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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1048)] 홍학이 된 사나이

[책을 읽읍시다 (1048)] 홍학이 된 사나이

오한기 저 | 문학동네 | 180쪽 | 10,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2016년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 오한기의 첫 장편소설 『홍학이 된 사나이』. 외삼촌이 유산으로 남긴 펜션을 관리하며 소설을 쓰는 ‘나’는 자신이 홍학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사랑하는 암컷 홍학이 참을 수 없이 그리운 날이면, 시외버스를 타고 동물원으로 가 하루종일 홍학 우리 앞을 서성인다. 펜션은 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원자력발전소 때문에 사람들의 방문이 뜸하지만 ‘나’는 되레 원자력발전소를 좋아한다. 둥지를 짓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홍학처럼 ‘나’는 원자력발전소를 둥지로 감각하고 이해한다.

 

하루는 햄버거가게의 노인이 ‘나’를 찾아와 원자력발전소를 철거하기 위한 서명을 받으려 한다. ‘나’는 그러한 노인을 이해할 수 없다. 원자력발전소는 인류를 멸종시키고 절대적인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인을 홍학의 천적인 물수리라고 여기고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어느 날 저수지 위의 보트에서 잠든 여자아이가 발견된다. 여자아이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고 오로지 물수리가 만들어 파는 햄버거를 먹을 때에만 입을 열 뿐이다. ‘나’는 그런 여자아이를 ‘DB(디럭스 버거)’라 부르고 늘 햄버거를 사다준다.

 

물수리는 햄버거가게에서 쉴새없이 햄버거를 만들지만 팔리지 않는다. 그는 원자력발전소 탓이라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낡고 허름한 이곳 대신 시내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으로 간다. DB는 아빠를 찾기 위해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돌며 지낼 때 물수리의 도움을 받았다. 오래전 사고로 어린 딸을 잃은 물수리는 DB를 자신의 딸로 착각하고 보호하는가 싶더니 곧 폭언과 학대를 일삼았다. 견디다 못한 DB는 물수리에게서 도망쳐 나와 ‘나’에게 오게 된 것이다. 물수리는 DB를 되찾기 위해 ‘나’의 펜션에 불시로 찾아오기 시작하고, ‘나’는 물수리로부터 DB를 지키고자 한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지금 읽는 문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다음 문장으로 나아가는 일은 더딜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재료’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것일까. 숙련된 독자가, 소설가인 화자와 인류를 절멸시킬 원자력발전소, DB의 햄버거론 등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이끄는 익숙한 답안지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가 피부가 붉어져 찾아간 병원의 의사로부터 “불치병입니다. 이제 완전한 홍학이군요”라는 말 대신 “작가라면서요? 글을 쓰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럴 거예요”와 같은 말을 듣고 실망하는 대목이나 어느 날 아빠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사라져버린 후부터 암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던 DB의 노트에서 “아빠가 천장에 목을 걸었어”와 같은 대목이 발견될 때, 독자는 이 소설이 사랑을 잃고서 미쳐버린 자들의 이야기라고 간단히 규정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독해하는 와중에 어떤 대목은 작가의 소설론으로 곧바로 치환하여 명쾌하게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홍학이 된 사나이』가 지닌 놀라운 힘은 이러한 시도를 무력화한다는 데 있다. 독자가 이 작품을 사랑으로 인해 미친 자들의 미친 목소리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여, 그 미친 언어가 정상적인 언어로 순순히 번역되는 것은 아니다. 쉽게 규정하고 이해하고자 할수록 독자는 자신이 내린 잠정적인 결론을 점점 의심하게 된다.

 

『홍학이 된 사나이』는 2013년 ‘서울생활’(“뉴욕에는 뉴요커, 서울에는 서울생활”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만들어진 모바일진)에 6화까지 연재되다가 중단됐다. 2년 후인 2015년 ‘언리미티드에디션―서울 아트북페어’(독립출판물 마켓·페스티벌)에 참여한 후장사실주의자들의 문예지 『analrealism vol.1』에 전재되면서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500매에 조금 못 미치는 경장편 분량의 이 소설은 문학사에서 문제적인 작품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기존의 독법을 점검하게 하는 한편 관습적인 장르의 구분과 명명에 이의를 제기하게 만든다. 첫 소설집의 출간을 기념하며 열린 작가와의 만남 행사(2016년 1월 14일)에서 “시를 쓸 생각은 없느냐”는 한 독자의 질문에 오한기는 “『홍학이 된 사나이』가 시입니다”라는 요지의 답변을 한 바 있다. 조금 엉뚱하게 들리는 이러한 대답과 함께, 시각적 효과를 염두에 둔 텍스트의 배열까지 참고하자면 『홍학이 된 사나이』를 쉽게 독해하고 분석하려는 태도에 ‘의문’을 품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이 난해하고 실험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함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낯선 상대를 만났을 때 생기기 마련인 경계와 해석의 욕망은 『홍학이 된 사나이』 앞에서 오히려 주춤하는 듯하다. ‘의문’은 매혹적인 작품을 향한 강렬한 끌림과 함께 자연스럽게 수행된다. 책의 뒤편에는 이례적으로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아니라 “리뷰가 아닌 조용한 열광”(방영은, 「문학이 된 사나이」)이라고 밝히는 한 독자의 고백이 실려 있다. ‘누군가에게는 상당한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이 소설을 너무도 사랑하게 되어 다른 글은 읽을 수 없게 된, 그리하여 떨쳐내기 위해 쓸 수밖에 없었던 리뷰’라는 것이다. 자신이 홍학으로 변해간다고 믿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사로잡힌 독자의 글에서 사랑에 빠진 이의 열기가 느껴진다. 아마도 『홍학이 된 사나이』가 또다른 누군가에게 조용한 열광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소설이 순전히 열렬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오한기 소개

 

1985년 경기 안양에서 태어나 동국대 문예창작과에서 공부했다. 2012년 『현대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파라솔이 접힌 오후」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의인법』이 있다. 2016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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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