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리 저 | 사계절 | 856쪽 | 18,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는 박지리의 신작『다윈 영의 악의 기원』. 이번 작품은 배경도 주인공도 한국이 아니지만 작가가 구축해 낸 세계, 캐릭터, 그들의 삶을 위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사건들이 담겨 있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기 힘든 ‘가족’이라는 굴레, 필연적으로 저지르게 되는 살인의 문제와 법의 효용, 그를 둘러싼 부자간의 숭고한 사랑 등 3대에 이어 걸쳐지는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인간이 가진 악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국가의 핵심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주하는 안정적인 1지구부터 60년 전 일어난 12월의 폭동으로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땅 9지구까지 완벽하게 구획된 사회. 그러나 아날로그적인 통신수단이 주로 쓰이던 시절.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시간대에 이 작품은 존재한다.
12월의 폭동 이후 9지구 후디 출신에서 1지구에 정착한 러너 영, 30년 동안 친구의 추도식을 변함없이 열어 주고 있는 문교부 차관이자 프라임스쿨 위원장을 맡고 있는 아버지 니스 영, 1지구 최고의 기숙학교 프라임스쿨의 모범생 다윈 영, 끊임없이 1지구를 비판하는 프라임스쿨의 아웃사이더 레오, 그리고 열여섯 나이에 9지구 후디에게 살해당한 제이 삼촌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루미 등. 이들의 사소한 버릇까지 알게 될 정도로 생생한 캐릭터들은 여기, 이곳이 아닌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 나간다.
작가가 어찌나 세세하고 촘촘하게 이 시공간을 구축했는지, 읽다 보면 벤 헐크의 노래를 듣고 싶고, 호두나무 거리를 걷고 싶을 정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작가의 보여주기 방식이다. 작가는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주로 1지구 프라임스쿨을 다루지만 그것에서 9지구까지의 모든 것이 그려지고, 곳곳에 무심하게 놓여 있는 사소한 장치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자연스럽게 결정적 단서로 작용한다.
작품은 언뜻 보면 루미가 제이 삼촌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나가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범죄추리소설 같다. 루미는 4지구 출신인 엄마와 결혼해 7급 공무원 서기직에 만족하며 사는 아빠 조이 헌터를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늘 프리메라 여학교 교복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고, 위대한 사진작가 해리 헌터의 손녀이자, 프라임스쿨에 입학하고도 그 학교에 가지 않은 제이 삼촌의 조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9지구 후디의 강도 침입으로 열여섯의 나이에 살해당했다는 제이 삼촌의 죽음은 루미가 보기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그날 새벽 아빠는 삼촌 방에서 말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했는데, 뒤에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그리고 방에서 없어진 거라곤 단지 사진 한 장으로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12월의 폭동을 기록한 사진들 중 하나다. 루미는 사라진 사진 한 장에 사건의 열쇠가 있다 생각하고 이를 파헤쳐 나간다.
루미가 한창 범인을 쫓고 있는 중에도 실은 독자들은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범인의 존재는 이미 초반부터 드러나 있다. 프라임 스쿨의 모범생이자,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온화하고 겸손한 소년 다윈 영은 태어나서부터 해마다 제이 아저씨의 추도식에 참석하면서 자연스레 루미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다윈은 루미에 대한 관심을 제이 삼촌 사건을 같이 해결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한편으로는 동급생 레오와 우정을 나눈다. 레오는 법학 수업시간마다 날카로운 질문으로 교수와 대립각을 세우는 프라임스쿨의 아웃사이더이다.
범죄추리소설이자 법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러나 주요하게는 인물들 간의 오해와 자기 고백을 통해 인간은 어느 누구도 결코 온전하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니스와 러너, 버즈, 조이가 독백으로 들려주는 자신의 십 대 시절은 현재 이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이들이 기억하는 그 시절의 제이 역시 제각각 다른 모습이다. 니스가 보기에 제이는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재판관이자, 모든 인간관계에서 순결무구한 사람이다. 프라임스쿨에 입학하고도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일반 학교를 택할 정도로 위대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동생 조이가 기억하는 형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자신과 어머니를 괴롭힌 못된 인간일 뿐이다. 버즈는 제이가 프라임스쿨에 가지 않은 게 아니라 아버지 해리 헌터가 종용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한 아버지가 실은 제이에게 큰 상처였다는 것도.
가장 놀라운 것은 다윈 영의 진화이다. 기후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처럼 어느 순간 완전히 달라진 다윈은 이후 그 쌍둥이의 존재조차 자기 안으로 흡수해 어딘가 위로 올라선 것 것처럼 거듭난다. 순수한 어린아이에서 선과 악의 괴로움을 견디고 성장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서늘하기도 하다. 너무 순수했고, 지루할 만큼 평등했고, 지나치게 자기 아버지를 사랑했던 다윈. 그런 사람은 루미 말대로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영원히 아이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다윈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타인은 들을 수 없는 자기만의 목소리로 자신과 이야기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은 과거에서 유래했지만 자연과 달리 각자 너무나 새롭고 자기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지도.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다윈 영의 진화에 관한 미싱링크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자 인간의 본질에 관한 실증적 보고서다. 동시에 이곳,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놀라운 상상력, 치밀한 장치, 입체적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이는 박지리의 영어덜트 소설은 새로운 스토리텔링에 목말라하는 우리 독자들에게 놀라운 선물이 될 것이다.
작가 박지리 소개
1985년 해남에서 태어나 상명대 역사컨텐츠학과를 졸업했다.『합체』로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그 밖의 작품으로 『맨홀』이 있다. 한창 유행에 민감할 나이지만 여전히 2G폰을 쓰고, 메일도 거의 확인하지 않으며, 사실 전화도 잘 받지 않는다. 또한 여전히 스스로를 작가라기보다는 백수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예측 불가능한 다음 작품들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쓰고 있다. 그 외 저서로 『양춘단 대학 탐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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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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