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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0)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0)

극단은 극단을 부른다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해발 5700m, 엘브르즈산맥 곳곳에 뒤덮인 만년설이 녹아 흘러 내려와 카스피해로 들어간다. 카스피해가 이란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엘브르즈산맥에 막혀 더는 나아가지 못하는 곳이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카스피해 연안이다. 아침 햇살에 바다의 물비늘이 반짝이며 떨리며 밀려온다. 파도는 순한 어린애처럼 뒤척일 뿐 큰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거대한 엘브르즈산맥은 카스피해만 막고 서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왕래도 막고 비구름도 막아서서 엘브르즈산맥 저 남쪽은 카비르사막, 루트사막 등 황폐한 사막이 되고 만다. 황폐한 사막 뒤에는 언제나 거대한 산맥이 풍요의 비구름을 가로막고 서 있다. 미국의 모하비 사막 뒤에는 로키산맥이 버티고 있고,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 뒤에는 텐산 산맥이 길을 막고 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은 거대한 산맥과 같은 세력이다. 그들은 ‘인권’과 ‘세계평화’를 내세우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명제 아래 다른 모든 것은 다 집어삼킬 수 있는 괴물이 되어갔다. 거대한 산맥 뒤에 황폐한 사막이 생기듯이 거대한 세력 뒤에는 황폐한 식민 국가들의 삶이 있다. 아직 나의 여정은 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달려온 대부분의 나라에 이 거대한 세력들의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방언론이 이란에 대하여 보여주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면서 편협한 것이어서 이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들뿐이다. 거기서 묘사된 이란은 최초의 이슬람 공화국, 근본주의 이슬람, 차도르와 히잡, 종교경찰, 미 대사관 점거, 한국축구의 숙적으로 침대 축구 같은 것뿐이다. 페르시아 카펫을 짤 때는 온갖 화려한 색의 실을 다 사용하여 짜는데 어둠침침한 실로 짠 카펫만 카펫이라고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페르시아제국은 역사적으로 페르시아를 지배한 많은 왕조의 통칭이다. 페르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중근동 지역을 통치한 강력한 국가였다. 레자 샤 팔레비 때 새 왕조를 세우고 국호를 이란으로 바꾸었다. 그는 1925년부터 1941년 영, 소 연합군의 이란 침공으로 강제 퇴위 되어 그의 아들에게 양위하였다. 그 침공은 단순히 2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소련의 원유확보를 위해서였다.

 

부왕의 양위로 왕위를 승계한 모하메드 레쟈 팔레비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 아래 세속주의 근대화 정책을 밀고 나가 토지개혁과 여성참정권 부여 등 근대화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등에 업은 그 정권은 부패하여 왕실은 치부하고 사치가 극에 달하고 국방비 증액과 치솟는 물가와 생필품 부족 등으로 민심은 멀어졌다. 이것이 극단적인 이슬람 전통을 중시하는 원리주의 무슬림, 민족주의 세력의 반발을 불러 이란 이슬람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1979년 2월 1일, 테헤란의 600만 시민들은 한 사람의 의인을 목놓아 손꼽아 기다렸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추방 15년 만에 귀국한 것이다. 이념도 민족도 내세우지 않은 독특한 이슬람 혁명이었다. 600만 인파는 계엄령에도 굴하지 않고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알라는 위대하다. 국왕은 물러나라! 호메이니야말로 지도자이다.” 중동 최대의 친미 국가가 이란이었다. 이슬람 혁명은 미국의 중동 정책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1975년 베트남 패배를 능가하는 충격을 미국에 안겨주었다. 미국은 중동의 대리인이 필요했다.

 

이때 미국이 이란 혁명을 분쇄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실행에 옮기기위해 발탁한 인물이 바로 이웃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다. 그가 지배하는 이라크에 군사 원조를 하기 시작했다. 이란, 이라크 전쟁을 부추긴 것이다. 양국 100만 명의 희생자를 만든 처절한 전쟁은 중동 현대사의 최장기전이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이라크는 군사 강국이 되었다. 미국은 이란을 제어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도도한 근대화의 물결을 반전시킨 이슬람 혁명은 반미를 명시했다. 그건데 정작 소련에 더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소련은 -스탄 국가들의 도미노 이슬람화를 우려해 아프가니스탄 침공이란 무리수를 둔 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녹색 깃발을 들고 의용군이 일어나는 것은 소련의 침몰을 알리는 경보음 같은 것이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하고 결국 중앙아시아에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는 결과가 되었다.

