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2257)]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저 | 문학동네 | 352쪽 | 16,8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함께 성장해나가는 우리 세대의 소설가’를 갖는 드문 경험을 선사하며 동료 작가와 평론가, 독자 모두에게 특별한 이름으로 자리매김한 최은영의 세번째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데 특출한 감각을 발휘하는 최은영의 소설은 특히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과 부서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더 정확히는 무엇이 관계를 어그러뜨렸는지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데 능하다. 이번 소설집의 특징 중 하나는 그러한 관계의 양상을 사회적 문제와의 연관 속에서 헤아린다는 점이다.
이효석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일 년」은 화자인 ‘지수’가 3년 차 사원이었을 때 계약직 인턴으로 입사한 동갑내기 ‘다희’와 함께 보낸 1년의 시간을 따라간다. 당시 지수는 풍력발전소 개소식을 앞두고 매일 공사 현장에 나가 상황을 점검하는 일을 맡고 있었고, 다희는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지수의 어시스턴트로 근무를 시작한 참이었다.
정규직 사원과 계약직 인턴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함께 카풀을 하며 공사장을 오가는 동안 어디서도 한 적 없는 진실된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를 통해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123쪽)이 있었지만, 두 사람의 다른 처지는 예상치 못한 순간 관계에 균열을 내고 둘은 서로에게 솔직해지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만다. 그러나 소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을 마련해놓는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집중해 그리는 것도 그런 복잡한 어긋남과 화해의 과정이다. 은행에서 일하다가 뒤늦게 대학교 영문과에 편입한 스물일곱 살의 ‘희원’은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고 한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말하는”(10쪽) 젊은 강사인 ‘그녀’에게 매료된다.
희원은 지적인 자극을 주는 그녀의 수업을 통해 자신의 글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는 ‘안전한 글쓰기’가 아니었는지 깊이 되돌아보게 되고, 조금 더 진지하고 용기 있게 글쓰기에 다가가게 된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하는 자신에게 “공부는 대학원 아닌 곳에서도 할 수 있는 거, 희원씨도 알죠”(37쪽)라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대답에 희원은 상처를 받고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뱉어버린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는지 희원이 어림해보게 되는 것은, 시간이 흘러 자신이 그녀와 마찬가지로 젊은 강사가 되고 나서이다.
한편 「일 년」이 관계의 변화 위에 비정규직 문제를 겹쳐놓는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용산’이라는 공간을 부각시킨다. 소설은 희원과 그녀를 공통의 기억으로 가깝게 묶어주는 공간이자 정부의 과잉 진압으로 참사가 일어난 장소인 용산을 글쓰기의 바탕으로 환기함으로써 글을 쓰는 일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해나간다.
「몫」 역시 관계와 사회, 글쓰기라는 이번 소설집의 핵심 키워드가 집약돼 있는 작품으로, 교지 편집부 활동을 함께하며 가까워진 세 인물이 글쓰기를 통해 경험하는 성취와 보람, 한계를 강렬하게 그려낸다.
같은 여성이라는 조건만으로 연대나 화해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음을 인정하고 여성문제의 복잡함을 살피는 「몫」의 문제의식은 「답신」에서도 이어진다. 수록작 가운데 가장 온도가 높은 이 소설은 ‘나’가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언니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왜 언니가 아닌 조카에게 편지를 쓰는 걸까. ‘나’는 왜 더는 언니와 조카를 만날 수 없게 된 걸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소설을 읽어내려가면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보일 만큼 완강한 폭력이다.
후반부에 나란히 배치된 세 편의 소설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흔히 ‘정상가족’이라 여겨지는 것과는 다른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준 오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동생의 이야기인 「파종」은 삶에 대한 오빠의 태도와 그가 남긴 사랑을 은유하는 공간인 ‘텃밭’을 배경으로 남매가 나눈 마음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이모에게」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나’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이모를 떠올리며 써내려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감정적으로 인색하고 엄격한 이모를 견딜 수 없어하며 자신에게 깊이 새겨진 그 흔적을 부정하려 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아껴준 이모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때문에 ‘나’가 “나는 이모를 판단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파종」이 남매를, 「이모에게」가 이모와 조카를 다룬다면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가장 복잡하면서 어려운 모녀 관계를 긴 호흡으로 살핀다. 육십대 여성인 ‘기남’은 홍콩에 살고 있는 작은딸 ‘우경’을 만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난다.
마이클의 말에 기남이 느끼는 ‘따뜻한 통증’은 최은영의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 안에 퍼져나가는 감정과도 같다. 상처가 정확하게 건드려질 때, 잘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 그래서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예감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과 상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관계 안에서, 사회 안에서 무엇과도 무관한 채 서 있을 수 없는 우리의 존재. 그간 빛나는 작품들을 선보여온 최은영이 자신의 글쓰기를 끊임없이 점검하며 이번 소설집에 또렷이 새겨넣은 것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작가 최은영 소개
삼색 고양이의 날에 태어나 삼색 고양이와 고등어 고양이와 함께 사는 소설가. 타고난 집순이지만 매일 장기간의 세계 일주를 꿈꾼다. 여행, 글쓰기, 고양이, 바다, 친구, 잠을 좋아한다. 콤플렉스와 약점이라고 여겼던 것들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1984년 경기 광명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장편소설 『밝은 밤』이 있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이해조소설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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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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