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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1132)] 멍청이의 포트폴리오

[책을 읽읍시다 (1132)] 멍청이의 포트폴리오

커트 보니것 저 | 이영욱 역 | 문학동네 | 244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커트 보니것 소설 『멍청이의 포트폴리오』. 이 책은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가 커트 보니것의 미발표 초기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저자가 장편 『마더 나이트』『제5도살장』등으로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기 직전인 1950년대에 쓴 초기작들이 수록되어 있다. 책을 통해 보니것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부조리한 사회, 아이러니한 인생’을 어떻게 풀어가려고 했는지 그 출발점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후에 발표된 작품들에 골자가 되는 소재나 인물이 『멍청이의 포트폴리오』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표제작 「멍청이의 포트폴리오」의 화자는 주식 포트폴리오 매니저이다. 그는 사기꾼의 꾐에 빠져 양부모의 유산을 모두 탕진하려는 젊은이를 보며 그가 ‘돈의 소중함을 모르는 멍청이’라며 답답해한다. 그러나 그 역시 가족도, 명예도 저버린 채 ‘돈밖에 모르는 멍청이’일 뿐이다.


「스노우, 당신은 해고예요」에는 ‘젊고 예쁜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진 두 멍청이가 등장한다. 에디는 예쁜 여자들은 모두 일도 못하고, 자기밖에 모르며, 언젠가 사람 뒤통수를 칠 거라는 생각에 색안경부터 끼고 본다. 그리고 중년의 플레밍은 젊은 여비서의 아름다운 외모에 빠져 가족과 회사 모두를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꿈꾼다. 이 두 멍청이 모두 ‘젊고 예쁜 여자’ 스노우의 내면이나 생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강가의 에덴동산」의 주인공 소년은 ‘여자 마음도 모르는 멍청이’다. 소년과 소녀는 숲속을 헤매며 둘만의 언어로 애틋한 감정을 나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함께 있는 시간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려 노력하는 쪽은 소녀다. 소년은 소녀의 은밀하고 간절한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혹은 알아차렸더라도 그에 걸맞은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이처럼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똑똑하지 못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거나, 둘을 알더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생의 아이러니에 당황스러워하고, 이미 지나쳐버린 중요한 기로를 멀뚱히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보니것은 이들을 조롱하지 않는다. 작품을 하나하나 읽어나갈수록 등장인물들에 대한 답답하면서도 짠한 마음이 커져간다. 보니것의 여느 작품에서처럼, 작품 속 멍청이들을 향한 웃음 뒤에는 어딘가 모자라지만 순수한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따스한 시선이 숨어 있다.


「‘소심한’과 ‘멀리 떨어진 곳’ 사이에서」는 젊은 화가 데이비드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이 죽어 있는 동안 ‘과거의 어느 시점’을 여행하고 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아내와 함께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임사체험을 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죽음에 한 발짝 다가가려는 순간, 자신이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닫는다. 하지만 의식은 이미 흐릿해지고 손끝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 그리고 의사가 약속 시간보다 늦을 거라는 전화가 걸려온다.


「프랑스 파리」는 신혼, 중년, 노년의 세 커플이 런던에서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다. 그들은 모두 유럽 여행중인 미국인들이었다.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유지시키기 위해 획기적이고 로맨틱한 무언가를 해보기 위해,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파리의 에펠탑을 보기 위해, 사랑에 확신을 얻기 위해, 등 여행을 떠난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그들은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마주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순간들, 꼭 만나야 했고, 만날 수밖에 없었던 삶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익숙한 세계에서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단조로운 일상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를 통해, 혹은 필연처럼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자신과 타인의 이면을, 인생의 아이러니를 깨닫게 된다. 저마다 깨달음의 순간을 겪지만, 그 순간은 극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이미 때를 놓친 경우도 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나치는 경우도 있으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에피파니의 순간은 그들 인생에서도, 각 단편에서도 잔잔하지만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을 위트 있게 풍자하는 보니것의 특기는 이 작품들을 쓰던 1950년대부터 이미 탁월했다. 그는 돈밖에 모르고, 인간적 유대가 사라지고, 온갖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회와 사람들을 비유적이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런 그의 문제의식은 그가 작품 활동을 하는 내내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딘가 모자란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들은 분명 답답하고 못나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고, 언제나 뒤늦게 후회하는 모습이 우리와 무척이나 닮았다. 그들을 향한 웃음과 안타까움은 문득, 예기치 못한 순간 그들이 그랬듯이, 우리 자신을 향해 돌아온다. 그들의 모습이 더이상 낯설지 않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겪는 에피파니의 순간이 우리에게 재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게 뭔지, 언제부터 그것의 부재를 느끼지 못한 건지에 대해.



작가 커트 보네거트 소개


미국 최고의 풍자가이자 휴머니스트이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1922년 11월 11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독일계 이민자인 건축가 커트 보네거트 1세와 이디스 보네거트 사이에서 태어났고, 2007년 4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블랙유머의 대가 마크 트웨인의 계승자로, 리처드 브라우티건, 무라카미 하루키, 더글러스 애덤스 등 많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특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대가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독특한 유머감각을 키워온 보네거트는 청년기에 코넬 대학, 테네시 대학 등을 오가며 공학자와 작가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하다 1943년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징집되었다. 전선에서 낙오해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연합군이 사흘 밤낮으로 소이탄을 퍼부어 십삼만 명의 시민들이 몰살당했던 인류 최대의 학살극을 겪고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반전 작가로 거듭났다.


미국으로 돌아와 소방수, 영어교사, 자동차 영업사원 등을 전전하면서도 글쓰기를 계속했고, 1952년 첫 장편소설 『자동 피아노』를 출간했다. 이후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마더 나이트』 『고양이 요람』 『제5도살장』 『타이탄의 미녀』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제일버드』 『갈라파고스』 등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포스트모던한 소설과 풍자적 산문집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케보키언』 등을 발표해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보네거트는 1997년 『타임 퀘이크』 발표 이후 소설가로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2005년 생애 마지막으로 발표한 회고록 『나라 없는 사람』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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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