 물줄기가 확 바뀌기도 한다. 2015년도의 내가 그랬다. 이민 생활 26년에 지칠 대로 지친 난 느닷없이 짐을 꾸려 미대륙횡단마라톤에 나섰다.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쳤다고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단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이때까지 나의 미대륙횡단 마라톤은 단지 평범한 사람의 일탈이었다.
평범한 사람의 일탈(逸脫)을 한 기자의 기사가 화려하게 변신을 시켜주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강명구씨 아시안 최초로 나홀로 미대륙횡단 마라톤에 나서다”였다. 아시안 최초라는 수식어(修飾語)가 내게 붙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나는 평범하지 않은 결심을 하고 꼭 완주하리라 결심을 했다. 그가 뉴시스 뉴욕특파원/뉴스로 대표 로창현 기자였다.
그저 이모작 인생을 설계하고자 나선 여행길의 판이 확 키워진 것이다. 어쩌면 일생을 걸고 찾아 헤매도 찾아지지 않았던 길이 눈앞에 선연히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도 다른 신문들이 나의 기사를 외면할 때 그는 나의 여정을 계속 기사화 해주었다. 나는 그 기사에 통일을 이야기하는 순발력을 발휘했고 그렇게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통일마라토너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단숨에 ‘아시안 최초의 나홀로 미대륙횡단 마라토너’가 되었고 ‘통일마라토너’가 되었다. 나뭇가지 위에서 나뭇잎만 파먹던 애벌레가 하늘을 훨훨 나는 노랑나비로 변신하는 데 성공을 하였다. 애벌레일 때는 모든 것이 장애물로 보이더니 나비가 되어 날으니 장애물이 아니라 아름다운 구경거리가 되었다. 힘겹고 고통스러워 여기가 한계라고 여겨질 때도 이겨날 힘이 생겼다.
그 힘으로 들어가는 자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다는 모하비 사막의 폭염(暴炎)도 뚫고, 로키 산맥의 눈 폭풍도 견뎌내며, 대평원의 봄에 기습하는 토네이도 지역도 지나서 다시 애팔래치안 산맥까지 넘어서 백악관을 거쳐서 뉴욕의 유엔빌딩에 도착하였다. 그 길은 우직해서 자존심을 굽히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남자가 새로운 인생설계를 위해서 걸어가야 하는 길고 어두운 고독의 터널이었다. 안정보다는 자유를 더 사랑하는 남자가 기꺼이 선택하는 길이었다.
내가 뉴욕의 함마슐트 광장에 들어왔을 때 어느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내게 다음 도전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얼떨결에 여행 가방을 싸서 출발해서 기왕에 출발한 것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스스로에게 확인하고자 한 것 말고는 나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막연히’라도 생각하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아서 “그저 막연히 미대륙보다 큰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는 기사에서 “강명구씨 다음 도전은 유라시아 대륙!”이라고 썼다. 그야말로 기자에게 낚인 대답이 기사가 되고, 그것이 정말 나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그 기자가 바로 노창현 특파원이다. 그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는 이 유라시아대륙횡단 평화마라톤의 기획자이고 연출자이다. 그는 내 인생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마법의 지휘자(指揮者)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손끝에 의해서 연주하는 연주자(演奏者)가 되었다.
나는 이제 구한말 이준열사가 이루지 못한 110년 묵은 ‘자주독립’의 꿈을 가슴에 안고 유럽의 땅끝마을 네덜란드 헤이그로 날아가 이제야말로 세상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유라시아대륙 1만 6천km를 달려서 평양을 거쳐 서울까지 오는 대장정을 시작하려한다. 지난겨울 우리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어가는 장면들을 세계시민들하고 이야기하고, 전쟁 없는 세상의 꿈을 나누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세계평화를 얼마나 앞당기게 될 지를 토론하고 오겠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가슴 속에 있는 통일에 대한 염원의 불씨와 세계 시민의 평화에 대한 갈망(渴望)을 유라시아 대륙, 실크로드를 달리면서 모두 다 담아와 평화통일의 불길을 되살리고자 한다. 서로 소통하는 통로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평화통일기원 ‘유라시아대륙횡단 평화마라톤’을 통하여 찾으려 한다. 유라시아대륙을 달리며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알리고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웅변(雄辯)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고통스런 달리는 행위를 통하여 주장할 것이다.
