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569)] 비취록
조완선 지음 | 북폴리오 | 360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외규장각 도서의 비밀』로 ‘교양 문화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은 작가 조완선 신작 『비취록』이 나왔다. 이번 작품 역시 고문서와 역사에 대한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길어올린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과거 어떤 소설에서도 다룬적 없는 ‘예언서’가 그 주제다.
‘홍경래의 난’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해준 예언서이자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정감록』을 모티브로 삼은 이 책은 ‘홍경래의 난’ 실패 이후 1세기가 넘는 시간에 걸쳐 『도선비기』『무학비결』『남사고비기』 등의 예언서와 『지봉유설』『연려실기술』 등의 고문집을 두루 엮은 신비의 예언서가 존재한다는 가설로 탄생했다. 이 19세기의 예언이 어떻게 21세기의 현실에 영향을 미칠까?
『비취록』은 만 가지 선대의 비결을 담은 책이라는 부제를 가진 고문서로 외양이며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범상치 않은 책이다. ‘유려하고 힘찬 필체가 고서 안을 휘젓고 다니며’ 첫 장부터 ‘백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문장이 곳곳에’ 등장한다. 게다가 과거의 예언서와 고문집에 담긴 글귀에서 시작해 그 이상의 예언이 펼쳐지는데 1811년 홍경래의 난, 1910년의 경술국치, 1945년 대한독립, 1960년 4.19 혁명, 1980년 광주항쟁 등 모두 우리나라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다.
게다가 종이는 조선 사대부들이 책을 엮을 때 쓰던 장지(壯紙)로 당시 중국 선비들도 최고로 꼽는 것. 진품이 틀림없다. 대체로 위작으로 판명나는 예언서 분야에 이 책은 실로 진귀한 책이다.
책을 탐하거나 내용을 읽으면 목숨을 잃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데 이 책에 비밀스러움을 불어 넣으며 소설 전반의 긴장감을 견인한다. 그리고 책 속에 숨은 의미를 밝혀가는 과정은 마치 기호학과 미술 해설을 기반으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연상케 한다. 이들 소설이 뛰어난 미스터리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그 추론 과정이 대단히 흥미롭기 때문인데 『비취록』이 가진 강점 역시 여기에 있다. 비취록에 담긴 예언과 그 풀이 과정으로 등장하는 ‘파자법(破字法)’은 한자 문화권에서 널리 퍼져 있는 암호 해독 기술로 고문서와 예언서라는 낯선 소재의 매력을 밝히는데 기여한다.
명준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청양지세(靑羊之歲)’에서 ‘靑(청)’은 ‘乙(을)’을 의미하고 ‘羊(양)’은 ‘未(미)’를 뜻한다. 즉 ‘파란 양의 해’인 ‘을미(乙未)년’, 2015년을 지칭한다.
여기서 사건 해결의 주축이 되는 오 반장과 강 교수는 각자 나름의 동기로 이 사건에 깊이 빠져든다. 오 반장은 물론 수사를 목적으로 하지만 부인이 사이비 종교에 깊이 빠져 아들과 함께 가출했다는 가족 이력을 가지고 있다. 쌍백사가 수상한 종교 단체라는 인식이 들수록 그는 그곳의 혐의를 밝혀 처단하고 싶은 보상심리에 시달린다.
살인 사건을 해결해 범죄를 처단하고, 중요한 고문서를 지키고 연구하고자 한다는 대의 이면에 각자의 심리적인 요인이 뒤섞이면서 이야기는 한층 더 생동감을 가진다. 게다가 가족이 있되 함께 할 수 없는 동병상련의 상황을 가진 두 사람에게 중년의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한편 쌍백사의 주지인 ‘형암’은 예언서에 빠져 종단에서 내쳐진 파계승으로 예언을 받들어 ‘거사’를 주도한다. 언뜻 보기엔 비상식적인 몽상가로 사이비 종교의 교주 같기도 하지만 그의 이력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 거사의 실체가 밝혀질수록 그를 비난만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캐릭터의 입체성은 이야기의 재미를 한층 끌어올린다.
저자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예언서는 미래를 보는 눈”이며 그래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앞날을 대비하라는” 조언과 같다고 말한다. 또한 예언서는 불행에 빠진 현 사회의 열망을 담는다. 진인이 출현하여 혼탁한 이 세상을 뒤엎고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는 예언은 ‘홍경래의 난’이 있던 시절이나 일제 시대나 모두 통용되는 민중의 꿈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21세기는 어떨까? 초반부에 나오는 강명준 교수의 독백처럼 “예언서는 더 이상 21세기에 발붙을 곳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구체적인 정황은 달라도 여전히 민생은 시름에 잠겨 있고 이 세상은 부조리와 비상식적인 일들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예언서의 등장과 파급력이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작가 조완선 소개
인천에서 태어나 단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건국대, 단국대, 영남대, 관동대 등 전국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을 수상하며 끈끈한 ‘문청’ 시기를 보냈다.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소설 「반달곰은 없다」가 당선되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등단 이후 십여 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첫 장편인 『외규장각 도서의 비밀』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교양 문화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뒤이어 고려의 대보(大寶)인 초조대장경을 소재로 한 『천년을 훔치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비취록』은 『천년을 훔치다』 이후 삼 년 만에 발표하는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조선 후기의 예언서를 소설의 중심 기둥으로 삼아 우리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빠르고 경쾌한 문체와 치밀한 구성, 추리적인 기법과 역사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 소설은, <비취록>에 담겨 있는 예언의 세계를 21세기 가상공간으로 옮겨와 픽션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2백여 년간 베일에 가려진 <비취록>을 해독하고 추적해 가는 과정은 기존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역사 미스터리 소설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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