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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임도건 박사의 경계선 뷰(View)]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임도건 박사의 경계선 뷰(View)]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임도건 박사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임도건 박사] 합리와 합리화! 발음은 비슷한데 의미차이는 크다. 논리나 이치에 부합하는 게 합리라면, 합리화는 왜곡된 견해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은 합리적 존재로 묘사되어 왔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은 인류를 비이성적인 광기집단으로 만들었다. “한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하면 정신질환이지만 집단적으로 이상행동을 하면 이단종교” 아니던가?

 

10일 전 두 번의 약속을 바람맞았다. 철썩 같이 믿었던 분이 큰 행사를 앞두고 자문을 구하 길래 큰 도움을 주었다. 관계증진을 위해 귀중한 조찬 강연까지 어렵게 초대했는데, 승낙 1시간 만에 못 가겠다며 문자를 보냈다. 처음부터 스케줄을 확인하지 않은 불찰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필요를 채운 후에 팽(?)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렵사리 신청했는데, 육성 전화도 아닌 문자 한 통이 고작이다. 내 상식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또 다른 약속을 바람맞았다. 어머니 빈소에 다녀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약 1년 만의 상봉이라 모든 일정을 조정하여 어렵게 약속장소에 나갔다. 갑자기 중요한 상담이 잡혔다며 조금 기다리란다. 15분쯤 지나 연락이 있겠거니 했지만 묵묵부답이다. 공짜 밥 얻어먹으려면 그 정도 인내는 필요하지 않겠냐는 듯 마냥 기다리게 하니 기분이 영 언짢았다. 세련된 거지가 된 것 같아 35분 만에 자리를 떴다. 다음 날 죄송했다며 전화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딸랑 카·톡 하나가 끝이다. 그 사과의 진정성은 세월이 가면 판명날 것이다.

 

아무리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게 현대사회라지만 그 사람의 사후처리는 상식이하다. 멀쩡한 외모의 강남주민인데, 사람 잘 못 본 것 같다. 그러려니 잊으려 했으나 개운치 않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기억력이 나쁜가? 인격이 못 된 걸까? 자신의 불이행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불편을 초래하는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되레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않느냐는 적반하장의 논리를 편다. 자신이 뭘 잘 못했는지 알지 못하기에, 나무랄 가치조차 없다.

 

두 번의 에피소드를 통해 얻은 결론. 인간은 합리적 존재라기보다 눈앞의 이익에 따라 합리화하는 존재다. 진리여서 좇는다기보다 이익이 되기 때문에 진실로 포장한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절대 못 참는 요즘사람들. 진리는 질리지 않는다. 진리를 보편타당성으로 부르는 이유다.

 

일본어에 honne(ほんね)와 tatemae(たてまえ)란 단어가 있다. 전자가 본심이라면 후자는 남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적 배려다. 경제적 동물이라 일컬어지는 일본국민성의 단면이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이익을 위한 친절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같은 문화권의 중국에는 꽌시*關係라는 게 있다. 관계를 중시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말한다. 중국사회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이 회자된다. 상식적인 일도 관계가 나쁘면 안 되고, 불법적인 일도 친한 관계라면 된다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인정이 넘치는 사회요, 나쁘게 말하면 부패지수가 높은 것이다.

 

주체로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과, ‘보이는’ 현상을 객체로 인식하는 것은 다르다. 자신이 확고하게 믿는 것과, 설령 미덥지 않지만 믿어주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부모 입장에서 자녀들의 행동은 뭘 해도 신통치 않다. 그럼에도 믿어주는 것이 훌륭한 부모 아니던가.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간섭하고, 관심이란 이름으로 남의 사생활을 캐며, 충고랍시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약속불이행에 따른 평판하락보다 당장의 이익이 우선인 인간들. 그러면서도 뭐 어쩌라고? 라며 당당하게 활보하는 인간들. 뻔뻔함의 극치다. 여당도 잘 하는 게 없지만 상식 이하의 막말을 쏟아내면서, 문제가 되면 실수라고 발뺌하는 정치인들이 더 볼썽사납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믿음이 가질 않는다. 자숙하기는커녕 정치인은 원래 욕먹는 자리라며 전혀 뉘우칠 기색이 없다.

 

주관적 판단이 객관이 되는 것은, 사심이나 허황된 욕심을 버렸을 때다. 대부분의 판단착오는 이해득실 때문에 계산이 복잡해져서다. 히브리인의 경구처럼 만사가 온전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일상. 이른바 샬렘(완벽함)에서 비롯된 샬롬(평안)이 필요한 요즘이다.

 

글 : 임도건(Ph.D) 박사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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