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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45)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45)

들개와 함께 춤을!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바닷가 마을 시데로 가는 길은 수많은 언덕을 넘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야 했다. 때로 소 두어 마리를 몰고 가는 펑퍼짐한 아주머니의 뒤태를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 자기들끼리 풀 뜯어 먹으러 가는 당나귀 서너 마리의 뒤태를 따라가기도 하고, 떼지어 워낭소리 딸랑거리며 앞장서 가는 소들의 뒤태를 따라가기도 하며 무료함을 잊는다. 차들이 그리 많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바닷가 산골 마을 길에는 개들도 궁둥이를 흔들며 그렇게 길거리에 어슬렁거린다. 떼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들도 뒤태를 뽐내며 비행을 한다. 그뿐만 아니었다. 터키의 헌병 잔다르마도 여기에서 빠지면 서러워할 것이다. 트럭을 타고 지나가다 다시 돌아와 나를 세우고 신분증을 검사하더니 멋지다며 같이 사진을 찍고는 잘 훈련되어 각진 뒤태를 보이며 사라져 갔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언덕을 내려가자 마을 한복판에 시외버스터미널이 있고 그 근처의 작은 시장이 펼쳐져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움직이는 구경거리가 지나가자 손을 흔들며 여지없이 ‘구엘 차이!’하고 소리친다. 개에게 물린 이후 떠돌이 개들과 나 사이의 평화는 완전히 깨졌다. 한번 개한테 물리고 나니 무서웠다. 사람이 한번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무언가는 해야 한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쇠파이프 하나를 구해서 들고 뛰었다. 어떤 개도 내 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몽둥이를 휘둘렀다. 세르비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가리아를 지나서 터키까지 무수히 만났던 떠돌이 개들과 그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아무 탈 없이 여기까지 왔다. 때로는 나의 동반자가 되어 한참을 쫒아온 개도 있었고 꼬리를 흔들며 머리를 들이밀고 스킨쉽을 하던 개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내가 무기를 드는 순간 다 적이 되었다. 몇몇 나약한 개들에게는 효과적이었으나 몽둥이를 휘두르자 개들은 더 사나워졌다. 백주대로에서 개들과 내가 활극을 벌이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게 되었다. 한 놈이 사납게 짖으며 달려들면 어느새 동네 개들이 깡패들처럼 다 몰려들었다. 그러면 동네 꼬마들이 또 다 몰려온다. 나는 길 위에서 칼춤을 추듯 몽둥이를 휘둘렀고 개들은 또 스텝을 밟듯 내 주위를 맴돌며 으르렁거렸다. 아마도 어둠이 몰려오는 시간 멀리서 저 어마무시한 송곳니와 그 지옥의 동굴 같은 목구멍 사이에서 깔닥거리는 목젖을 보지 않는다면 영락없이 개들과 나는 왈츠를 추면서 플로어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리라! 시골꼬마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는 없었다. 녀석들은 박수까지 치면서 응원한다. 참! 나! 나를 응원하는지 개들을 응원자는지? 개들은 더 맹렬해진다.

 

나는 골치 아픈 들개와의 딜레마에 빠졌다. 개들은 내가 알라신에 경배하지 않고 이슬람 율법을 따르지 않는 것을 징벌하러 나온 종교경찰처럼 맹렬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흥분한 개들은 지난번처럼 살짝 상처만 남기지 않고 살점을 뚝 베어 물 것이다. 목덜미라도 저 송곳니에 걸리면 내 숨소리가 들리는 한 놓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기를 든 순간 난 더 큰 위협에 봉착(逢着)했다. 그러나 한번 든 무기를 여간해서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이 떠돌이 개들과 평화협정을 맺어 이 여정을 잘 마칠까?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 현생인류는 유라시아대륙으로 이주하며 이미 이곳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던 네안데르탈인과 경쟁했다. 현생인류, 즉 호모사피엔스가 처음 마주친 강력한 경쟁 상대는 네안데르탈인이었다. 둘은 두뇌 용량이 비슷했으며 다 불을 쓸 줄 알았고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았다. 신체적 조건은 네안데르탈인이 오히려 우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생인류가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개와의 평화협정을 맺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앞에서 인간이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끊임없이 달리는 장거리 달리기 능력이라고 했다. 순간 스피드는 떨어지지만 여럿이 협력하여 먹이를 끝없이 추적한다. 이때 개는 인간이 가지지 못한 예민한 후각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동업자로서 제격이다. 거기에 개는 순종적이기까지 하다. 언제부턴가 인간은 개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 개가 사냥감을 찾아내고 그 날카로운 이빨로 먹이를 공격하는 동안 인간은 조금 거리를 유지하며 창과 활로 공격을 한다.

 

이런 방법으로 50% 이상 포획량이 늘어났다고 한다. 년 총생산액이 50% 이상 증가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류 역사의 발전이었다. 산업혁명도 개와 인간의 평화협정이 가져다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사실은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간과됐지만 어떻게 인간이 오늘날처럼 막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앞으로 인류 역사, 지구 생태계의 미래를 위해, 다른 생물과 공존번영을 위해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사냥이 끝나면 개는 저만치 물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 인간이 던져주는 뼈다귀에 만족했다. 인간과 개의 평화협정의 효과는 지구의 생태계를 변화시켰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개체 수가 가장 많은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고 개는 덕분에 인간의 집에 같이 살면서 더 안정적인 먹이를 먹으면서 포식자의 공격으로부터 안정적인 삶을 누리면서 지금 지구상에서 아마 인간 다음으로 개체 수가 많은 생물이 되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개는 인류를 만류의 영장으로 만들어주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들과 감정적인 교류까지 하며 친구가 되어주었고, 적으로부터 위협을 알려주기도 하고, 썰매도 끌기도 하고, 눈 못 보는 이들의 눈이 되기도 하고 인명구조도 하고 하였으니 오늘날 개들이 상전 대접을 받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팔자 좋은 개들은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도 다니며 미장원에서 멋지게 미용도 하고 좋은 먹이를 먹으며 호텔에서 귀빈 대접을 받기도 한다.

