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1590)] 나와 타자들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저 | 이승희 역 | 민음사 | 308쪽 | 16,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2018년 하노버 철학도서상을 수상하고 스티븐 핑커, 레비츠키·지블렛과 나란히 ‘미래의 책’ 10선에 선정된 이졸데 카림의 화제작 『나와 타자들』. 트럼프의 미국, 마크롱의 프랑스, ‘브렉시트’의 영국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타자 혐오라는 현상의 배경인 다원화 과정을 추적해 오늘날 주체와 정치적 욕망에 대한 극히 날카로운 분석을 전개한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다문화’가 욕으로 쓰이며 ‘여성 혐오’를 둘러싼 분쟁이 지속되는 한국 사회에 때맞춰 도착한 예리하고 지적인 정치철학 에세이.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에서 ‘타자’와 ‘변화’를 축으로 새로운 논의를 전개한다. 현재의 변화를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전의 과거와 비교해야 한다. ‘상상된 공동체’인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 유명한 개념에서 방점은 ‘상상’에 있다.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상상’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민족이 단지 허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족은 허구의 개념인데도 우리를 현실적으로 규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개인들은 그냥 여성이기보다 한국 여성이고, 독일 남성이거나 팔레스타인 남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민족 규정은 불과 지난 20~30년 사이에 침식되었다.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에 동질성을 제공한 민족이 침식되면서, 동질 사회가 천천히 사라졌다. 즉 다원화 사회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변화의 본질이다.
이졸데 카림이 ‘타자’를 말할 때, 이는 관용이나 환대라는 윤리학적 개념을 또다시 역설하는 것이 아니며, 자아와 타자를 둘러싼 기나긴 형이상학을 재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카림은 타자성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시내 어디에나 있는 케밥집, TV를 틀면 등장하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마트 계산대에서 마주치는 외국인 노동자에서 본다. 현재 우리는 길에서, 매체에서 ‘이방인’을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다. 이 이방인들은 ‘그들은 누구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다시 말해 나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다.
『나와 타자들』은 정체성을 둘러싼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개인주의의 층위를 역사적으로 구분한다. 첫째, 19세기 국민국가가 형성될 때 기존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동등한 개인들이 처음 출현했다. 이것이 1세대 개인주의다. 둘째, 1960년대에 와서 정당과 같은 소속을 통한 운동이 각자의 정체성을 통한 개인의 운동으로 분화된다. ‘정체성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2세대 개인주의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지금의 다원화 사회에서 대두한 3세대 개인주의다. 1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다른 존재로 변화했고 2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주장했다면 오늘날 주체는 ‘감소’된다. 다문화 속에서 ‘당연한’ 문화가 사라지며 정상성을 규정했던 남성, 민족, 이성애자 주체가 헤게모니를 잃는다.
2000년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반유대주의적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시위에서 ‘민주적 공세(Demokratische Offensive)’라는 운동을 조직했다. 알튀세르를 연구하고 지젝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한 이졸데 카림은 물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 질문이 성급하게 해답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로 인해 버락 오바마에서 버니 샌더스, 마르틴 슐츠, 에마뉘엘 마크롱 등의 정치인을 반복해서 ‘해결사’로 불러낸다는 것을 지적한다. 저자가 내놓는 것은 다른 답이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에는 ‘만남 구역’이라는 교통규약이 있다. 만남 구역에서 자동차는 20킬로미터 속도로 다닐 수 있으며 보행자의 안전이 우선시된다. 이졸데 카림은 이 만남 구역을 다원 사회의 개인들이 공존하기 위한 개념으로 가져온다. 아무런 권위도 개입하지 않고, 오직 구성원들이 스스로 주의해서 움직이는 공간. 이는 타자에 대한 적대를 온라인상으로 또는 머릿속으로 양산시키는 지금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오프라인의’ 공적 공간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예컨대 대북 정책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북한의 인민이 제공할 잠재적인 노동력 또는 잠재적인 위협에 대한 이야기만이 오가는 가운데, 남북한의 개인이 각자 자기 길을 가는 동시에 스치며 만날 수 있는 실제 공간이 있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국경이 희미해지는 오늘날, 장벽을 쌓아 올려 변화를 애써 거부하는 것과 정반대에서 온 저자의 제안은 우리의 미래에 관하여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 이졸데 카림 소개
오스트리아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1959년 빈에서 태어나 빈과 베를린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빈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으며 2007년부터 브루노 크라이스키 포럼에서 과학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타츠(taz)’, ‘비너 차이퉁(Wiener Zeitung)’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2000년 오스트리아에서 중도 우파인 국민당과 극우 정당인 자유당의 연립 정부가 들어서자 ‘민주적 공세(Demokratische Offensive)’를 조직해 파시스트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새 정부에 반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 가운데 카림이 이끈 빈의 헬덴 광장 집회에는 10만여 명이 참여했다.
저서로 『알튀세르 효과: 이데올로기 이론의 구상』(2002) 등이 있으며 슬라보예 지젝의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정신 분석과 독일 관념론 철학』(공역)을 번역하고 『디아스포라라는 삶의 모델』을 엮었다. 2006년 빈 시 저널리스트상을, 2018년 『나와 타자들』로 하노버 철학 연구재단에서 수여하는 철학도서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같은 해 ‘미래의 책 10선’(《프로추쿤프트(Prozukunft)》)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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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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