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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임도건 칼럼] “25시” 기시감(deja vu)

[임도건 칼럼] “25시” 기시감(deja vu)


 

 

▲임도건 박사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임도건 박사] 생애 가장 길었던 일주일. 10년 치 인생교훈을 단번에 배웠다. 10일 간 유럽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날, 88세 어머니가 생애 처음 입원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재활운동을 거쳐 뼈가 굳고 원상회복을 위해 한 달 이상이 소요된다. 정신적-경제적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다. 한번은 희귀 혈액 부족으로, 그 다음은 초-응급 환자에게 양보하면서 수술이 5일이나 늦어졌다.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5일간 병상을 지켰다. 긴장한 어머니는 밤에 섬망(delirium)증세를 보였다. 처음엔 치매인줄 알았다. 병원24시의 환자들은 사실상 우리 이야기다.

 

지난 일주일은 이 세상 밖에서 보냈다. 인간사에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초-물리적 세상이 있다. 피안과 차안 사이 그 어디인가에 존재하는 “25시”정도 되시겠다. 루마니아 출신의 망명 작가 안톤 게오르규는 자신의 대표작《25시 Vingt-cinquième heure》(1949)를 통해 나치스와 볼셰비키의 학정과 악의 참상을 고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치 독일군의 스페인 공습을 전 세계에 노정한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말이다. 살다보면 물리적 시간 너머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분명 인간의 삶이되 초월적인 현실이 있다. 인문학이 가치를 발휘하는 영역이다.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 백혈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 자신은 약물치료가 무력화되자 더 이상 고통과 눈물이 없는 천국으로 보내달라며 연명치료를 거부한 반면, 곁을 지키던 아들은 지극정성 간호로 연명을 기도했다.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면 아들 기도가 거부된다. 아들의 기도를 들으면 어머니 기도가 거절된다. 그런데 신은 어머니와 아들의 기도에 모두 응답하셨다. 아들의 기도다. I pleaded with our loving heavenly Father-the Great Physician-confident He could work a miracle. But say yes to my mom's prayer, He would have to say no to mine. Sobbing, I surrendered, "Your will be done, Lord."

 

인생에서 홀로되는 순간,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일 때 누가 곁에 있는가? 그 ‘누구’의 존재 여부에 따라 임종은 달라진다. “비오는 날 곁에 있어준 자만이, 함께 무지개를 볼 자격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최고의 인생은 사랑이요*The best use of life is LOVE.

 

최고의 사랑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며*The best expression of love is TIME.

 

사랑하기에 제일 좋은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The best time to love is NOW.

 

수술 전 하늘은 찌뿌듯했는데, 회복실의 아침은 어쩜 그리도 맑은지. 기분에 따라 날씨가 달라지진 않겠으나 그땐 분명 그랬다. 이제 한 고비를 넘었다. 지나온 며칠을 돌아보니 꿈만 같다. 인터넷 공지한 지 삼일 만에 익명의 천사 6분이 지정헌혈(자기 혈액이 특정(병원) 환자에게 전달되도록 지정하는 헌혈)을 해 주셨다.

 

지인과 교우 및 친척들이 병문안 다녀가면서 위로금도 주셨다. 심은 대로 거둠이리라. 어머니는 평상시 베풀기 좋아하셨다. 80평생, 가족들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간병인을 통해 뒤늦게 작은 호사를 누리신다. 한 달 간 재활치료 받으실 병원도 둘러봤다. 깨끗한 환경에 좋은 시설, 집에서 가까워 자주 들르기에 좋다. 며칠 새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낙엽이 뒹군다. 화사한 낙엽은 화려한 생의 종말일까, 새 열매를 위한 아름다운 퇴장일까?

 

시인 <신경림>의 말대로 사는 것은 조용히 울고 있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멍울진 가슴, 슬픈 언저리에 외로움 하나 더하는 것. 먹먹한 외로움 달래려 긴 방황 끝에 돌아 온 고독은 우울이란 친구 하나를 데려왔다. 인간의 위로는 잠시, 허전함이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진정한 위로는 위~로부터 오는가 보다. 신에게 아픔을 호소하니 반응은 침묵이다. 활동중지가 아니라 더 깊고 온전하게, 더 나은 결과를 주시기 위한 기다림이리라. 로봇 수술하듯, 신은 담당의의 손을 클릭하며 수술했다. 제2의 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머니와 나의 25시는 신의 시간이었다.

 

글 : 임도건(Ph.D) 박사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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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건 박사 whisperai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