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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9)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9)

“간호사는 조국을 치료했고 광부는 희망을 캤다”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나는 진정한 동서 문명의 원형을 찾아서 우리 조상의 삶의 모습과 지혜를 만나러 유라시아 길을 나섰다. 내 가슴속에서 거친 파도처럼 용솟음치는 것은 잘 다스리고 그 가슴으로 세상을 얼싸안고 받아들이려 길을 나섰다. 이 길은 인류의 숨구멍 같은 길이다. 이 길을 통해 인류의 문명이 숨통을 틔었고 교류를 하며 숨을 쉬었고, 종교가 넘나들며 문화와 인종이 교류하며 사랑을 키웠다. 사람은 서로 만나서 느끼고 함께 있으면 실타래처럼 엮이고 하나가 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내 마라톤은 현대인의 마음속에서 허물어져 가는 집같이 아늑한 평화의 구조물을 복원시키는 작은 노력이다. 그동안의 전쟁과 분열 편견을 치유 받는 아늑한 집을 짓는 일이다. 이 길이 막혔던 중세는 암흑기(暗黑期)를 맞았고, 이 길에 유라시아 철도가 놓아지고 고속도로가 깔리고 파이프라인이 연결되고 여권과 비자 없이 유럽연합 국가들처럼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 인류는 더 평등해지고 더 평화롭고 더 풍요로워지며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끊임없이 이동하며 서로를 비비며 섞으면서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이동해왔다. 길을 나서는 것은 길 위에는 언제나 소통과 나눔을 통해서 꽉 막힌 체증 같은 것을 풀어주는 뜨거운 기운이 넘치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비단길’, 이 아름다운 이름의 길은 내가 지금 그렇듯이 비단을 즈려밟고 가는 낭만적인 길이 아니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비단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길이였다.

 

언제나 보다 나은 곳을 찾아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본능인 것 같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더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목숨을 건 이주(移住)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을 난민이라고 부르지만, 옛날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약 6백만 년 전 초기 인류는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살다가 대략 4만~5만 년 전에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인류는 태어난 곳을 떠나 유럽으로 아시아로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1만 년 전에는 남극대륙을 제외한 지구의 전역에 인간들이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나는 오늘 우리 한인 이민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독일 동포들과의 뜻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반세기 전 더 나은 삶을 찾아 간호사로 광부로 독일에 와서 한인으로 뿌리를 내리고 자랑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 독일에는 약 5만의 동포가 산다고 한다. 지금은 프랑크푸르트에 가장 많이 살지만 내가 지나온 이곳 에센과 도르트문트, 뒤스부르크, 겔젠키르헨, 오버하우젠은 우리 광부들의 애환(哀歡)이 서린 곳이다.

 

엊그제 박선유 제독 한인회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9일 토요일에 에센 한인회관에서 동해, 독도 세미나가 있어서 독일 전역의 한인 인사들이 모이니 같이 가서 인사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다. 나는 유라시아횡단 평화마라톤을 설명하고 독일 교민들의 통일의 염원을 모으는 좋은 기회로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현지의 교민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좋은 기회가 생겨서 기뻤다. 도르트문트에서 조스트로 하루 더 이동해왔고 그곳의 숙소로 12시 조금 지나서 박선유 회장님이 찾아와서 함께 출발했다. 아침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모님과 축구협회 회장과 번갈아 운전하고 온 것이다.

 

에센으로 이동하는 중에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박회장님은 1973년에 오시고 사모님은 1965년에 독일에 오셨다고 한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은 혈혈단신 이국땅에 와서 돈을 벌어서 가족들에게 송금하던 이야기는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가슴이 먹먹해서 더 자세한 것은 물어보지 못했다. 그들이 견뎌냈을 향수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을 줄 나도 이민 생활을 해봐서 알기 때문이다.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정적을 깨고 한국에서 카카오톡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이제 세상은 인터넷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부모한테 안부 전화 한번하면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가족들이 신기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바꿔가며 전화기를 돌리면 반갑기도 하면서 전화비가 많이 나와 고국에 송금할 돈이 줄어들어 걱정했던 가난해서 서글펐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차창을 계속 빗줄기가 때린다. 우울한 가랑비가 모든 것을 감싸는 동안 사람 간의 마음을 더 가깝게 한다.

