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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549)] 통과비자



통과비자

저자
안나 제거스 지음
출판사
창비 | 2014-08-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망명문학의 정점 안나 제거스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2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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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읍시다 (549)] 통과비자

안나 제거스 저 | 이재황 역 | 창비 | 432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2차대전 반파시즘 망명문학의 상징이자 동독 최고의 작가 안나 제거스의 대표작 『통과비자』가 국내 초역됐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의 공산당원이었던 안나 제거스는 나치 치하에서 작품이 불태워지고 체포되는 등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다 가까스로 프랑스 마르세유로 탈출하면서 기나긴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마르세유에서 쓰기 시작해 멕시꼬로 건너간 뒤인 1944년에 에스빠냐어, 영어, 프랑스어로 먼저 출간됐다.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과 사건들이 제거스의 망명 체험과 거의 그대로 일치해 제거스의 ‘가장 개인적인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극심한 공포에 내몰린 망명자들이 몰려들어 마치 세계의 마지막 항구처럼 되어버린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파시즘의 공포와 허망한 희망, 도주의 권태에 사로잡힌 망명자들의 정신세계를 깊숙이 파고든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개인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시기의 경험과 정서가 매우 직접적으로 형상화돼 있어 자전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전기적인 사실과는 다른 요소들 역시 효과적으로 직조되면서 소설로서의 단단한 완결성을 획득한다.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허구를 잘 쌓아올린 망명문학의 걸작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하인리히 뵐은 이 소설을 “거의 완전무결”하며 “제거스가 쓴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은 바 있다.


작품의 배경인 1940년 무렵의 프랑스는 독일군이 파리를 침공하면서 남쪽으로 향하는 난민들이 줄을 잇던 시기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남부, 특히 유럽을 탈출할 마지막 항구로 여겨진 마르세유는 오직 떠나는 일에만 병적으로 집착하는 자들로 거대한 난민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망명자들은 임박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비자 발급을 둘러싸고 끝없이 이어지는 서류 절차 속에서 차츰 원래의 목적도 잊은 채 떠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직 통과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 통과 그 자체가 목적이자 이유인 ‘통과비자’이다. 소설에서는 이같은 맹목적이고 강박적인 탈출 열망을 ‘출국병’이라고 일컬으며, 떠나고 또 떠나는 일에, 그저 통과하는 일에 매달리게 되는 그들의 존재 형태를 ‘통과적인 삶’, 그 세계를 ‘통과세계’라고 규정한다.


소설의 주무대인 마르세유는 각종 서류를 얻으려고 모여든 자들이 영사관들과 관공서, 항구, 거리, 까페를 하릴없이 헤매는 아수라장, 이해할 수 없는 원칙들과 범접할 수 없는 관료체제의 미궁으로 묘사된다. 서류를 다 갖추고도 한순간의 촌극으로 죽음을 맞는 늙은 지휘자, ‘신원 보증용’으로 두마리 개를 끌고 다니는 중년 부인, 출국에 실패한 후 하루 종일 굴만 먹어치우는 여자 등 지옥 같은 세계를 떠도는 이름없는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반복되는 일들, 반복되는 대화들,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되풀이되며 일상세계의 견고함을 상실한 ‘무너져버린 삶’의 무의미성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뿌리를 상실한 채 탈출에만 매달리느라 서로를 배반하고 유대를 깨는 일들이 스스럼없이 반복되고, 그저 ‘통과’에 불과할 뿐인 절망적이고 공허한 세계가 거대한 덫처럼 모든 이들을 가두고 끌어들인다.


그러나 다른 세계 또한 있다. 빠져나가기만을 열망하는 ‘이 무너져버린 땅’에서도 여전히 ‘빵과 물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 배신이 특별할 것 없는 시대에도 다른 이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인간적 결합의 순간들이 있다. 화자의 수용소 동료인 ‘외다리’ 하인츠 이야기가 대표적인데, 탈주가 불가능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필사의 도주길에서도 그를 저버리는 않는 많은 이들 덕분에 끝내 살아남아 유럽을 무사히 떠난다.


혼돈과 권태 속에서 이 모두를 정처없이 부유하던 화자는 그림자와도 같은 여인 마리를 붙잡으려다 어느새 출국병자들의 행렬로 점점 빨려들어간다. 마침내 모든 것들이 그 끝을 보이던 순간, 화자는 불투명함으로 가득 찬 통과자들의 세계에 가려졌던 다른 ‘중요한 것’을 보게 된다. ‘머물기 위해’ 온 사람들의 도시, 평범한 삶이 지속되는 곳, 역사의 굴곡에도 제 삶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자들의 세계에 새롭게 눈뜨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결말에 이르러 부조리한 세계의 절망적 상황과 죽음의 분위기가 전환점을 맞이하며 다시한번 희망도 위험도 받아들이리라는 낙관적 비전을 제시한다. 여기서 ‘나’를 통해 드러나는 이 세계에 대한 낙관주의적 인식은 무작정한 당위가 아니라, 연대성과 평범한 삶의 세계를 발견하기까지 덧없는 통과의 세계를 거친 뒤에야 체득할 수 있는 필연적인 귀결로서 나타난다.


이 작품이 제시하는 낙관주의는 2차대전 시기의 망명체험과 반파시즘을 다룬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훨씬 사소하고 비영웅적이다. 작가는 승리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나 당위로서의 희망을 외치지 않고, 역사의 질곡에도 담담하고 끈질기게, 함께하는 삶을 무너뜨리지 않고, 태곳적부터 늘 그렇게 이어져온 사람들의 세계에 다시한번, 기대를 걸며 패배 뒤에 고개를 드는 낙관을 역설한다.



작가 안나 제거스 소개


동독 최고의 작가이자 2차대전 시기 반파시즘 망명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1900년 독일 마인츠에서 미술품상을 하는 유대인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나 정통 유대교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헝가리 출신 사회주의자인 라슬로 라드바니와 1925년에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다.


본명은 네티 라일링, 제거스라는 필명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에게서 따왔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쾰른 대학에서 미술사, 역사, 중국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27년 「그루베취」를 신문에 게재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첫 출간작인 중편 『싼따바르바라 마을 어부들의 봉기』로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하며 주목받는다. 같은 시기 독일공산당 및 프롤레따리아혁명작가동맹에 가입하고, 유대인 지식인이자 공산당원, 반전주의자,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한다.


193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뒤 프랑스로 망명하는데, 이때 시작된 망명 생활은 벨기에, 스위스, 미국, 멕시꼬 등으로 이어지며 14년간 지속된다. 망명 중에 남편이 수용소에 갇히고 어머니가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는 등 개인적 곡절을 겪으면서도 반파시스트로서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다.


『제7의 십자가』 『통과비자』 『젊은 자는 영원히 젊다』 등 개인적, 역사적 위기를 생생하게 형상화낸 작품들로 망명문학의 한 정점을 이루며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독일로 돌아온 1947년에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으며, 동독 최고의 작가로 각종 국가훈장 및 문학상을 받았다. 1983년 베를린에서 사망, 도로테엔슈타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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