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
백조의 기사, 유모차의 기사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국경선에는 군인도 없고 경찰도 없고 보안요원도 없었다. 당연히 검문소(檢問所)도 없었다. 뭉게구름이 넘나들고 바람이 넘나들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마치 이웃 동네 마실 다녀오듯 넘나들었다. 그리고 유모차를 밀며 내가 한때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네덜란드와 독일의 국경을 평화롭게 넘고 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 그 아래 흰 구름 떠가고 라인 강물은 소리 없이 길옆으로 흐르고, 강기슭에 백조가 평화롭게 노닐고 있다. 하얗고 보드랍고 우아한 생명체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주위의 숲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처럼 잘 보존된 채 조용히 잠들어있다. 인공의 소리가 완벽하게 차단된 곳에 서니 내가 얼마나 시끄러운 곳에서 왔는지 알게 된다. 이런 곳에서는 더 의미있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감각이 더 열려 미생물의 소리마저도 읽을 수 있다.
국경에 흐르는 평화가 벅찬 감동을 자아낸다. 개인의 삶은 국가의 삶과 평행을 이룬다. 국가가 단절되자 내 할머니와 고모, 아버지의 5형제들의 삶도 단절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자손인 내게도 내 사촌들에게도 쫓아다녔다. 우리 땅에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이웃 동네 마실 다녀오듯이 길을 나섰다가 70여 년이나 혈육과 단절된 채로 살고 있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크나큰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금기를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결코 고모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고모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였었다. 아무도 고모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수군거릴 뿐이었고 우리 가족은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슬픔을 외면하는 데 익숙해 가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이제 다 돌아가시고 형제 중 홀로 남은 넷째 작은아버지에게 고모의 나이와 인적 사항을 물었는데 작은아버지 역시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에 놀랐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 권리를 찾는 것은 인류가 더 평화롭고 더 풍요롭고 더 평등해지는 지름길이다. 익숙한 곳을 떠나서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늘 있었던 일이다. 나는 감히 인류의 진화과정마저 들먹이고 있다. 내가 가는 길은 그들이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유럽으로,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이주했던 길을 따라가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국경 없는 세상을 꿈꾸고 상상하고 실현해나갈 때이다. 여권과 비자 없이도 자유로이 여행을 다니며 천부인권(天賦人權)인 ‘거주이전의 자유’에 의하여 어느 곳이든 자기가 원하는 곳에 삶을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것이다. 그런 삶이 21세기의 유목민적 삶이고 노마드 정신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존중하며 타자를 환영하며 이웃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은 인류역사상 오래된 익숙한 능력이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낯선 나를 살갑게 대해주는 것도 이런 오랜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국경이 없어지면 더 이상 분쟁은 없어질 것이며 군대는 다 해산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 와서 새삼 이러한 삶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서구인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오랜 삶의 원형들은 산업혁명 이후 불과 수 세기 만에 다 파괴되었다. 중국인들이 오랜 세월에 거쳐 만리장성을 쌓고 오랑캐와 중화를 구분하기는 하였어도 지금처럼 국경선이 확실하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레이넨에서 도드와드로 가는 길에는 작은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나룻배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카페리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사람은 작은 스쿠터를 탄 소녀와 내가 전부였다. 그곳을 지나 네이메이겐으로 가는 길은 강둑을 하염없이 달리는 길이였다. 그 강은 네덜란드에서는 왈 강이라 불리우고 조금 더 올라가 독일 국경을 넘으면 라인 강이라 불리는 강이다.
그 둑방길 위에서 10여 명의 나이 지긋한 자전거 여행객들이 나를 지나쳐 가더니 특유의 호기심으로 아시아의 나그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내 여행 목적과 여정을 설명 듣고는 열렬히 응원해주며 지금의 한반도의 상황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한 아주머니는 밥이라도 한 끼 따뜻하게 사 먹으라며 10유로를 건네준다. 이제 나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국제적인 후원을 받으며 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10 유로가 나의 위상을 일거에 올려주었다.
