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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3)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3)

천지영기 아심정 天地靈氣 我心定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마리를 지나고 ‘바이라말리’를 지나니 이제 거대한 카라쿰사막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오직 모래와 죽은 듯 살아있는 관목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살 것 같지 않은 이 저주받은 땅에도 바람 속에 끊임없이 몸을 뒤채며 다른 세상을 꿈꾸는 생명들이 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이 있다. 이 광활한 벌판에서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거센 바람맞으며 치열하게 달리는 나그네의 발걸음도 그런 생명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작고 초라하다. 그러기 때문에 몸을 끊임없이 뒤채며 다른 세상을 꿈꾼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풍광은 단순하고 완고했다. 지평선 아래는 붉은 사막이고 위는 푸른 하늘이였다. 그래도 새벽에 해가 떠오를 때 사막의 모습은 장엄했다. 아침 햇살 아래 도로를 덮은 모래는 금가루를 뿌린 듯 찬란하게 빛난다. 물결처럼 주름진 모래 언덕에 오렌지빛 태양이 걸리면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전경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나는 사막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아진 나는 대자연에 녹아들기 더없이 좋아진다. 이곳에서는 번뇌, 망상, 탐욕과 노여움이 일어나지 않으니 자연 마음의 수양이 된다. 그러다 ‘도인이 뭐 별건가!’하는 자만심이 든다. 자만심마저도 금방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바람처럼, 바람에 날리는 모래 먼지처럼, 하늘 아래 끝없이 퍼지는 야생화 향기처럼 발걸음도 그저 바람에 얹어 본다.

 

그 옛날 망망대해를 지나는 뱃사람들은 하늘을 꽉 채운 듯 날아가는 거대한 새, 알바스트로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 봉황이란 대상들이 망망대해와 같은 사막을 건너면서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속에서 만났던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라든지 현상은 극과 극에서 만나 퍼즐처럼 잘 맞물린다. 만공(滿空)이라고 하였나? 텅빈 가득함으로 충만하다. 이 사막에 더 필요한 것은 없다. 푸른 하늘과 금빛 모래와 변화무상한 바람, 천지간의 충만한 기가 있다. 나는 하늘과 땅, 모래와 관목, 바람과 침묵, 소와 양, 낙타와 이름 모를 새들. 도마뱀과 개미 등 이 대자연의 모든 정령과 하나가 되는 경건한 의식을 치른다.

 

천지영기 아심정 (天地靈氣 我心定 천지기운 나의 기운 마음으로 하나 되어)

만사여의 아심통 (萬事如意 我心通 세상만사 여의롭게 내 마음에 통한다네)

천지여아 동일체 (天地與我 同一體 천지는 나, 나도 천지 한 몸으로 감응되어)

아여천지 동심정 (我與天地 同心正 내 마음이 천지 마음 하나 되어 바른 마음)

 

원불교의 주문인데 이 카라쿰사막에서 대자연과 하나 되고 가도가도 변화도 없고 끝도 없는 사막을 달리며 무료함과 고통을 이겨내며 달리기 딱 좋은 주문이어서 나는 끝없이 이 주문을 외우며 힘든 발걸음을 옮긴다. 대를 이어가며 더위와 추위 거센 바람을 이기며 살아가는 이곳 생령들과 하나가 되는 의식을 치르노라면 나도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연간 강수량이 고작 백 미리 정도 내리는 척박한 땅에는 사막 한가운데서 시작하여 사막 한가운데서 사라지는 강들이 있다. 이런 곳에 오아시스 마을이 들어서고, 사람들은 운하를 만들고 밭을 일구기 시작한 오랜 삶이 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마을을 중심으로 낙타와 양, 소를 방목하고 지하에는 축복의 선물인 석유와 천연가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매장되어있다. 가난과 핍박은 완고한 것이어서 이 축복의 선물도 사람들을 가난에서 건져주지는 못한다. 가난과 핍박의 질곡이 아무리 깊어도 산 자는 끈질기게 산다. 살아서 사랑하고 번식한다. 이보다 더 큰 명제는 없다.

 

목동들은 이른 아침부터 가축들을 몰고 들판으로 나간다. 어린아이는 학교가는 대신 아버지를 따라 회초리를 들고 가축을 능수능란하게 몰며 들판으로 나간다. 들판은 아이들의 학교이며 놀이터이다. 오늘 아침에는 저 앞에 한 목동이 양과 염소, 당나귀를 몰고 갔다. 그런데 당나귀란 놈 한 마리가 대오를 이탈해 남의 밀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개와 목동이 당나귀를 뒤쫓아 뛰어가지만 역부족이다. 목동은 발만 동동 구르고 당나귀는 신나게 별식을 포식한다. 당나귀란 놈 별식을 포식한 대신 오늘 저녁 치도곤을 당할 생각을 하니 내가 다 등에서 땀이 난다.

 

이런 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유목민이라 부른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오아시스 도시는 징검다리처럼 연결이 되어있다. 그 징검다리의 도움으로 카라반들은 거친 파도를 헤치듯이 사막을 헤쳐나간다. 그뿐만 아니라 유목민들과 카라반에 의해 농경사회가 고립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기도 했다. 수천 년 동안 이들은 낙타 등 위에 실린 진귀한 물건들의 긴 행렬을 보면서 아련한 꿈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보통 대상들의 행렬은 낙타가 1000마리에서 5000마리가 움직였다고 한다. 기록에 남은 최고는 10000마리였다고 하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대지는 붉은 비단이 융단처럼 펼쳐진 듯 끝없이 펼쳐졌고, 그 위에 관목들이 수를 놓은 듯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 관용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태양이 뜨고 아침 이슬이 마르면 태양은 금방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그 아래 끝없이 이어지는 대상들의 불굴의 발걸음, 낙타의 목에 걸린 은방울 소리, 하늘하늘하고 화려한 비단을 싣고 모래 먼지 날리며 광야를 가로지르는 낙타의 발자국 소리. 고향과 가족을 향한 지독한 향수는 천신만고 끝에 찾은 오아시스로도 위안으로 삼을 수 없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과 마르코 폴로가 공통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낙타 등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가도가도 그 자리인 것 같은 풍광에 지루해서 졸거나 피곤에 졸면, 어느 순간 대열에서 낙오된 자신을 발견한다. 태고의 적막과 이정표도 없고 지나온 발자국마저도 금방 바람에 지워지는 길 위에서 환청이 들린다. 동료들의 “어디 있어? 이리와!”라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바람 따라 들려온다. 그 소리를 따라 사막 한가운데서 헤매다가 대부분의 사람은 사막의 해골로 여기저기 뒹굴 게 된다.

