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2083)]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천희란 저 | 문학동네 | 308쪽 | 14,5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삶과 죽음, 예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여성의 시선에서 깊이 있게 천착해온 천희란의 두번째 소설집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소설은 유려한 문장과 절묘한 내러티브의 솜씨가 한껏 발휘되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불신으로 고통받았던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천희란식 응답이 여기 도착했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은 세계 최초의 여성 뱀파이어 ‘카르밀라’를 그린 소설 『카르밀라Carmilla』를 현재의 시각에서 다시 쓴 작품이다. 갈 곳 없는 여성들의 안식처 ‘카밀라 수녀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고딕 소설은 ‘카르밀라’(여성·퀴어·괴물)의 처형을 통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는 원작의 고루한 결말을 전복한다. 어머니에게서 끊임없는 감시와 착취를 당해온 딸 라우라가 어떻게 “가부장으로부터 고통받는 불쌍한 아내/어머니의 운명”(해설, 294쪽)에서 벗어나는지를 놀라운 반전으로 보여주는 이 흡인력 있는 작품은 새로운 여성상을 발견해내는 여성 서사이다.
「피아노 룸」이 역사에서,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지워져왔는지를 보여준다면, 표제작인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는 과거를 딛고 현재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야심찬 여성 서사이다. 주인공 ‘나’는 한때 스무 살 많은 남자를 사랑했다. ‘나’는 그러한 과거의 자신을 ‘그녀’라는 3인칭으로 호명하면서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남자와의 관계를 복기해나간다. 이러한 형식은 만남과 헤어짐을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자신을 정신적으로 착취함으로써 감정의 극단을 오가게 했던 남자의 가스라이팅 방식과 그 자체로 반대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과거의 자신을 어리석었다고 단정하지 않고 그 남자를 사랑했던 마음의 진실함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 자기 확신은 “고통에 끝이 있다는 희망”(해설, 289쪽)과 함께 감동적인 여운을 전한다.
앞선 소설들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여성의 안간힘과 의지를 보여주었다면,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눈 내린 산장 주변에서 낯선 남성으로부터 반복적으로 위협을 느끼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살인자의 관」, 익숙한 일상을 의심하고 잃어버린 것을 찾는 와중에 또다른 ‘나’의 목소리의 틈입을 겪는 「잃어버린 것」은 문학적 실험을 통해 자신과 타자를 무대로 세우는 도정의 순간을 그린 듯하다.
「천진한 결별」은 사십 주년 결혼기념일에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구받는 노인 남성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 꽤 괜찮은 남편이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 깊은 데에서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여자로 인식해왔다. 아내 또한 그것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오랜 시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비밀, 그리고 그 비밀로부터 비롯된 고요한 파국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한편, 「기울어진 마음」은 자식처럼 기른 조카 ‘기호’의 여자친구 ‘혜원’의 혼전 임신 소식을 들은 ‘승은’의 이야기이다. 승은은 이제 이십대 초반밖에 되지 않은 혜원의 처지를 걱정하지만 뜻밖에 혜원이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하자 당혹감을 느낀다.
그 일은 오래전에 승은 자신이 임신중절을 선택했던 과거를 환기시키고, 혜원이 오래전의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해주기를, 그럼으로써 과거의 자신이 틀린 선택을 하지 않았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세대가 다른 두 여성이 지닌 입장 차이, 그 마음의 결을 세세하게 따라가는 이 소설은 여성 연대란 갈등 없이 매끈한 이해로 봉합되는 해피엔드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서로를 향한 정답 없는 질문을 괄호로 남겨둠으로써 양쪽의 선택을 그 자체로 존중해주는 이야기는 감동적인 여운을 남긴다.
작가 천희란 소개
201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영의 기원』, 경장편소설 『자동 피아노』가 있다. 2017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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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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