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46)
고백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구름이 깔린 어두운 날 아침, ‘카이란’이라는 작은 산골 마을을 지날 무렵이었다. 언덕을 낑낑거리며 오르는 이는 나만이 아니었다. 땔감을 등에 잔뜩 싣고 숨을 헐떡거리며 당나귀 한 마리가 앞장서 가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저 무거운 짐을 지고 집을 찾아가는 모양이다. 달아나면 누가 저 짐을 등에서 내려줄까? 그래도 집으로 들어가야 짐을 내려놓고 편안한 하루를 지낼 수 있으리라! 당나귀 눈동자에 슬픔이 어려있다.
남자도 가슴 저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슬픔 같은 것이 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쌓인 나쁜 기운들이 있다. 그것들을 어디론가 멀리 가서 다 쏟아붓고 빈자리에 새롭고 활기찬 기운을 담아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위로받는 시간이 필요하다. 60세의 나이에도 꿈이나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쯤 해서 나의 이번 여정(旅情)이 전적으로 통일에 대한 열정이나 평화를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것이 부담스러워 고백했는데도 사람들은 프리즘처럼 한 빛깔로만 나를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속열차처럼 쉼 없이 달려온 인생, 삶에도 쉼표는 필요하고 정거장은 필요하다. 나를 제약하고 옭아매던 시간과 공간, 온갖 편견과 숫자놀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그저 아무 이유 없이 끝없이 달리며 세상 모든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큰 세상을 만나보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 싶었다. 중년 이후의 삶에 있어서는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즐기면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그러면서 사회에 공헌도 할 수 있으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나는 그런 기쁨에 힘들고 때로 극한 위험에 노출돼도 개의치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에서 시작한 것이 이번 여정이므로 지나치게 나를 영웅시하는 것은 부끄럽고 낯 간지러운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빛깔로 나를 투영한다. 나를 멋진 여행가나 모험가라 했다. 인내의 화신이라 했다. 안중근과 같은 열사에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조국의 통일이 누구보다도 간절한 이는 나를 통일을 바로 이루어 낼 초인이라고 칭송하는 이도 있다. 나는 그것이 부담스럽다. 또 어떤 이는 무모한 돈키호테라 부르기도 했고 돌쇠라 부르기도 한다. 차라리 이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나는 때로 침착하고 냉철한 승부사이기도 하고, 성질 급한 이이고 또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는 옹졸한 이이기도 하다. 유라시아를 달리노라면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없다. 갖가지의 경우에 내 대처 방법도 다 다르다. 프리즘은 한 가지 색깔만 보여줄 뿐 틀리지 않다. 나는 내가 어떤 빛을 낼 수 있는지 어떤 빛을 지워야 하는지 알고 싶어 이 길을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디딘 발걸음 중에 통일을 만나고 평화를 만나서 동행을 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나는 분명 몇 년 전 길을 잃었었다. 나는 당시 위험한 피조물이었다. 내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가족이고 친구고 모두 어둠에 휩싸였다. 무엇이라도 동반해서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릴 기세였다. 안정을 조금 찾은 다음에는 길을 잃어서 행복했다. 길을 잃어 새길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기꺼이 길 잃어버림을 즐기고 있다. 길을 잃어서 유라시아 실크로드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나는 세상과 벅찬 조우를 하며, 내 안의 나와 벅찬 만남을 가졌다. 아직도 나는 온갖 시련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며 새로운 인생과의 극적이며 로맨틱한 만남을 꿈꾸며 달려간다. 지금 나는 꿈이 있어 행복하다. 꿈이 있어 풍요롭다. 그것이 두려움을 벗어던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이내볼루’는 작은 흑해의 휴양도시이다. 이곳에 들어서자 바닷가 언덕에서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다. 산바람과 바닷바람을 다 품은 연이 꼬리를 흔들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있다. 아이들의 환호성도 함께 치솟아 오른다. 나도 바람을 품어 하늘을 나는 연이고 싶었다. 종이가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은 중심을 잡아줄 연줄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바람을 견뎌낼 단단한 근육 같은 대나무 살이 없어서이다. 비루하게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이 사람에게 밟히고 저 사람에게 밟히는 종이 조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의 마음의 근육을 만들기 위해 길을 나섰다. 멋진 어께 근육을 만들어 가슴에 호랑나비 문신을 새기고 명주실처럼 가늘지만 질긴 사랑의 끈에 매달려 거친 바람일수록 더 높게 나는 방패연이 되고 싶었다. 버티기 힘든 목마름과 배고픔, 고독과 두려움을 견디고 최후의 아름다움을 품에 안고 날고 싶었다.
여행은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고 변화한다. 나의 여정이 처음 계획보다 나도 놀랄 정도로 좋게 바뀌었다. ‘평화’와 ‘통일’이라는 나의 동반자들은 나를 새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노는 입으로 염불을 한다는 말이 있다. 기왕에 하는 일 없이 노는 입으로 염불을 해서 해탈(解脫)을 이룬다면 그것은 최상의 시나리오가 된다. 기왕에 아주 멀리 떠나서 쏟아붓고 싶은 내 안의 오물 같은 감정을 안고 길을 나서서 평화통일의 필요성을 스스로 각인(刻印)시키면서 또 남과 북 모든 시민과 세계인들과 공유를 하면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겠다. 나는 지금 나도 놀라울 정도로 통일운동가 평화운동가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나는 들개에게 다시 물릴 각오를 하고 손에 들었던 쇠파이프를 던져버렸다. 물론 왁신을 두 번이나 맞은 든든함도 한몫을 한 것도 고백하여야겠다. 그러자 ‘일리씨’라는 작은 마을을 출발해서 아바나라는 도시에 들어서면서부터 개가 한 마리 소시지를 던져주지도 않았는데 비를 맞으며 뒤를 따라온다. 따라오며 가끔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쓰다듬어달라고 내 다리에 몸을 비벼댄다. 목을 만져주고 다시 뛰어가려니 바둑이도 한 마리 같이 쫒아온다. 비 내리는 쓸쓸한 초겨울 바닷가에 개 두 마리가 동반해주니 적적하던 마음이 든든해진다.
