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1512)]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에르베 기베르 저 | 김현 해설 | 장소미 역 | 알마 | 296쪽 | 15,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사진 칼럼니스트인 에르베 기베르(1955~1991)가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쓴 자전적 소설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불분명한 이 기록은 1988년부터 시작된다. 기억은 1981년으로 돌아간다. 에이즈, 즉 후천성면역결핍증이 아직 소문만 무성할 뿐 그 실체를 아는 이가 많지 않던 시기다. 에르베 기베르는 장차 자신을 죽음의 좁고 가는 고통의 길로 인도할 이 병에 대해 처음 듣는 장면을 반추한다. 그 기억 속엔 ‘뮈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기베르의 옛 연인, 미셸 푸코가 있다. 에이즈가 ‘동성애자들이 걸리는 암’이라는 이야기에 뮈질은 폭소를 터뜨린다. 이 치명적인 병에 대해 마약을 코로 흡입하다 갑자기 중단하면 감염된다거나 냉전 중이던 미국 또는 소련이 개발한 세균병기라는 말들이 나돌던 때였다.
뮈질은 1984년, 에이즈에 의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소설 속 기베르는 옛 연인이자 오랜 친구의 죽음으로 비로소 실재의 외피를 두른 공포와 대면하게 된다. 뮈질과 “공통적인 타나토스의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내 마음을 무너뜨리는 공포가 기베르와 그의 주변인들 사이에 만연해진다. 땅이 꺼지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 그들이 딛고 선 땅에서 연거푸 이어지며 그들의 근간을 흔드는 두려움의 여진이 에이즈, 곧 죽음이라는 불행으로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방탕에서 비롯된 죽을병으로부터의 도피와 체념이 거듭되는 예민한 우울의 날들이 이어지고, 그러다 마침내 확진 판정을 받고부터는 기나긴 죽음의 유예기간이 시작된다. 줄곧 죽음에 경도되었다가 진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자 오직 더욱 깊어진 죽음과의 친밀감만이 필요해진 기베르는 “세상 무엇보다 고귀하고 혐오스러운 공포와 갈망”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는 “에이즈의 잔혹함에서 감미롭고 황홀한 무언가를 보았다”고 고백한다. 작품 속에서 ‘마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배우 이자벨 아자니는 인터뷰에서 오랜 친구 에르베 기베르에 대해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환상의 세계에 잠식당했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그 상상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는 다만 건강한 존재일 뿐인 것에 지루해했다”며 “그는 늙고 싶지 않아 했다”는 말로 기베르가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를 증언한다.
이처럼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에서 에르베 기베르는 자신의 입체적인 내면을 혼란스러운 서사 속에 투영해 적나라한 나체를 드러내 보일 뿐만 아니라, 가명으로 쓰인 주변 인물들의 온통 모순된 사생활까지 누출하면서 거침없는 망설임으로 부정(否定)의 서사시를 써 내려간다.
에르베 기베르로 하여금 이 “수치 또는 파렴치”의 기록을 가능케 한 것은 배신이다. 이 작품의 주요한 주제를 꼽으라면 ‘배신’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1981년의 장면으로 돌아간다. 에이즈에 대한 소식을 기베르에게 처음 전해준 빌이라는 이가 있다. 빌은 대형 백신 연구소의 소장으로, “동시대를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발견에 한 발을 담글 수 있었”던 그는 한편으론 에이즈 백신의 개발을 자신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줄 수단으로 보는 것을 숨기려 들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작품 내에서 가장 제 욕망에 충실하여 그것에 추동되는 면모를 보이는 빌은 어쩌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이인 동시에 그 삶을 살아내기 위한 수단을 비열하리만치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일 것이다. 사형선고를 확신하며 즐거워하다가도 절망하고 그러다 또다시 죽음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순간을 기다리던 기베르들에게 그는 치유라는 이름의 희망을 던져준다.
제목에 중의적으로 쓰인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가 빌만은 뜻하는 것은 아닐 게다.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소문을 공개적으로 부정함으로써 그녀와 공통의 운명으로 결속돼 있다 믿었던 에르베 기베르의 환상을 무참히 깨부순 마린, 뮈질이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진실”을 잔인하게 폭로하는가 하면 스스로 죽음을 갈망했으나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애썼던 기베르 자신 모두를 배신의 주인으로서 아우르는 것일 테다.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도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진실인가 허구인가? 이에 대해 작품의 해설을 쓴 시인 김현은 “‘진실의 완성’은 허구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허구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완성으로 완성된 이 책을 마침내 완결하는 독서 행위란 아마도 에르베 기베르에게 친구로서 화답하는 일일 것이다. 그에 관한 회고가 아니라 내가 구하지 못한 죽음에 대한 회고로. 에르베 기베르는 자신이 발췌하여 제시한 삶의 부분을 통해 결국에는 읽는 이 스스로가 어떤 삶의 조각을 찾아내길, 기적 같은 우연을 실제로 완성하길 요구한다. 마치 그로써 자기 죽음을, 예술을 망각이 아니라 영원의 영역에 소속시키길 바라듯이.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욕망은 ‘계속해서 살아남기’다. 그런 의미에서 ‘질병’에 관한 에르베 기베르의 이러한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질병은 ‘예술’이다.
작가 에르베 기베르 소개
작가이자 사진가와 기자로 활동한 에르베 기베르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기는 파리에서 보내고 라로셸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극단 활동을 했다. 1973년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영화 학교에 지원해 탈락하지만 여러 잡지에 영화 칼럼을 발표한다. 이후 그는 사진과 언론 분야로 관심 영역을 넓히고 1978년부터 약 7년간 일간지 ‘르몽드’에서 사진 및 영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한다.
파트리스 셰로와 함께 공동 집필한 영화 시나리오 ‘상처받은 남자’로 1984년 세자르 영화제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한다. 1987년에 에르베 기베르는 젊은 예술가 지원 협회의 후원으로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 메디치 빌라에 2년간 체류한다. 1989년에 발표한 소설 『익명』은 메디치 빌라에서의 체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동성애자였던 에르베 기베르는 1990년에 발표한 소설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를 통해서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밝힌다. 이 소설은 『연민의 기록l』 『빨간 모자를 쓴 남자』와 함께 3부작을 이루며, 에이즈의 진행 과정에 따른 그의 일상과 신체 변화를 묘사하면서 자신의 투병 생활을 보여준다. 에이즈에 걸려 변화하는 자신의 신체를 촬영한 ‘수치 또는 파렴치’는 그의 사망 몇 주 전에 완성되었고, 그가 사망한 후, 1992년 1월 30일에 TV에 방영되었다. 그의 친구 티에리 주노, 미셸 푸코, 뱅상은 그의 삶과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 사진에 관한 시론, 사진집 등 다양한 형태를 띠는 그의 작품에서 자전적 요소들은 핵심적이라 할 수 있다.
에르베 기베르는 장 주네, 롤랑 바르트,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토마스 베른하르트 등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선전용 죽음』 『쉬잔과 루이즈』 『개들』 『나의 부모님』 『두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 『뱅상에게 미쳐서』 『익명』 『연민의 기록』 『빨간 모자를 쓴 남자』 『천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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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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