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스님들의 사태를 통해 한국종교전반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필요할 때

[시사타임즈 = 신수식] 2012년 현재 대한민국은 지난 60여 년을 통해 많은 변화와 함께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성공으로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성공국가 중 하나이며 개발도상국가들, 후진국가들이 자국의 국가발전모델로 삼는 대표적인 국가로서 이에 다수의 국민들은 나름대로 자부심까지 갖는다.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부족하고 개선이 필요하지만 필자 또한 그 동안 국민들의 희생으로 만들어낸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에 자부심을 갖는 국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최근에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스님들의 도박파문으로 국민들은 심한 충격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적대세력 간 치고 받는 폭로전이 전개되고 있다.

 

그동안 자주 스님들 간에 있었던 패싸움이 순간적으로 발생한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나 한국불교조계종의 현주소가 도박행위를 비롯하여 음주, 음행, 횡령, 은처(부인을 숨겨두는 행위) 등 상상을 초월하는 실태라니 충격 그 자체이다. 외국에 나가서 도박으로 몇 백억을 잃은 스님도 있고 조계종 고위층이 강남 룸살롱에서 소위 풀코스 음행을 하고 여승을 성폭행이라니…. 이번 사태를 통해 한국불교가 얼마나 썩었는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특히 종단 내에서 썩은 대상들을 징계하고 싶어도 징계할 주체들이 다 썩어버려 자정능력이 상실 된 상태라는 사실이다. 과거에 양심세력인 민중불교의 핵심이었지만 돈맛을 알고 큰절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보다 보니까 타락해버린 것이라고 한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문득 노무현 참여정부 때 외부이사도입제도인 사립학교법개정에 반대하며 스님들이 격렬하게 시위하던 그들의 모습에서 왜 그토록 반대했는지 그 목적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이번 사태로 조계종 집행부 간부 6명이 사퇴하고 조계종은 100일 동안 108배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로 썩을 대로 썩은 대한민국불교계를 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불자들과 우리 국민들이 믿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200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불교 신자라고 답한 사람은 1,000만 명이 넘는다. 기독교 개신교(810만 명)나 천주교(510만 명)를 크게 뛰어넘는 수치다.

 

물론 불교 신자들은 기독교 신자들처럼 열성적으로 절을 찾고 시주를 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심정적 불자가 많다. 그렇더라도 불교의 저변은 그만큼 두터운 것이다. 대한민국불교는 1700년 전 이 땅에 전파돼 가장 뿌리가 깊고 또 간화선(참선 수행법의 일종으로서 화두(話頭)를 사용하는 선법) 수행전통은 세계적으로 한국이 최고라고 말한다. 이런 불교계의 이번 충격적인 사태에서 보듯 문제를 뿌리뽑을 해결책은 없는 것인가. 그리고 있다면 뭘까. 스님들도 인간이기에 감정이 있어서 서로 다툼이 있을 수 있고 세속의 달콤한 유혹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나 핵심은 그 정도라 할 것이다.

 

불교사상을 보면 고타마 붓다는 당시의 철학자들이 논쟁하고 있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에 대한 논쟁은 실천적인 의의(意義)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세계는 상주(常住)한 것인가 혹은 무상(無常)한 것인가? 세계는 유한(有限)한 것인가 혹은 무한(無限)한 것인가? 신체영혼(靈魂)은 하나인가 혹은 별개의 것인가? 완전한 인격자인 여래는 죽은 뒤에 생존하는가 혹은 생존하지 않는 것인가? 등의 십사무기(14無記) 또는 십사사치기(14捨置記)의 형이상학적 질문들이 나왔을 때 이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열반, 즉 바른 깨달음(정각正覺)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천적으로 무익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불교의 실천적 인식이 최초로 당면한 문제는 인생의 (苦)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어디에 있거나 또 어떠한 것에 의지하더라도 고(苦)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고(苦)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고인 것은 그 모든 것이 무상(無常)한 것인 때문이다. 이 세상의 일체의 사물(事物)은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찰나(刹那)의 순간도 정지하는 일이 없다.(제행무상, 諸行無常) 그러므로 사람은 어느 것이건 ‘내 물건, 나의 소유(所有)이다'라고 집착해선 안 된다.