 

낙타와 말은 원래 북아메리카가 원산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만3천여 년 전 소빙하기 때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동부지역이 육로로 연결되었다. 이때 아시아로부터 아메리카 원주민이 넘어갔고 낙타와 말이 넘어왔다는 것이다. 낙타와 말은 아메리카에서는 멸종하고 유라시아로 넘어온 것들이 살아서 진화했다고 한다.

 

몽골의 스텝지역의 추운 날씨에도 견디는 낙타는 쌍봉낙타이고 중앙아시아의 더운 사막에서 사는 낙타는 단봉낙타이다. 단봉낙타는 젓을 이용하기도 하고 걸음이 빨라서 전투용으로도 이용했다고 한다. 북아메리카에서 멸종된 낙타는 아시아에 들어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했다. 이들은 다른 포식동물들이 생존하기 열악한 환경인 사막 속에 뛰어들어서 그 속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낙타는 먹을 것이 풍부하고 생활환경이 쾌적하지만 약육강쟁 적자생존의 논리만 있는 대신 늘 포식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두려움과 공포로 살아가는 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먹을 것과 환경이 열악하지만 마음 편한 곳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그런 낙타에게 필요한 덕목은 은근과 끈기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더위. 추위. 물과 먹을 것이 부족한 열악한 조건에서도 잘 견뎌내며 진화를 계속했다. 그런 끈기와 인내로 낙타는 사막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들은 말이나 마차가 다니지 못하는 좁은 길과 늪지와 모래밭이나 거친 자갈밭까지 자유로이 다닐 수 있다.

 

낙타의 등에는 지방 덩어리가 있다. 낙타는 사막의 가시 박힌 식물도 잘 먹고 소화를 시킨다. 신장 기능도 뛰어나 소금물까지도 마실 수 있으며 100리터 물을 한 번에 마실 수도 있다. 낙타 눈썹은 모래바람이 불어도 견디기 좋게 잘 발달하여 있다. 낙타는 기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문명과 문명을 이어주는 사막 특급열차 역할을 오랫동안 충실하게 해주었다. 인간은 낙타를 실크로드의 사막과 초원지대를 이동할 때 짐꾼으로 이용하였다. 낙타는 등에 실린 짐이 누구 것인지, 왜 짊어져야 하는지 모른 채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유목민들도 생존을 위해서 낙타와 비슷한 선택을 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정주민들은 땅을 가진 영주 밑에서 대부분은 농노와 같은 생활을 했다. 유목민들은 모두 프리랜서이다. 철저한 신분제도 피라미드 구조하에 하층민으로 살아가느니 다소 거친 음식과 거친 잠자리라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이들이 이런 삶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유목민들은 농업 국가들의 농경민에 비해서 훨씬 쉽게 양질의 먹거리를 더 많이 구했고, 훨씬 안락하게, 훨씬 오래 살았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동북쪽 유목지역으로 유출되는 인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도 주위의 훈족이나 다른 유목민족으로 넘어갔을 때 고향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고 한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낙타와 유목민뿐만 아니라 살 놈은 다 산다. 다른 곳에서 전혀 못 보는 형태로 진화해 가면서 살아간다. 체온을 스스로 조절하며 물 절약형으로 변화하며 살아간다. 모래사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미가 수도 없이 구멍으로 들락날락하고 쥐구멍도 많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 살쾡이나 하이에나도 살고 있고 영양이나 가젤도 있다고 한다. 딱정벌레나 독성이 강한 전갈, 도마뱀 그리고 일반 뱀들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식물은 땅속 깊은 곳의 수맥을 찾아 줄기의 수십 배 이상의 뿌리를 뻗는 나무는 비가 왔을 때 빠르게 꽃이 피고 지는 형태로 번식을 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투르크메니스탄에 와서 느낀 것은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이 매우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차별과 탄압을 당하는 우울과 절망이 묻어있다. 초원에서 그렇게 낙타처럼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이 정주 마을을 이루고 모여서 경직된 정권의 여러 가지 제약 속에 일상을 보내며 대통령 개인숭배를 앵무새처럼 읊조려야 하니 울화통인들 어찌 안 터지겠나. 돌이켜보면 나도 그런 역사를 살았다. 할 말은 많은 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침묵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등에 실린 무거운 짐이 누구의 짐인지도 모르고 뚜벅뚜벅 걷는 낙타들의 행렬보다도 더 불쌍하게 느껴지는 삶이다. 경직된 사회에서 그들이 자랑하고픈 금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이들의 고단한 삶을 뒤로한 채 대자연의 정령들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천지영기 아심정 (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 (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 (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 (我與天地 同心正)’을 읊조리며 옮기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뛰는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꽃이 피어나도록 그리면 멋질 것 같다. 아니면 내 발아래서 나비가 날아올라도 좋겠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내 발걸음에서 태어나는 희망의 노랑나비!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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