이놈들은 5km 정도를 같이 뛰고는 임무를 마친 경호 요원처럼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그동안 쇠파이프를 들고 뛰는 모습을 보던 사람들로부터 평화마라톤과 이미지가 맞지 않게 조폭 같다고 항의를 받아온 터였다. 과연 무기를 버리고 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달리기를 멈추고 최대한 개가 놀라지 않게 배려를 하니 개들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무기를 버리니 평화가 찾아왔다. 개들과 평화협정은 성공적이었다. 내가 평화운동가로서 처음으로 체결한 평화협정은 성공적이었다.
비를 쫄딱 맞고 찾은 바닷가 자그마한 호텔에서는 온 식구들이 다 나와 나를 맞으며 따뜻한 차를 건네준다. 동방에서 온 봉이 김선달이며 그들의 켈올란과 같은 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내 휴대폰에는 이들에게 들려줄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곳에서도 역시 공짜는 없었고 재미있는 이야기일수록 값은 후하게 쳐주는 법이어서 오늘 저녁을 이들 가족과 웃고 떠들며 함께 맛있게 먹었고 숙박료도 무료가 되었다.
터키인들의 눈빛은 흑해의 햇빛과 바람 같은 것이다. 그들의 눈빛은 그렇게 온화해서 절대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어떤 삶이라도 우수한 삶이나 열등한 삶은 세상에 없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논리는 전혀 맞지 않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형성된 개성과 자율적인 생활양식, 문화가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전통과 문화와 종교를 바꿀 권리는 없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가치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나그네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미덕이다.
실크로드만큼 영감을 주고, 위안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도전하고픈 투지를 일깨워주고, 역사적이며 애환(哀歡)이 서린 포괄적인 길은 없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으로 끝없이 달리면서 태양 너머에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를 이방인으로 만나 어떤 감정의 교류를 나누고 또 얼마나 큰 이별의 아쉬움을 남기며 발길을 돌릴지 늘 궁금하다. 사람들의 뛰는 심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우리 이웃의 이야기요 바로 나의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내가 지나는 유라시아는 광활하지만, 내가 달릴 길은 명주실처럼 가늘지만 질긴 길이다. 이 길은 수만 년에 걸쳐 인류가 더 좋은 삶을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며 목숨을 내놓고 장삿길에 나섰던, 그리고 때로는 전쟁을 피해 눈물을 머금고 정든 땅과 친지들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길이다. 다 태우지 않으면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뜨거운 것이 내 안에 있다. 나는 그것을 다 태우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이 길을 달린다. 평화의 원산지는 마음에 있다.
홀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여행을 하다 보니 대지에 흐르는 기운이 말해주는 세상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체득하게 된다. 엄청난 긴장과 마음의 충만을 즐길 줄 알게 된다. 길 위에 나서자 퇴화(退化)된 날개 근육만 남아서 새장을 열어주어도 날아갈 줄 모르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렇게 물 만난 고기처럼 훨훨 잘 날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피곤에 전 몸은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숨을 죽이고 오히려 알 수 없는 기운이 몸 전체에 뻗쳐나갔다. 소금에 절이면 부드러워지고 잡냄새가 제거되며 아삭함이 오래 지속한다.
나그네는 지금껏 내가 살아오지 않았던 생활 방식과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먹으며 보지 못했던 풍광(風光)을 즐기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가슴에 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장사꾼이나 정치인 더더욱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모험가나 여행자로서 그리고 평화운동가로서 현지인들과 만나야 한다. 왜 그들이 귀한 시간에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는지, 왜 모스크에는 저렇게 높은 첨탑을 짖는 지, 왜 찻집에는 여자가 보이지 않고 이발소는 그리 많은데 미용실은 보이질 않는지 이해하게 된다.
발은 길을 달리고 눈은 거리 풍경을 따라 달리지만 마음은 자신의 내면을 스텔스기로 정찰하듯이 날아다닌다. 나는 가끔 GPS가 작동하지 않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 지 모를 때 극도로 불안하다. 그렇게 샅샅이 내면을 바라보고 내가 누구인가 답을 얻으면 마음의 평화가 올 것이다. 여행이란 단순히 풍광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땅 위의 습기가 올라가 구름이 되듯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바라보며 의식과 무의식 속으로 스며든 상상력으로 구름처럼 무궁무진한 조화를 부리는 가슴 떨리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실크로드를 따라 오고갈 보물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 최고는 평화이다. 이제 이 길은 평화가 넘나들면서 세계는 안정되고 그야말로 국가 간의 장벽은 무너지고 여권이나 비자가 필요 없는 지구촌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군비는 사상 유례 없이 축소되어 사람들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고 여유로워질 것이고 문화는 더욱더 꽃 피울 것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sisatime@hanmail.net
'사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남훈칼럼] 분열과 갈등 극복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자 (0) | 2019.05.01 |
---|---|
[임도건 박사의 경계선 뷰(View)] “졸혼,” 존혼(存婚)의 대안이 될 수 있나? (0) | 2019.04.30 |
[칼럼] 돈과 권력이 클수록 책임도 크다 (0) | 2019.04.29 |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45) (0) | 2019.04.26 |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44) (0) | 2019.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