다리를 건너 점심시간을 약간 지나서 네히메이겐 시내로 들어왔는데 월요일이라 식당 문은 거의 닫혀있다. 독일의 월요일 식당이 다 닫혀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일요일은 슈퍼마켓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다행히 근처에 야시장이 열려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다. 나도 그 줄에 섰다.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다. 생선튀김 가게였는데 5유로와 7유로짜리가 있어서 7유로짜리를 주문했더니 푸짐하게 한 보따리를 싸주었다. 아까 그 아주머니가 준 10유로에서 아직도 3유로가 남았다. 이름도 모르고 주문했는데 라인 강에서 잡히는 메기 튀김이었다. 미시시피를 지날 때 먹어보던 바로 그 맛이다. 한국인들에게 메기는 튀김 요리로 먹기에는 정말 아까운 생선이다. 우리에겐 매운탕이라는 기가 막힌 요리법이 있다.
내가 국경을 넘어 한참을 지난 후에 독일 국기가 휘날리는 집을 하나 발견했을 뿐이다. 독일 땅에서 처음 밟은 도시는 크라넨버그이다. 처음 만난 독일의 도시는 천박스럽게 튀지 않고 소박하며 역사를 그대로 품고 조용하며 또한 활기찼다. 옥수수 밭과 옥수수를 막 수확한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군이 퇴각하며 둑을 무너트려 홍수가 났던 곳이다. 지금은 숲속에서 부엉이 소리만 은은하게 울려나올 뿐이었다.
클레베는 ‘백조의 기사’ 전설이 있는 도시이다.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은 엘자공주가 곤경에 빠졌을 때 백조를 타고 나타나 멋지게 구하고 엘자공주와 결혼을 한다.
바그너는 북유럽 신화의 보고(寶庫)인 ‘에디’와 독일의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등을 바탕으로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대본을 썼다. 바그너는 독일의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신화나 전설에 관심이 많아 그것을 바탕으로 변형과 창작을 가해서 작품을 썼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관람한 후 바그너에 매료되었고, 독일인으로서의 자긍심(自矜心)을 치켜세워주는 바그너의 음악과 자신의 영웅적인 신화창조의 융합을 모색하였다. 이후 히틀러는 독일인을 하나로 묶고 자신의 나치즘 확산을 위해 바그너의 음악을 철저히 활용했다.
“옛날 아주 옛날 앤트워프의 왕 하인리히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나라 브라반트 공국을 오스트리아가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브라반트 공국은 대공이 죽어 후계자 문제로 분열이 되어있었다. 그에게는 딸 엘자와 아들 고트프리트가 있었는데 며칠 뒤 고트프리트가 종적을 감추자 엘자가 영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동생을 죽였다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돌자 그의 약혼자 프레데리크 백작은 오르트루프라는 마녀와 결혼을 하고 만다. 그리고 하인리히 왕이 브라반트 공국을 방문했을 때 프레데리크 백작은 엘자를 살인자로 처벌해달라고 청원을 했다. 왕은 전능하신 신만이 엘자의 유죄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며 엘자가 지명한 기사가 프레데리크 백작과 결투를 벌여 유죄 여부를 가리도록 했다. 이때 어떤 영화나 동화에서처럼 찬란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백조가 이끄는 배를 타고 미끄러지듯이 등장했다. 이 멋진 기사는 결투로 엘자의 무죄를 입증하겠으며 자기가 승리하면 엘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엘자가 백조의 기사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아름다운 신부 엘자가 시녀들과 함께 등장할 때 저 유명한 ‘결혼합창곡’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흔히 결혼행진곡으로 알고 있는 ‘신부의 합창’이라는 곡은 바로 로엔그린 3막에 나오는 곳이다. 그는 결혼하면서 엘자공주에게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묻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꿈같이 달콤한 첫날 밤 엘자공주는 금기를 어기고 만다. 그는 하이리히 왕과 모든 신하 앞에서 자신은 로엔그린으로 성배의 기사 파르지팔의 아들임을 밝힌다. 매년 한 번 성배의 비둘기가 찾아와 악의 힘을 물리치는 능력을 새롭게 해주는데 그 능력은 자기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모든 것을 밝힌 로엔그린은 떠나기 위해 자기가 타고 온 백조를 부른다. 그런데 이 백조가 바로 마녀 오르트루트가 마법을 걸었던 고크프리트 왕자였다.”