 

회관에 들어서자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회관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포스터가 붙어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회관 안에는 이민 초기 간호사들과 광부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들이 독일 이민 역사를 잘 설명해주었다. 점심은 교민들이 손수 준비한 간단한 육개장에 김치 반찬이었지만 보름 만에 먹는 쌀밥이라 꿀맛처럼 달았다. 음식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먼 이국에 살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는 끈이기도 하다. 사실 꿀맛이 문제가 아니라 한식을 못 먹고 양식으로만 때우니 대변에 문제가 생겨서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 다니느라 번거롭다.

 

비가 온 종일 내리는 날인데도 동해, 독도 세미나는 전국각지에서 150명 정도 모이는 성황(盛況)을 이루었다. 이렇게 오래 외국에 살면서도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동포들을 만나 나의 달리기를 소개하는 시간은 소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소중한 마음들을 잘 엮으면 큰 힘이 될 텐데! 과연 나의 달리기가 그런 역할에 조금이라도 밑거름이 될 수 있을까?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1960년대 초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었고 한국은 아직도 헐벗고 가난하여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들었다. 거리에 실업자는 넘쳐났지만 일자리는 없었다. 가난은 막장 안의 어둠처럼 모든 것을 지배하였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여야 할 당시 신문에 난 구인광고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500면 정원의 막장이라 불리는 탄광의 구인광고였다. 그런데 장소가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독일이었다. 500명 정원에 4만 6천 명이 몰려들었다. 태반은 대학졸업자였다.

 

1963년 광부 247명이 처음 독일에 도착하였다. 모두 3년간 취업 계약을 맺었는데, 1977년까지 8,395명의 광부가 독일 석탄 광산에서 일했다. 1965년부터는 한국인 간호사의 독일 취업이 허용되어 1976년까지 모두 1만 371명이 독일로 떠났다. 역시 3년 계약이었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해야 하는 일은 말로하기 힘들 정도였다. 광부들은 지하 1,000m의 막장에서 힘든 노동에 시달렸지만 막장 안의 어둠과 위험이 어쩌면 조국의 가난의 어둠과 전쟁의 위험보다는 나을지도 몰랐다.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위험이 차라리 전쟁의 위험보다는 덜했으리라! 어둠의 터널을 빨리 벗어나 밝은 빛을 보고 싶다는 열망은 막장에 있을 때나 암울한 고국에 있을 때나 매한가지였으리라! 그리하여 갱도 끝에서 보았을 햇빛의 강렬함을 마침내 고국에서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역만리에 살면서도 ‘동해, 독도 세미나’ 같은 행사를 주최하는 것이다.

 

나는 갱도의 어둠을 생각하고 가난의 어둠, 전쟁의 어둠을 생각했다. 그들은 가난의 어둠을 뚫고 나오려고 갱도의 어둠을 택했다. 내 마라톤도 분쟁과 전쟁의 갱도를 벗어나 평화의 세기를 활짝 열어젖히기 위한 선택이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간호사들도 처음에는 시체를 닦는 일 등 병원에서 가장 힘들고 꺼리는 일을 도맡았다. 이들의 월급은 한국에 송금되어 가족의 생계비와 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국가적으로는 이들이 먹지 않고 쓰지 않고 송금하는 돈이 근대화의 초석(楚石)이 되었다. 회관 지하 강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걸려있는 ‘우리들은 코리안 엔젤이었습니다’란 시 한 수가 눈길을 끈다.

 

“그 날은 이역만리 독일로 가는 날/ 김포공항의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며/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차마 놓을 수 없었던/ 생이별의 눈물은 꽃으로 갓 핀 우리들에게/ 살을 에는 겨울바람보다 더 매서웠습니다.

 

반세기 전 가난에 아픈 조국을 치료하기 위해/ 이역만리 독일을 향했던 우리들의 소망이/ 대한민국 경제의 마중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는/ 자랑스런 명예와 긍지로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들은 영원한 코리안 엔젤입니다.”

 

그 코리안 엔젤 재독한인간호사협회 윤행자 회장님이 필요할 때 쓰라고 비상 약품을 챙겨왔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하여 광부로 다시 독일에 왔다는 분은 내게 꼭 완주(完走)하라며 손을 꽉 잡아주셨다. 내 손을 꽉 잡아주면서 아픈 환자가 일어나듯 조국이 통일이 되는 기적을 보고 싶은 것이다.

 

“간호사는 가난한 조국을 치료했고 광부는 희망을 캤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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