 

반면 인간과 평화협정을 맺지 않고 야생에 남아있던 고집불통의 늑대들은 인간에 의해서 처참한 보복을 당하며 거의 멸종위기에 처했다. 간혹 사람 중에는 사냥이 끝나면 개를 잡아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인간을 가장 많이 물은 동물도 개이였다. 둘 사이에 사소한 분쟁, 예를 들어 내가 지금 개 때문에 겪고 있는 심리적인 고통 같은 것은 늘 있어왔지만 인간과 개 사이에 맺어진 평화협정만큼 오랫동안 잘 지켜진 조약도 지구상에는 없을 것 같다.

 

초원에는 수만 년 거친 바람의 모성이 키워낸 목초가 있었다. 거친 모성은 초원에 충분한 젖줄을 대지 않았다. 초원은 언제나 불안정했다. 그곳에서 초식동물들이 거칠게 자랐다. 그 자연의 생태계의 꼭짓점에 지금은 인간이 있지만 늑대가 그 최상위에 있으면서 인간에게 처절한 생존경쟁의 원리를 가르쳐주던 때가 있었다.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혈투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그리고 전략을 갖춘 당시 현 챔피언과 발톱도 이빨도 없이 욕심만 많은 인간의 대결은 언제나 늑대의 승리였다. 그러나 인간은 교육을 통해 깨닫고 배울 줄 알았다. 인간은 처절한 패배를 통해 아주 조금씩 개선해 나갔다. 그 시간은 오래 걸렸다.

 

한때 인간은 늑대를 경외하며 두려워했었다. 늑대 토템은 그 경계선에서 생겨났다. 초원의 유목민족은 하늘을 바라보며 우는 늑대가 천신, 즉 텡그리와 교감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영혼을 천신에게 인도하는 천신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늑대는 초원의 혼을 상징했고 그 강인한 생력력과 불굴의 투지 전투력이 유목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그 전신이 강한 군마와 유목전사를 키워냈으며 로마문명이나 중세의 봉건제도를 무너뜨리는 세계사의 충격을 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기로는 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더 큰 위협을 불러온다는 경험을 했다. 인간은 늑대보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는지 알 수 없으나 학습을 통해 끊임없이 개선해나간다. 안전한 여정을 위해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들개와 함께 춤을’ 추는 대신 개들이 좋아하는 소시지를 사들었다. 소시지는 개들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아무리 많은 개가 달려들어도 중간에 소시지 한덩이 던져 놓으면 자기들끼리 으르렁거리곤 했다. 그 옛날 인간과 늑대가 평화협정을 맺었듯이. 내년 무술년 황금개띠 해에 평화협정이 맺어져서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를 소원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에서 늑대와 함께 장난을 치고 있던 캐빈 코스트너를 멀리서 바라본 인디언 부족장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 ‘늑대와 함께 춤을’이다. 아마 그 부족장의 요즘의 나를 보면 ‘들개와 함께 춤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케빈 코스트너는 하얀 발의 늑대와 친구가 되는데 나는 떠돌이 개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그렇게 불린다면 왠지 창피하기도 하겠고 평화마라톤의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겠다. 그 영화의 압권(壓卷)은 그가 배신자로 낙인찍혀 체포되어 수송되어 가는 언덕 위에 그 흰 발 늑대가 슬픈 눈동자를 하고 어슬렁거리며 따라올 때 병사들이 이 늑대를 총으로 쏘아 쓰러트리는 장면이다. 늑대가 쓰러질 때 관객들은 모두 안타까워 한탄한다.

 

한낮의 밝음이 미명을 남기고 막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 시간, 바로 산에서 내려온 늑대가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적인지 친구인지 구분이 안 가는 시간을 ‘늑대와 개의 시간’이라고 한다. 차라리 어두워지면 늑대는 늑대의 본성을 드러내보이고 만다. 지금 이 전환기의 시대에 어느 것이 늑대인지 개인지 구별을 못하여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 어느 것이 가짜뉴스인지 구분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완연해지면 차라리 늑대인지 개인지 그 습성 또한 완연해진다. 사드가 평화를 지켜주는 무기인지 평화를 파괴하는 무기인지, 시민을 위한 지도자인지 시민의 이름을 팔아 제 배 불리는 파렴치한인지, 우리의 평화를 지켜주는 동맹인지 불안을 조성하여 제 나라 이익을 챙기는 제국주의인지 늑대와 개의 시간에는 불안하기만하다.

 

‘늑대와 개의 시간’,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자 아무리 둘러봐도 목동은 보이지 않는데 배를 채운 소들은 목의 워낭소리를 울리며 집을 찾아 줄을 맞춰가고 있고 집을 찾아가던 차들은 소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길거리에서 놀던 개들도 얌전히 소들의 행렬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곳에서 개와 양, 개와 소들은 나름 평화협정을 잘 맺어 지속적인 평화가 유지 되고 있다. 사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지속적으로 잘 지켜진 평화협정인 개들과 인간이 맺은 평화협정처럼 오래도록 지속될 온 인류적 평화협정이 맺여져서 다시는 전쟁과 분쟁이 없는 세상이 되기를 꿈꾸어본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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