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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0)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0)

‘하얀 도시’는 어둠침침했다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하얀 도시’, 베오그라드의 의미이다. 하얀 도시의 첫인상은 검고, 어둡고, 칙칙했다. 식당에 가면 하얀 담배연기 속에 밥을 먹어야 하는 걸 각오해야 하는 것만이 ‘하얀 도시’의 이미지와 맞다면 맞지만 말이다. 다뉴브강에서 올라온 우윳빛 안개에 휩싸인 베오그라드는 때마침 동터오는 태양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베일을 쓴 신부의 모습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넘어 노도와 같이 진격하던 오스만제국의 군대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이르러 넋을 잃어버렸다. 새벽녘 기습공격을 감행할 무렵 마력의 아름다움에 군인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멈칫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 도시는 도시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악취 나고 구역질 나는 그늘을 다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전쟁의 상흔도 그대로 남아 있다. 가게마다 손님은 없지만 친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게에 찾아와서 무료함에 빠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인간적인 관대함은 세르비아의 소중한 가치이다.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얼굴에 웃음은 가득하다. 이들이 전쟁을 상처를 말끔히 치유하고 다시금 일어나는 날 이곳은 유럽의 심장이 될 것이다.

 

지나가는 나라마다 도나우 강을 만나니 이젠 도나우강이 오래된 친구인 양 반갑기도 하고 정감이 간다. 내가 다시 도나우 강변을 달릴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강 물결이 가을 햇살을 받아 잠자리 날개처럼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시각, 가족과 연인끼리 한가로이 강 언덕을 걷고 있었다. 중부 유럽에서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낭만의 아름다운 도나우강의 흐름은 여기서도 생기발랄하건만 이곳의 역사의 흐름은 어둠침침하니 안타깝기만하다.

 

이곳에는 아직도 크고 작은 민족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데 배후에는 언제나 국가 이기주의의 늪에 빠진 강대국들이 있다. 나는 이곳까지 오면서 세르비아 사람들의 정감 넘치는 유혹에 넘어가 정분이 난 상태라 사랑에 빠진 청춘들이 늘 그렇듯 나쁜 것에 눈이 멀고 좋은 것만 보인다.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검고 칙칙한 가운데서도 그들의 희망을 보았다. 그들이 얼마나 평화를 흠모하는지 보았다. 이곳의 모든 소멸과 폐허는 융기하는 신생의 징후이기를 빌어본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면 나도 상대방이 좋아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상대방이 하나를 주면 열을 주고픈 건 내 마음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오늘도 들판을 달리는데 이제 겨우 젖을 뗐을 정도의 강아지 두 마리가 포격으로 생긴 웅덩이에서 나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뒤뚱 걸음으로 그리 깊지 않은 고랑을 건너와 나를 또 쫓아오고 있었다. 이번엔 정이 들기 전에 단번에 쫓아버렸는데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들판의 개들은 유난히 크다. 거기에도 약육강식이 존재하여 강하고 큰 놈들만 살아남고 힘없는 놈들은 도태된다고 한다. 세르비아에 주재하는 어느 외교관 부인이 야생 개한테 물리는 사건이 일어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 들개의 70% 정도를 없앴다고 한다. 그래도 이곳엔 야생 개들이 넘쳐난다.

 

식당을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앉을 자리가 없다.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길거리에 서서라도 먹겠다고 사정을 하였더니 옆집은 자기 친구가 운영하는 바인데 말을 해줄테니 거기에 앉아서 편하게 먹으라고 한다. 자기 집은 체바피가 유명하고 그것을 먹어보라고 하여 지금 같아서는 아무거라도 먹을 자신이 있어서 그러라고 했다. 크고 동그란 빵 한덩이를 접시에 들고와서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한 입 베어물자 주머니 같은 빵 속에 소시지 같기도 하고 떡갈비 같기도 한 고깃덩이가 빵 안에 수도 없이 들어있다. 고기와 양파, 채소 등을 다져서 만든 짭잘한 것인데 맛과 영양이 충분하여 양도 많아서 금방 위장에 충만함을 느끼게 한다. 빵은 얇고 쫄깃하고 양파가 느끼함을 잡아주는 고기는 잡내가 없어 좋았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1리터짜리 큰 코카콜라와 함께 가격은 ‘on the house’라며 급한 점심시간이 끝난는지 자기 한국인 친구가 나처럼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인데 키타를 들고 다니며 여행을 한다며 페이스북에 친구를 맺으라며 자랑 겸 소개를 한다. 우리는 같이 사진을 찍으며 친구가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친구라하며 자랑할 것 같다. 그는 떠나는 내게 케바피 한덩이와 콜라 한 병을 더 싸주며 안전한 여행을 하라며 손을 꽉 잡아준다. 이것이면 오늘 저녁까지 해결된 셈이다.

 

동서로 흐르는 도나우강 슬라브어로는 두나브, 영어로는 다뉴브는 유럽의 10개국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이다. 베오그라드는 두나우강과 사바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이며 북쪽으로는 보이보디나 평원과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슈마디아 언덕과 접하고 있다. 두나우강이 보이자 나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피해 주민들을 위해 잘 정돈된 강변길을 따라 뛰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많은 사람이 한가하게 걷고 있다. 이곳에서 주인에게 목줄에 매달려 달리는 개들이 무척 다복해 보였다.