단지 꿈을 꾸는 것이 죽을 죄가 되지 않는다면, 단지 꿈을 꾸는 것이 누군가의 기분을 하루 종일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면, 단지 내가 꾸는 꿈에 인생 망쳐버리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노벨 평화상을 꿈꾼다. 나는 이 세상이 더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꿈꾼다.
내가 유라시아대륙의 16개국 1만6천km, 16개국을 달리면서 발자국이 만들어내는 선은 유라시아대륙에 진주목걸이를 건 형상이 된다. ‘평화의 목걸이’ 그렇다 그 길이 평화의 목걸이가 되어준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을까. 몽고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헝가리에 이르는 8천km의 유목벨트에 서유럽과 중국, 한국을 포함한 1만 6천km의 평화벨트, 평화 목걸이를 이 아름다운 지구에 선사하고 지구가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인류는 유사 이래로 평화와 야만의 시대를 같이 겪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가장 야만적인 시대는 지난 세기였다. 그것은 불과 20여 년 전에 끝난 세기를 말한다. 그 100년간 인류는 양대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전쟁과 내전을 치루며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불구가 되고 재산을 잃고 희망을 잃었다. 또한 사회주의 실험으로 많은 인류가 인권을 유린당하고 희생되었다.
미국은 아메리카대륙에서 2억에 가까웠던 원주민을 거의 전멸시켰으며, 나치즘의 광기로 600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고, 난징 대학살이 벌어졌으며, 발칸반도에서는 인종청소의 야만이 자행되었다. 캄보디아에서는 킬링필드가, 수단, 콩고, 소말리아 르완다에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만약 21세기에 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인류는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여기에 문제의 해답이 있다. 해답은 분명하다. ‘화해와 공존’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전쟁의 원인이 ‘집단적 아픈 기억’임을 알고 있다. 그것이 ‘집단적 증오’를 낳는다. 공존을 위해서 누군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공존을 거부하는 순간 평화는 깨지고 참혹한 전쟁이 일어난다고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모험가는 시대를 앞서갔다. 유럽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산업혁명을 통해 내적 성장을 이루어 낸 다음 모험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미지의 세계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험가가 앞장섰고 선교사가 뒤를 따랐으며 곧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이제 아시아의 모험가는 평화의 시대를 예견하며 유럽으로부터 발걸음을 내딛는다.
평화에 대한 공감(empathy)을 확산시키는 도구로 달리기를 선택했다.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하게 멀고 험한 길을 달리는 것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겐 큰 행운이었다. 길이 멀고 험해도 달려서 가지 못할 길은 세상엔 없다. 평화의 길이 그렇다. 포기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딛으면, 그렇게 하루 종일 뛰고 한 달을 뛰고 일 년을 뛰면, 그래도 안 되면 모든 걸 다 걸고 뛰면 지구 끝가지도 달려갈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금의 한반도는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다. 한반도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내정간섭을 포기하고, 북한과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우리는 조건 없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여 평화통일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 미국과 북한 그리고 남한은 ‘평화와 공존’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8천만 민중이 언제라도 전쟁이 잃어날 수 있다는 공포 속에 72년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또 그렇게 살아가는 일은 처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평화는 모든 가치에 우선하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 어떤 무엇보다도 생산적인 활동이며, 평화는 아름답고 고귀하며, 평화는 언제나 옳다. 평화는 자주적인 힘으로 지켜낼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된다.
한 사람이 지나고 두 사람이 지나며 더 많은 사람이 다니면 길은 만들어진다. 내가 지나는 유라시아 대륙 길이 평화의 길이 되기를 꿈꾼다. 신의주를 지나 평양을 거쳐 판문점으로 내려오는 길이 내가 지나고 또 다른 사람이 따라 지나면서 평화의 길이 되기를 꿈꾼다.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은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이다. 전쟁의 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노벨평화상을 받고 전쟁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대동강의 능수버들 밑에서 돗자리를 펴고 대동강 맥주를 마시며 한가롭게 친구들과 옛이야기를 나누는 일 말이다.
단지 꿈꾸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단지 꿈을 꾸는 것이 누군가의 기분을 하루 종일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면, 단지 내가 꾸는 꿈에 인생 망쳐버리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꿈꾼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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