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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사랑을 주고받는데 미성숙한 사람들

이런 노래가 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맞다. 우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우린 사랑없인 살 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다.

 

사랑은 원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절대적으로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살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

서로 사랑을 나누게 하기 위해서다.

한문으로 사람 ‘인’은 ‘人’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맞대어 의지하는 모습이다.

혼자선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일게다.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서로 사랑을 주고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은 스스로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줄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땅이 스스로 곡물을 생산해낼 수 없고 반드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받아야만 곡물을 자라게 하고 생명활동을 할 수 있듯이 우리 인간도 사랑을 받아야만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 인간은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먼저 사랑을 받아야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럼 무슨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를 통해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일명 십자가의 사랑이다.

이 십자가의 사랑은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사랑은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 진가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이 십자가의 사랑을 거부할 경우 반드시 경험하게 될 어떤 것들이 있다.

우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과 그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내면적 황폐함과 절대적 공허감이 그것이다.

 

세계적인 수학자인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안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파스칼이 말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 마음은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첫 사랑의 상대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늘 마음에 허전함이 있다.

수많은 다른 이성을 만날지라도 그 허전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 채워져야할 우리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을 경우 인간은 하나님 외의 다른 것으로 채우려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채워지느냐. 아니다. 결코 그렇지 못하다.

왜 중독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아시는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지 못한 결과 때문이다.

이 말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해보시면 공감할 것이다. 필자가 그 증인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해 확증해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분명히 찾아온다. 공허함과 허무함 그리고 외로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이 엄청난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토록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병이 치유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결코 부러워하지 않는 자신의 변화된 삶에 놀라워하게 될 것을 말이다.

 

사람들이 왜 권력을 가지려 하는가.

왜 보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려 하는가.

왜 사람들의 인기를 열망하는가.

그런데 그렇게 소유하고 채운다해서 우리의 인생이 행복한가.

유명한 세계적 문인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라는 책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 인생이란 한마디로 허무하다는 것이다.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인 니이체 역시 인생이란 허무한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가 생산해낸 제품이 ‘허무주의’(니힐리즘)이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없는 인생이 바로 이렇다는 것이다.

혼돈이란 목적과 질서가 없는 인생이라는 의미이며, 공허란 글자 그대로 속이 비어버린 상태의 인생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없는,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우리 인간의 실존이라는 사실이다.

동의하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시 사랑얘기로 초점을 맞춰보자.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이래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고 보여진다.

사랑을 받고 자랐느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느냐.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과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분명 다를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당당함의 유무가 아닌가 싶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당당하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에 잡힐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데 익숙하기도 하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이성을 통해 사랑을 채우려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 문제는 상대방에게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거의 집착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힘들어진다.

사랑은 요구한다고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사랑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은 먼저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상대방에게 줄 사랑이 있느냐?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줄 수가 없다.

사랑은 거저 주는 것이지 내가 사랑을 주었으니까 당신도 나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마치 의무감을 지워서 사랑을 요구하려 드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 안하면 너희들은 그냥 안둘꺼다” 이런 식의 사랑을 하시지 않으셨다.

그냥 우릴 사랑하신다.

 

신약성경 로마서 5장 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 사랑은 당연하겠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 사랑을 나누어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그렇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거듭난 인생’, 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변화의 삶이다.

자신을 위해 살던 삶에서 타인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는 삶.

즉 자기 것을 움켜잡으려던 삶에서 움켜잡았던 그 손을 펴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 삶으로 변화되는 삶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을 나눌 때 더 풍성해진다는 사실이다.

줄수록 더 풍성해지는 사랑.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을 경험하노라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안다. 기쁨이 무엇인지 안다. 그리고 평강이 무엇인지 안다.

이론이 아니다. 실제다. 말이 필요치 않다.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나 놀란 나머지 이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어 도저히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사랑은 다시 말하지만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랑을 오해하거나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지 못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도 잘 나누지 못하고 또 우리 서로 간에도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자기중심적으로 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우린 사랑을 하는데도 미성숙하지만 사랑을 받는데도 미성숙한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사랑하게 되면 어색해 한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의 경우 특히 그렇다.

사랑을 받게 되면 내가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져 힘들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서로를 향한 배려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우리 모두가 성숙하지 못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린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있어서 자라가야 한다.

자라가는 과정 가운데 실수도 하고 오해도 생길 수 있다.

이럴 때 서로가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자세 역시 사랑을 주고받는 중요한 일이다.

특히 오랫동안 혼자 사는데 익숙한 사람일수록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많이 어색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자기만의 영역 안에 늘 머물려 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대개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온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기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나와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훈련하자.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를 이해하도록 해보자.

그렇게 되면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주고 받게될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 땅의 사람들은 외로운 존재다.

십자가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나누어 주어야 할 사랑이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랑만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나누어줄 수가 있다.

인간의 사랑은 엷다. 그 사랑엔 자신의 뭔가를 채우려는 숨겨진 동기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상처를 수반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사랑은 깊을수록 더 심각한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은 다르다.

근본적인 우리 마음의 병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권능이 있다.

우리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를 통해 흘러나가야 할 사랑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사랑밖엔 없다.

이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이 사랑을 나눌 때 이웃이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조국이 살고 열방이 산다.

청송감호소에서 이 사랑을 나누었었다. 그랬더니 그곳 사람들 중에 변화가 일어났다.

알콜중독자에게 이 사랑을 나누었었다. 그랬더니 역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다.

정신병원에서도 마찬가지의 일들이 일어났다.

필자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이것을 경험했다. 그러기에 감히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교과서에 배운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사실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을 열망하라.

그리고 이 사랑에 포로가 되어보라.

그러면 분명히 말하거니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행복해서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할 것이다.

우린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이미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여 그 사랑을 마음껏 경험하는 삶이 되어지길 진심으로 열망해마지 않는다. 

 

엄무환 칼럼니스트(weom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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