 

극단은 언제나 또 다른 극단을 부른다. 극단적인 자국 이기주의는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 독재 정권이나 부패 정권도 지원해 준다. 미국이 만든 또 다른 형태의 괴물이 이란의 극단적 원리주의 무슬림정권이고 후세인정권이다. 나는 2월의 싸늘한 공기를 맞으며 카스피해와 엘브르즈산맥의 기운이 서로 상충하는 지역을 달리면서 과연 이슬람 혁명은 이란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 혁명인가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악의 축’이라는 미국의 일방적인 마녀사냥과 힘든 싸움을 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슬람 혁명이 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인 극단적 원리주의를 벗어던지면 토인비의 예언대로 이슬람은 새길을 내면서 재부상할 것을 믿는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란은 성(聖)과 속(俗)의 이원집정제 국가이다. 의회와 대통령은 민심을 대변하고, 이슬람 율법 학자는 천심을 대변한다. 이것이 이슬람 공화국이다. 나는 이란에 들어와 제일 적응이 안 되는 것이 돈 계산이다. 수학을 못 하던 나는 이란 돈에 그려진 동그라미를 세노라면 금방 머리에서 쥐가 돌아다닌다. 쥐라는 놈은 못된 것이어서 모든 것을 헝클어지게 한다. 이곳에서 백만 리알짜리 화폐가 별 값어치가 없으니 난 이란을 떠날 때까지 돈에 적힌 숫자에 적응을 못 할 것 같다. 내 추측이 맞을지 모르지만 그때 생긴 그 엄청난 인플레를 화폐개혁도 못 하고 그대로 안고 사는 것 같다.

 

‘추바르’를 지나고 ‘탈레쉬’ 지난다. 치솟은 산을 올려다보려면 목이 아플 지경이다. 치솟은 산과 푸른 바다의 조화가 달리는 뇌세포를 신선하게 정화해준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대부분 년식이 오래된 차들이었는데 조금 새 차다 싶으면 기아의 프라이드가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직접 생산을 한다. 얼굴부터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여인들이 많이 보인다.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육감적인 몸매의 곡선은 검은 천이 사뿐사뿐 흔들릴 때마다 은근하게 드러난다. 부르카 속에 드러난 눈매는 환상적인 흡입력으로 시선을 강탈한다.

 

호기심 많은 소년들은 손을 흔들기도 하고 다가와 말을 걸기도 하지만 소녀들은 살짝 미소만 보내주고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지만 언제나 예외적인 사람은 있다. 두 소녀가 부끄러운 듯 조심스럽게 다가와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한다. 아이들의 눈동자에 카스피해의 푸르름이 담겨있다. 웃음진 얼굴이 바다처럼 싱그럽다. 공동묘지를 지나는데 때마침 장례행렬이 들어온다. 이란은 보통 7일장을 지낸다. 다시 40일째 가족과 친지가 모여 고인을 위한 명복을 빌며 쿠란을 낭송하며 음식을 나눈다.

 

이제 5개월을 넘으니 몸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난다. 사실 세르비아를 지나면서부터 정강이에 통증이 오기 시작하여 여러 날 고생하였고 그것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뒷무릎에서 다시 소요를 일으켰다. 이제는 허리에서 집단봉기가 일어난 거처럼 통증이 몰아친다. 앉았다 일어나는 것이 힘들고, 양말 신고 옷 입는 것이 힘들다. 용변을 보고 뒤처리할 때는 손이 목적지까지 닿지 않아 가까스로 마무리한다. 얌전하게 순응하던 몸이 너무 혹사를 시키니 거칠게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상태로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을지 속으로 걱정은 많이 되지만 그러나 몸의 작용은 신비스러워서 달릴 때는 허리의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몸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응석을 다 받아주면 안 된다. 난 내 안에 이 통증을 다스릴 치유의 해법도 있다는 걸 믿는다. 나는 지금 내 안에 숨겨진 80%를 찾아 나선 사람이다. 이런 정도 허리의 통증은 충분히 각오했었다. 이 정도 대가도 치르지 않고 룰루랄라 유라시아 대륙을 달려서 횡단하려며 마음먹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 정도 고통이 분단 73년의 한반도가 겪는 고통에 비할까나! 어찌 그 안에서 분단의 아픔을 피눈물 흘리며 고스란히 참아내고 있는 이산가족의 아픔에 당할거나! 나에게 달리기는 호두까기인형과 같은 것이다. 고통이라는 단단한 껍질을 깨부수고 그 안에 있는 고소하고 영양 만점의 호도 알갱이 같은 기쁨과 환희를 빼먹는 수단과 같은 것이다.

