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561)] 왕비의 하루
이한우 저 | 김영사 | 404쪽 | 15,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유리 천장’이라는 용어가 있다.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사회 내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하는 말로 여성 진출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한다. 딸도 아들과 똑같이 유산을 상속받던 고려에 비해 이 땅에 가부장적 질서가 통치 이데올로기가 정착되어 남녀 차별이 극심했던 조선에서 유리 천장의 꼭대기에 있는 여성은 왕비였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이러한 여성 억압적 질서가 여성 왕비인 인수대비의 손에 의해 확립됐다는 것이다. ‘내훈’을 편찬하면서 여성들을 가부장적 질서 속에 묶어놓은 인수대비는 1476년 7월17일 아들 성종을 통해 과부의 재혼 금지 및 재가 자손이 벼슬길을 금하는 법제를 확립시킨다. 그리고 이 질서를 기반으로 성종의 왕권 강화를 꿈꿨던 며느리 윤씨를 살해한다.
이 책 『왕비의 하루』는 남성 권력 사회에서 생존해야 했던 여성 최고 권력가의 복심과 반전의 드라마를 하루라는 시간 안에 녹인 책이다.
‘닭 울음소리의 경계’로 시작하는 아침 기침에서 문안 인사와 수라상, 내명부와 외명부를 통솔하는 왕비의 일상적인 하루를 그린 프롤로그가 지나면 조선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하루 속에 놓인 왕비 세 명이 등장한다. 사필이 지워버린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여성 억압의 문화가 살해한 폐비 윤씨, 왕의 권력을 휘두른 유일한 여성 문정왕후가 그들이다.
태조 이성계의 정비였던 신덕왕후는 조선 최초의 국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안은 ‘고려사’에서 폐행(아첨하는 간신)으로 분류됐다. 신덕왕후가 이방원(태종)과의 차기 왕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조선 최초의 세자가 정해지던 1392년 8월20일 운명의 그날, 신덕왕후는 이방원을 받드는 조준과 배극렴 등 공신 세력에 피눈물로 맞서며 아들 방석을 세자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신권 정치를 꿈꾸는 정도전을 끌어들이며 이방원 세력과 날카롭게 한다. 그러나 마흔 무렵이던 1396년(태조 5) 8월 신덕왕후는 세상을 떠났고, 정확히 2년 후인 태조 7년 8월26일 이방원은 거병해 신덕왕후의 아들들인 세자 이방석과 대군 이방번은 물론 정도전 일파를 깨끗이 제거한다. 그 후 조선은 이성계나 신덕왕후의 나라가 아닌 이방원의 나라가 된다. 적어도 신덕왕후가 생존해 있던 동안에는 이방원 쪽이 꼼짝도 하지 못했던 것을 볼 때 그녀의 정치력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2부에서는 차기 왕을 선택하는 권력인 대비의 탄생과 환국정치를 통해 외척을 단칼에 베어버린 절대군주 숙종의 이야기가 줄기를 이룬다. 세조비이자 예종의 어머니였던 정희왕후는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차기 왕으로 왕위 계승 서열 1위 제안대군을 제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잘산군을 선택한다. 잘산군이 우군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파워 대비 정희왕후와 공신 세력의 결탁은 수렴청정과 원상제를 기반으로 성종이 성년이 될 때까지 이어지고, 이후에는 인수대비가 정희왕후의 권력을 이어받아 여성 억압적인 조선을 확립한다.
이러한 대비의 상징성은 자의대비를 둘러싼 예송논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들과 며느리가 죽었을 경우 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가라는 단순한 문제에서 출발한 이 논쟁은 훗날 조선사의 물줄기를 바꿀 만큼 폭발력 있는 사안이 됐다.
원자와 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숙종은 국왕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대단했고 외척과 신하들이 왕권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한 서인 정권을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장희빈을 둘러싼 남인 정권으로 바꿔버린다. 또한 민암 등 남인 세력이 김춘택의 역모 사건을 빌미로 왕실을 공격하자 단숨에 장희빈을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서인인 인현왕후를 복위시킨다. 이러한 숙종의 카리스마는 원자까지 둔 장희빈이 결국 사약을 마시고 마지막 숙종비 인원왕후마저 친정의 당론을 버리고 숙종의 본심이었던 노론을 지지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3부는 왕실과 외척 간의 200년 전쟁 이야기다. 정조와의 악연으로 얽혔던 정순대왕대비가 권력을 장악한 후 왕실과 외척 세력은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다. 순조비 순원왕후는 그 유명한 안동 김문의 세상을 열였다. 이러한 외척들의 전횡에 지친 국왕 순조는 순조 27년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아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이었다. 숙종 이후 최초의 적장자 세자였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위풍당당 그 자체였다. 외가인 안동 김문과의 일전을 불사했던 그는 외삼촌 병조판서 김유근을 의금부에 가두고 외가의 핵심 김교근을 이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
또한 처가 풍양 조씨 가문을 대항마로 내세우면서 한편으로는 개혁 성향이 강하고 청렴한 인물들을 무서운 속도로 발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가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로 급서한다. 외가에 의한 암살설이 제기될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다시 한 번 안동 김문의 세상이 찾아왔다. 철종이 죽음을 맞은 후 그동안 절치부심해왔던 풍양 조씨 조대비는 차기 왕으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을 선택한다. 외척에 밀린 다른 외척과 몰락한 왕실 후손의 결탁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천하도 여걸 며느리 명성황후에 의해 끝장이 나고 명성황후는 현직 왕비로서는 유일하게 정권을 장악한 여성으로 역사에 남는다.
작가 이한우 소개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및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뉴스위크’ ‘문화일보’를 거쳐 1994년 ‘조선일보’로 옮겼다. 2002~2003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후 문화부 기자로 학술과 출판 관련 기사를 썼으며, 지금은 조선일보 문화부장으로 있다.
오랫동안 조선 군주의 리더십 연구에 몰두해 온 그는, 인문학적 깊이와 감각적 필치를 바탕으로 ‘이한우의 군주열전’ 시리즈를 펴냈으며, 그 첫 책으로 2005년 『태종 : 조선의 길을 열다』를 출간했다.
『태종』은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의 뛰어난 업적과 열정과 냉정을 동시에 지닌 현실 정치가이자 군주로서의 태종의 다양한 모습을 재조명한 책으로, 리더십 부재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에게 현실정치의 리더십에 대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또한 그는 7년 넘게 이뤄진 『조선왕조실록』의 연구, 분석을 통해 조선 500년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기술한 『왜 조선은 정도전을 죽였는가』를 출간하여 우리가 잘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 속 56가지 사건을 재조명하고, 이런 사건들이 현실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깊이 있는 필치로 분석해 냈다. 또 조선당쟁의 숨은 실력자인 구봉 송익필의 생애를 생생하게 복원하는 한편 그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조선의 숨은 왕』은 당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외에도 초대 대통령의 행적을 좇은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와 사회비평서 『한국은 난민촌인가』 『아부의 즐거움』 등을 출간했다. 역서로는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역사의 의미』 『여성 철학자』 『폭력사회』『안전의 원칙』등 역사와 사회철학 분야를 아울러 20여 권이 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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