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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임도건 칼럼] 10월에는 시월애(時越愛)를

[임도건 칼럼] 10월에는 시월애(時越愛)를


 

▲임도건 박사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임도건 박사] 가을의 저녁이라는 “秋夕.” 한가할 새 없이 위를 혹사한 한가위도 지났다. 3분기를 끝내고 4분기를 시작하는 첫 주. 느슨해진 각오를 다지는 10월, 시월애를 위한 시기다. 영혼은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생존에 묶여 있다. 남은 세 달의 성과가 연말 결산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의 실적은 실력에 능력을 합한 업적인 만큼, 인사고과(人事考課, merit rating)에 결정적이다. 명퇴 대상에 오르지 않기 위해서다. 잦은 회식에 과로까지 겹치면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다. 말이 좋아 ‘산재’보상이지 월급생활자 대부분은 열악한 환경에 군소리를 삼켜야, 그나마 있는 자리라도 지킨다.

 

일(자리)*work은 생존과 자아실현을 위한 육체적 정신적 다양한 노력을 총칭하는데 두 가지 뜻이 있다. 고생을 수반하는 육체 ‘노동’(labor)이 있는가 하면, 부단히 애 쓴다는 ‘근로’도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적정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 대다수 노동 산물이 소수 자본가의 독점과 통제 아래,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저비용-고효율 정책은 기업의 파이는 키워줄지언정 임금노동자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하이징거는 일(work)을 노동(labor)이 아니라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놀이(play),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 했지만 우리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는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보다 그로부터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자본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노동자에게 얼마의 임금을 지불할지는 자본(가)의 몫이다. 생산성을 높여 전체소득을 키우지만 분배는 언제나 제로섬 게임이다. 자본가들이 챙기는 이윤은 ‘노동(임금)착취’ 아니면 ‘시장지배’다. 노동력과 임금이 교환되는 ‘노동시장’에서 수많은 갈등과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제도적 저항 장치가 없는 서민들만 피멍 든다.

 

세계15위의 경제대국이지만 초고속 압축 성장의 이면에서 부끄러운 자화상을 만난다. 연휴 지나 월초인데 죄다 피곤한 소식만 들린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법농단의 피의자로 적시됐고, 야당의 중진의원이 잠잠한 정가에 파문을 일으켰다. 오늘부터 비무장지대(DMZ)의 지뢰제거작업과 유해발굴이 시작되는 등 어렵사리 만든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을 기세다. 지지율 만회와 함께 국면전환을 노리는 쟁점치고는 파장이 작다. 오히려 특별활동비 6억의 사용처를 밝히라는 된서리를 맞았다. 명절 증후군이 걷히기 전, 국민들은 또 피곤해 진다. 정치권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마시는 차 한 잔의 행복과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행복지수와 불평등 지수가 낮은 것 외에, 자살공화국 1위, 5~60대 이혼이 OECD국가 상위라는 수치스런 세계기록도 지니고 있다. 둘이 괴로울 바에야 혼자 외로운 게 더 낫다는 세태가 황망하다.

 

비정규직들의 원성에 정규직도 할 말이 많다. 3~4배의 연봉이지만 일상화된 과로에, 해외여행 한번 못가는 것은 물론, 자칫 구설수에 오르면 한방에 훅 날아가는 리스크를 안고 산다는 것이다. 반면, 비정규직들은 4대 보험에 400% 상여금은 언제 받아보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정규직은 신경과민성 과로사에, 비정규직은 스트레스성 우울증에 시달린다. ‘중규’직인 필자는 양측 입장을 잘 안다. 예수님과 부처 같이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비정규직이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삼는다.

 

가장들은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위해 비굴해지는데 익숙하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자존심은 오만함인가 연약한 자기 방어인가? 동물과 달리 인간에겐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심이란 게 있다. 모든 감정이 그렇듯 자존심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 양도 불가능한 최후의 보루다. 문제는 그 범위와 정도가 어디까지냐다. 빳빳하게 세우면 오만*傲慢하고, 지나치게 낮추면 비루*鄙陋한 자로 낙인찍힌다.

 

자존심은 상대적이다. 상대와 내 수준이 비슷할 때, 상대를 존중하면 최소한 무시당하진 않는다. 반응은 둘 중 하나. 자존심이 무너질 때 초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버럭 소리에 난리치는 자도 있다. 상황에 대한 반응이 곧 자기 존엄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자존심은 남이 세워주기 전에 스스로 세워나가는 것으로 양적 판단기준이 모호하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은 극단적 상황에서 보이는 방어기제다.

 

 

서둘러도 빨리 배울 수 없는 게 있다. 세월의 교훈이다. 가진 게 시간뿐이지만 터득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10월엔 자신의 삶을 사랑하자. 사랑한 만큼 되돌아오는 인생. 부지런하되 조급하지 말고 민첩하되 허둥대지 말자. 과정에 충실하되 속도를 내자. “제대로 하면, 저절로 된다.” 동작대교에 걸린 석양이 유난히 아름다운 10월, 시월애를 꿈꾸며 전철에 몸을 실었다.

 

글 : 임도건(Ph.D) 박사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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