 

니체의 지적인 욕구는 강인한 항해자처럼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사상이 존재하는 낯선 대륙을 찾아 지적인 모험을 한다. 니체가 모험을 통해 만난 대륙이 페르시아였으리라! 그래서 그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 차라투스트라는 기원전 6, 7세기 사이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의 페르시아식 발음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모험심이 많은 사람을 ‘강한 자’라고 부르고 고통이나 두려움 앞에 쉽게 굴복하는 인간을 ‘약한 자’라고 부른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인간을 위해 새로운 원칙을 제시한다. 그는 말한다. 세계는 한 명의 절대자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고.

 

미국에 의해서 악의 축으로 낙인찍힌 이란을 달리며 악의 그림자마저도 지워버릴 이 사람들의 훤한 미소의 환대를 받는 것은 내게 짜릿한 기쁨을 선사한다. 이슬람 근본주의가 외국인에게 배타적일 거라는 생각은 거둬들이기 바란다. 사람들은 나그네에게 호의를 베푸는 데 익숙해 있었다. 지나가다 차를 멈추고 음료수를 건네주기도 하고 차를 마시고 가라고 불러 세우기도 하고 사진 촬영도 같이하자고 한다. 나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지금 이곳에서 한류스타 부럽지 않다. 그러나 한편 눈에 보이는 그들의 삶은 녹녹해 보이질 않는다.

 

차들은 뒤로 검은 연기를 품으며 나보다 더 헐떡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곧 쓰러질 것 같이 달려가고 있다. 수입이 안 돼 거리의 차들은 50. 60년대 차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부품마저 수입을 못 해 덜컹거리며 달리다 곧 거리의 어느 곳에서 완전 분해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지난 25년간 이란에서는 항공기 17대가 제재로 낙후된 항공기를 보수하지 못해 추락하여 1500여 명이 숨졌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있어 이란 시민들의 삶에 타격을 입히는 대신 경제제재가 이란의 신정체제를 약화시키고 핵 야망을 억누르는 데 효과적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란 내 보수강경파들의 입지를 굳혀주는 것이다.

 

미국은 미 정부에 호의적인 정권은 독재자라도 지원했다. 허황된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하면서 자기들과 대립하는 정권은 악의 축으로 몰아세우고 세계여론을 주도하여 왕따를 만들었다. 미국은 언제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군사제재 경제제재라는 양날의 칼을 휘둘러왔다. 그 쌍칼 춤의 검무는 보는 나라마다 오금이 저려 했다. 자원이 많고 이권이 많은 나라 앞에서 쌍칼 춤의 검무는 더욱 현란하며 춤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칼날이 번쩍이며 모가지를 베어버리기도 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나는 한 사람의 병적인 고통이 아니라 수천만 이란의 사랑스런 친구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이 경제제재야말로 반인권적이고 반인륜적이라고 생각한다. 맘에 안 드는 정권 제거하려고 시민들을 인질로 잡는 국가 간의 이지매이다. 국가 간의 이지매야말로 야만적이며 거대한 폭력이며 새 평화의 시대를 여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정권을 손봐주기 위한 것에 고스란히 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어디를 가나 고위층들은 하나의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있다. 세계 제2의 산유국이 경제제재로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이란을 달리며 난 경제제재야말로 반인륜적이며 반 인권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유라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가 뒤에서는 미국을 수군수군 욕하지만 앞에서 드러내놓고 흉을 보지 못한다. 어린아이처럼 미국을 드러내놓고 흉보는 이란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확실히 보았고 세르비아가 또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지금은 터키가 당하고 있다. 과연 벌거벗은 임금님 미국에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손가락질하며 웃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정치지도자는 없을까? 미국에 옷을 입히는 것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보다 더 힘들까?

 

과연 문재인 대통령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손가락질하지 않으면서 젊잖고 감쪽같이 미국에 멋진 옷을 입힐까? 아니면 순진한 소년처럼 미국을 향하여 ‘벌거숭이 임금님’이라고 손가락질을 할까? 그것도 아니면 비굴하게 손바닥을 비비며 멋진 옷을 입으셨다고 아부만 할까?

 

거대한 산맥이 풍요의 비구름은 막아서지만 봄기운마저 막아서지는 못한다. 제아무리 강대국들이 거대한 산맥처럼 막아선들 지금 한반도에 도도하게 흘러들어오는 상서로운 평화의 봄기운을 막아서지는 못할 것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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