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2261)]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황모과 저 | 래빗홀 | 272쪽 | 15,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인 2023년, SF 소설가 황모과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타임슬립 역사소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작가는 일본에 체류하며 유가족 및 증언 수집가, 연구자 등을 인터뷰했고, 과거 학살 현장 및 추모비 등을 면밀히 취재하여 당시 정황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이 소설은 재난의 공포가 불러온 비틀린 분노와 평범한 악의 민낯을 강렬하게 그려내며, 살인에 대한 처벌도 죄책감도 부여하지 않은 시스템적 학살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식민지 이주민과 사회주의자, 부락민, 장애인 등 은폐되고 왜곡되어온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고자 애쓴다.
그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일본 수도권 어딘가, 민호와 다카야는 나란히 언덕을 오르며 똑같은 말을 정반대 입장에서 떠올렸다. 검붉은 노을이 핏물처럼 언덕 위에 내려앉았다. 민호와 나란히 걷던 다카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검붉은 태양을 올려다봤다. 뜨기 시작하는 해인지 저물고 있는 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너무 오래 이곳에 머물렀다. 이제는 끝내고 싶었다. 끝나지 않는 비극을 반복해 원점에서 마주하는 일은 그만해야 했다. 적어도 자신과 같은 한 개인이 짊어질 수 있는 업보가 아니었다. (pp. 7~8)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타임슬립 기술을 사용하는 국제기구 인터내셔널 싱크로놀로지(syncronology)는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직에서 인원을 선발해 과거로 조사단을 파견하고 있다. 왜곡된 자료 수집을 방지하고 균형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이번에도 싱크로놀로지는 두 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시기로 보낸다. 홀로코스트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 일하는 한국인 청년 민호와 우익재단에서 장학금을 받는 일본인 청년 다카야.
민호는 당시 식민지 노동자로서 많은 이를 구한 마달출과 김평세를 관찰해야 하고, 다카야는 말 더듬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낙후 지역에 약을 공급하고자 노력하다가 죽음을 맞은 약장수 미야와키 다쓰시를 관찰해야 한다.
이미 결정된 과거는 싱크놀러지의 기술로도 바뀔 수 없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민호는 자기 눈앞의 죽음을 지나치기 어려워하여 번번 위기를 맞는다.
당시 일본 간토(관동) 지역에서의 이 유례없는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극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비극을 탓하고 원망할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고, ‘우리 일본인’과 다른 ‘외부의 반역자[불령인(不逞人)]’가 타깃이 되었다. 주민자치조직들은 경찰과 정부의 독려를 받아 수많은 이를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일본 정부의 방해 속에서 당시 임시정부가 조사해 독립신문에 발표한 희생자 규모는 6,661명이지만, 행정 기록의 은폐 증거들도 속속 제시되며 정확한 희생자의 숫자 마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소설 속에서는 달출과 평세 같은 조선인를 비롯해 중국 출신의 노동자가 정치적 테러분자로 몰려 영문도 모른 채 단체로 처형되고,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 또한 이 기회를 맞아 제거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작가는 민족적 관점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본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천대받던 부락민과 장애인, 여성 또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과정을 보여주며 “여러 배경을 고려하고 계산해서 타깃 대상을 조율했겠지만 실은 약자이기 때문에 선별되어 특정된 것”(황모과, 〈취재 기록, 기억, 노트〉)임을 지적한다.
더불어 군사적 편의를 위해 함부로 이용되고 죽임을 당한 동물들과 상황을 고스란히 목격한 어린이의 존재를 병행해 묘사하며 이 학살의 의미를 기존의 민족적 관점 이상으로 확장한다.
이 소설은 날짜로는 사흘의 시간을 다루지만, 과거를 반복 체험하는 인물들의 눈으로 재난의 풍경과 비극적 참상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역사학이나 사회학이 아닌 문학으로, 사실보다 더 절실한 진실을 담아내는 이야기로, 1923년 스러져간 많은 생명이 제 목소리를 되찾길 기원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회적으로 외면받는 사람들이지만 다른 사람이 위험에 놓였을 때 서로 도우며 스스로를 구하는 이 당연하고 강한 연대를 확인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모아내어 견고한 침묵의 벽을 부수어낼 황모과의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이 소설을 통해 기나긴 은폐와 무관심 속에 흐려졌던 이 사건의 진실을 바로 보고 진정한 진상 규명과 치유에 이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작가 황모과 소개
일본에 이주해 만화가 스튜디오에서 제작 스태프로 일했고 만화 관련 통·번역 매니지먼트 일을 병행해 왔다. 창작 현장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생계를 위해 전직, IT 기업에서 6년 일하면서 AI 부서에서 IoT 제품의 기획 개발 현장도 엿봤다. 한국 SF를 읽으며 늦깎이 소설가를 꿈꾸게 되었고 다시 생활고를 각오하고 있다.
브릿G 추천작에 『삼호 마네킹』, 『남겨진 자들의 시간』, 『가족이 되는 길』이 선정됐다. 『모멘트 아케이드』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공모전에서 중·단편 대상을 수상했고, 동명의 수상집이 출간되었다.
안전가옥의 앤솔로지 『대스타』에 MBC 시네마틱 드라마 ‘SF8’의 원작 「증강 콩깍지」를, 『뉴 러브』에 「나의 새로운 바다로」를 수록했다. 소설집 『밤의 얼굴들』, 중편소설 『클락워크 도깨비』,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등을 출간했으며 2021년 SF어워드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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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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