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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1295)]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책을 읽읍시다 (1295)]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전경린 저 | 문학동네 | 256| 13,000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섬세한 문장과 강렬한 묘사로 삶과 사랑의 양면성을 그려내는 작가 전경린의 신작 장편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20173월부터 7월까지 넉 달간 연재되었던 작품을 상당 부분 개고해 묶었다. 휘몰아치는 서사나 스펙터클한 사건 없이 한 인물의 유년과 성장, 그 반추를 함께하는 감정선을 따라가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나를 만들어가고 또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새로이 깨달을 수 있다. 전경린 작가의 이번 작품에서 그것은 기억과 관계의 힘, 그리고 그것이 이끈 운명이다. 작가는 이렇게 묻는 듯하다. 누구에게나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나를 라애라고 부른 사람은 세상에 세 사람 있었다.” 소설의 화자 나애의 과거를 지배하는 세 사람, 도이, , 종려할매다. 가족과 떨어져 병원집에서 살게 된 어린 시절 나애를 지켜준 사람들이기도 하다. 도이, 상과는 유치원 시절, 그들 사이에 문자도 없던 시절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진 뒤 아홉 살에 또다른 우연으로 만났다.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우린 거기서 함께했다고 그 시절을 술회하는 나애. 공고하고 비밀스럽고 무구하고 강렬한 유년의 추억이다. 종려할매는 병원집의 별채에 기거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인물. 나애의 버팀목이 되어 부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어머니의 자리를 채워주었다.

 

풍요보다는 결핍이, 꿈보다는 녹록치 않은 현실이 삶을 지배하던 1970년대의 풍경 속 그 추억은 반짝 빛나지만 시간은 흐르고 인생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뜻하지 않게 마주한 불운 모두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상은 폭력을 쓰는 세계로, 도이는 폭력을 당하는 세계로 멀어져갔다. 종려할매와는 작별 인사도 못한 채 헤어져버렸다. 끝내 상은 젊은 나이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도이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외려 비로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10년대를 사는 현재의 나애에게는 강과 희도가 있다. 십 년을 안정적으로 만나온 강과는 강의 옛 연인 허윤주가 찾아오며 기묘한 삼각관계를 이어가다가나애는 강과 허윤주 사이의 아이의 대모가 되었다결별하였다. 희도와는 삼 년을 임시 동거인처럼 만났다. 나애와 희도는 많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했지만 둘 사이에는 어느새 최초의 간격으로 돌아가는 탄성이 있었다.”(10) 그런 희도와 나애는 결국 서로를 떠나보내려 하는데.

 

감수성의 작가전경린은 내면 깊은 곳의 감정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 자라는지, 변하는지, 소멸해가는지, 그 감정의 일생을 씀으로써 인간의 가장 여리고 섬세한 특질을 애틋하게 부각한다. 그리고 그 감정이 이끈, 누군가의 삶을 지배하게 된 운명으로 우리를 조용히 안내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밀려오는 저마다의 기억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소중했던 이름들, 나를 소중히 여겼던 이름들을 곱씹어볼 일이다. ‘너를 기억하는 힘으로라고 되뇌며 그 이름들로 이루어진 지금의 나를 새삼 돌이켜보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벅차오르는 묘한 감정에 휩싸일 터이다. 그것이 바로 위태롭고 공허한, 때때로 버거운 삶을 감싸안는 전경린식 위무이리라.

 

 

작가 전경린 소개


흔히 '귀기의 작가' '정념의 작가'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전경린은 이미지의 강렬함과 화려한 문장으로 기억된다. 서른 세 살. 아이와 피와 심지어 죽음조차 삶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느낀 작가는 허구가 아닌 삶의 실체를 갖고자 소설을 쓰기로 시작했다.

 

1993년 작가의 가족은 마산 옆 진양의 외딴 시골로 이사를 갔다. 꽤나 적적한 곳이었지만 여기서 전경린은 `뭔가가 밖으로 표출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3년 가까이 사람들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들어앉아 많은 글을 써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내면적 세계와 질서화 되고 체제화 된 바깥 세계 사이의 작용과 긴장과 요구 속에서 갈등하는 여성과 여성적인 삶이 문학적 관심사다.

 

작가의 본명은 안애금. 전혜린을 연상시키는 전경린이라는 이름은 옛날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 임시로 지었다. 당시 누가 `'이라는 화두를 주었고, 차례대로 `'`'을 추가해서 `전경린'이라는 이름을 완성시켰다. 작가도 물론 `전혜린'을 떠올렸다. 작가는 전혜린을 좋아한다. 그리고 전혜린뿐 아니라 나혜석, 윤심덕 더 올라가서 황진이까지 소위 강한 자의식 때문에 고통 받고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선각자적 여성을 좋아하고 흠모한다.

 

196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으며 경남대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KBS에서 음악담당 객원 PD와 방송 구성작가로 근무했다. 그 후 운동권이었던 남자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다 둘째를 낳은 후인 1993년부터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사막의 달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하였으며 1997염소를 모는 여자로 제29회 한국일보 문학상, 1997년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로 제2회 문학동네 소설상, 1998년 단편소설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으로 21세기 문학상, 2004년 단편소설 여름휴가로 대한민국소설문학상 대상, 2007년 단편소설천사는 여기 머문다로 제31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 바닷가 마지막 집, 물의 정거장,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열정의 습관,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황진이, 엄마의 집과 어른을 위한 동화 여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 붉은 리본, 나비등이 있다.

 

전경린의 베스트셀러인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2002년 변영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가정의 틀안에서 안주하던 한 여성이 내면에 지닌 혼란스런 욕구를 발견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나타나는 일탈과 매혹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천사는 여기 머문다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섬세한 문체와 절제된 기법을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삶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내면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 엄마의 집에서는 처녀의식을 가진 엄마들에게 미스 엔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아버지에게도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종속당하지 않는 미스 엔이 그녀의 소설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여성들의 욕망에 주목해 온 작가답게, 현실의 엄마가 놓인 지형을 넘어서는 대안적이고 이상적인 집의 전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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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