중세 독일에서는 영웅담을 토대로 많은 서사시가 만들어졌다. 악보가 없던 시절 음유시인들은 든든한 영주들의 후원을 얻어서 서사시를 만들어 유통시켰다. 이런 서사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훗날 바그너가 이를 집대성하여 수많은 오페라 작품을 쏟아낸다.
알프스 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려 라인강을 따라 흐른다. 잔텐은 라인강 옆에 있는 옛 로마인들이 살던 역사적인 도시이다. 라인강은 남독일에서 북독일까지 880km를 관통하며 흐르는 예로부터 독일의 가장 중요한 젖줄이다. 라인강을 뱃길로 이용하기 위하여 독일인들은 이미 19세기부터 물길을 직선화하고 강바닥을 파는 준설 공사를 했으며 그 후 몇 개의 갑문도 세웠다. 독일인들은 우리의 4대 강보다 먼저 혹독한 대가를 치렀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독일은 중부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통일을 이루어낸 나라 독일은 곳곳에 천 년의 역사를 품은 건물이 석탄 연기에 시커멓게 그을은 채 그대로 서 있다. 대기에는 고전음악이 숲속의 새소리처럼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듯하고, 기라성 같은 문호들의 문장이 구름 따라 가을 하늘에 흐르는 듯 하고, 고전 철학이 가을 호수 위의 안개처럼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나라이다.
역사적으로 독일이라는 국가가 존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게르만족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게르만족은 오늘날 스웨덴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앵글로색슨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등이 이에 속하며 375년 고트족이 아시아에서 침입해 온 훈족을 피해 이동을 시작하는데 이것을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고 부르며 게르만 왕국이 각지에 세워졌다.
여기에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 에스파니아의 서고트왕국,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 남프랑스의 부르군트왕국, 북프랑스의 프랑크왕국 등도 포함된다. 768년 카를 대제가 즉위하면서 프랑크 왕국이 시작되었고 그의 사후 동프랑크, 서프랑크, 남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었는데 이 중 동프랑크 왕국이 오늘날 독일의 모체가 되었다. 게르만인은 남방 인종에 비해 키가 크고 금발에 벽안의 눈동자가 특징이다.
중세 유럽은 라틴어만이 공식 언어로 대접을 받았다.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국어가 있기는 하였지만 저급한 언어 취급을 받았으며 체계적인 정리도 되지 않았다. 이런 독일어를 정리하여 표준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이다. 그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소수의 종교권력자들이 독점하고 있던 기독교 신앙을 다수민중에게 전파하여 부당하게 착취당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적혀있던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이들이 쉽게 접근하도록 하였다. 그것이 현대 독일어의 표준이 되었다.
나는 조국의 상황이 엄중한 시기에 유모차를 몰며 기사가 된 듯 유라시아를 달려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달려가겠노라고 의기양양하게 길을 나섰다. 원하는 일을 이루기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다거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禁忌)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화나 신화에 자주 등장한다. ‘백조의 기사’ 전설이 있는 클레베를 달리며 조화와 공존,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갈구하며 ‘유모차의 기사’인 나는 보무도 당당히 달려간다.
이 여정이 끝날 때까지 무엇을 금기로 하여야 할까 생각해보았다. 아! 있다. 유모차를 탄다든가 어떤 차나 또는 ‘백조의 기사’를 흉내를 내려고 백조나 백마든 어떤 것이든 탈것을 타지 않는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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