 

이 ‘하얀 도시’는 자존심이 강한 발칸의 고도이며 수륙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전략적 요지로 옛 유고연방의 수도이기도 했었다. 이미 기원전 4세기부터 켈트족이 요새와 도시를 건설했고, 기원전 1세기에 이곳을 점령한 로마 제국은 수상 요새를 세웠다. 나토의 무차별 공습을 되새기겠다는 의미인지 복구할 경제력이 없었던 지 파괴된 관공서나 큰 빌딩은 내팽개쳐있다. 마치 머리끄덩이를 움켜쥐고 조금 전에 피터지는 싸움을 마친 여인의 모습이었다. 힘든 싸움을 마치고 가뿐 숨을 몰아쉬는 베오그라드는 지난 200년 동안 40번이나 파괴되고 다시 건설된 비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마 세계에서 이보다 더 고난을 당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다리를 건너 언덕 위에서 찾은 호텔은 족히 200년은 됐을 석조건물이었다. 한 층만 호텔로 쓰는 주상복합의 건물이라 복잡하고 어수선했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육중함이 몸으로 느껴져온다. 잘 씻지 못하는 늙은이 몸에서 나는 냄새가 건물에서도 품어져 나온다. 커튼을 걷어내고 하늘을 보니 북쪽 하늘에 에머랄드 빛으로 가을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난한 곳일수록 하늘의 별들은 더욱 반짝인다. 언덕의 건물들에서 나오는 네온사인 불빛도 이곳에서는 슬프게 번져온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에 두나우강을 찾던 눈길을 거두고 창문을 닫아버렸다.

 

시내 곳곳에 아직도 파괴된 건물들이 참혹한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다음날 대사관 서기관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본 폭격당한 옛 중국 대사관 자리가 웅변으로 증명하여주고 있다. 당시 뉴스에는 미군이 주축이 된 나토군의 오폭이라고 나오지만 당시 중국 대사관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참전한 미 공군 F 117A 스텔스 전폭기 잔해를 입수해 보관하고 있었고, 중국의 스텔스기인 젠 14는 그 잔해를 입수해 연구한 결과라는 홍콩 일간지의 보도도 나중에 있었다. 국제 뉴스는 언제나 기자들이 전해주는 것을 그대로 믿기에는 의심가는 곳이 많다.

 

세르비아의 가장 큰 실수는 보스니아가 유고연방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침공에서였다. 시민들은 78일 동안 나토군의 크루즈미사일 정밀폭격으로 그 악몽 같은 나날들을 방공호에서 지내야 했다. 대부분의 사회기반 시설은 파괴되었고 3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나토의 지상군이 투입되자 세르비아는 항복하고 코소보까지 내주어야했다. 이제 베오그라드 시내는 한창 공사 중이라 길마다 차가 막히고 보행자들은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그건 아무 것도 아니어서 아무도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나는 대사관에서 마련해준 점심 오찬에 참가하였다. 한국대사는 일정이 있어서 못 나오고 조상훈, 최종희 두 서기관과 평통위원 신인근씨와 한식당은 없어서 중식당에서 좋은 자리를 가졌다. 밥 한 끼 먹는 일 사소한 일 인 것 같지만 밥 한 끼 먹는 일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귀한 시간 내어야하고 그럴 마음을 가지려면 정성이 필요하다. 그것으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고 더더욱 내가 하는 일의 무게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오후에 남는 시간에 잠시 성 사바성당에 들렀다. 성 사바 성당은 세계 최대의 정교회이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창시자이자 초대 대주교인 성 사바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세르비아 왕국의 스테판 네마냐 왕은 비잔틴 제국의 종교를 받아들였고, 그의 아들 사바 네마니치(성 사바)는 정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세르비아의 독립 정교회를 수립해 세르비아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내부는 수리 중이라 어수선했다.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멸망을 당했고, 동로마는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을 당할 때까지 동유럽에서 번창하였다. 이때 기독교도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로 나뉘었다. 동유럽 사람들은 동방정교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정교회는 로마교회와는 달리 교황의 신적 절대성과 무오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로만 카톨릭은 모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예배를 보는 것을 금했지만 정교회는 그것을 허락해 다양한 문화 창조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다 오스만 제국이 코소보에서 완강하게 버티던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물리치고 발칸 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이나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관광객에게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도시가 베오그라드이다. 베오그라드의 아침 안개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한들 그것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고, 전쟁의 상흔이 얼마나 쓰라린가를 보고, 또 따뜻한 인정을 만나고 싶거든 베오그라드로 오라! 베오그라드가 당신을 반가이 맞을 것이다.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0)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런 곳에는 찾는 여행객이나 기분전환 거리가 많지 않아서 당신이 이곳에 오면 특별한 대접을 해 줄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한 열정적인 시인이 매혹적인 여인에게 입 맞추듯 당신도 베오그라드에 빠져들 것이다. 어떤 기이한 황홀감이 당신의 영혼을 점령해버릴 것이다. 담배 연기 가득한 베오그라드는 그곳에 정을 붙이고 익숙해질수록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내가 지금 그러니까. 그래도 담배연기 자욱한 식당에는 아무리 오래 이곳에 머문다한들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여행이 끝나고 여행 가방을 정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경관이 좋은 관광지나 문화유산이 아니라 사람들과 만나서 주고받는 눈 맞춤과 섬세한 감정의 교류이다. 흔히 아름다움은 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름다움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감동이 얼마나 많은가. 세르비아에서는 일기예보에 없던 천둥번개가 몰아치듯이 느닷없이 만나는 기쁨이 있다. 아름다움은 늘 가슴 설레는 경이이다. 사람들과 눈 맞추고 마음 맞추었을 때 맺어지는 영롱한 진주알 같은 감정의 조각들이 그렇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상상력과 아름다움과 모험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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