 

세인(世人)이 아트만(인간존재의 영원한 핵으로 죽은 뒤에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르는 여하한 원리(原理) 또는 기능도 실제는 아트만이 아니다. 또한 아트만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불교에서는 실체적 혹은 기능적인 나를 상정하려는 것에 반대하였으나 수없이 많은 (法, 다르마)을 인정하였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현실 존재로 하여금 현재 이와 같이 존재하게 하는 규정, 규범인 것이다.

 

우리들의 현실 존재 속에는 수많은 법이 작용하고 있고 거기서 우리들의 구체적인 현실존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법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세인(世人)은 물론 일반 철학자들도 이러한 이법(理法)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무엇인가 상주영원(常住永遠)한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고집한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번뇌가 생기고 그것에 고뇌(苦腦)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번뇌에는 탐욕(貪慾), 노기(怒氣), 미혹(迷惑)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것은 망집(妄執=渴愛)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이 이 망집에 번뇌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나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고(苦), 무상(無常), 비아(非我)의 이치를 깨달아 정당한 지혜를 완성하면 이 망집을 단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식을 얻으면 이미 그 무인가를 나(我)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욕구(慾求)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실현하여 진리의 인식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수행(修行)하는 데 노력하고 계율(戒律)을 엄수하여 선정(禪定)을 닦을 필요가 있다. 그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해탈(解脫)의 경지이며 이러한 경지를 불사(不死)라든가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열반이라는 말은 마치 바람이 타는 불을 불어 끈 경우와 같이 성하게 타오르는 번뇌의 화염(火焰)을 지혜에 의하여 불어 꺼서 고뇌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키며 거기에서는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경지(安樂境地)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다.

 

싯다르타는 이상과 같은 도리를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弟子), 신자(信者), 이교도(異敎徒, 外道)들에게 설교하였는데 설교의 강격(綱格)으로서 종합되고 요약된 것이 4제설(四諸說)이다. 그것은 다음 네 가지 종류의 진리를 가리킨다.

 

고제(苦諦):범부(凡夫)의 생존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

집제(集諦):범부의 여러 가지 고뇌는 결국 번뇌 특히 망집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진리

멸제(滅諦):망집을 완전히 소멸함에 따라 고(苦)를 소멸해 버린 열반이 해탈의 이상경(理想境)이라고 하는 진리

도제(道諦):이 고(苦)를 소멸로 인도하는 수도법은 '8정도(八正道)'에 불과하다고 하는 진리 등이다.

 

팔정도(八正道:또는 八聖道)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이른다. 또 연기(緣起)의 교설(敎說)은 우리들의 미혹된 생존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성립되어 있는 것인가를 분명히 하고 그와 동시에 그 근본조건을 소멸시킴으로 해서 우리들의 미혹된 생존도 소멸할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원시불교 성전(聖典) 중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연기설(緣起說)이 설명되고 있으나 어느 연기설이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로 번뇌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직시하라고 지적한다. 또한 고(苦)의 근본원인은 우리의 무명(無明) 혹은 무지(無知)에 있으므로 그 무명(無明)을 소멸시켜야만 우리들의 고(苦)도 소멸한다고 하는 논리를 공통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가장 발달된 형식의 연기설에서는 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取·有·生·愛·老死의 12단계를 제시한다.

 

불교가 가르치는 실천은 한 마디로 말해서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 즉 생활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올바른 도덕은 고금을 일관한 영원한 법으로 진실하게 노력하는 사람, 진실한 바라문이 될 수 있는 도를 사람들에게 교시(敎示)하는 자임을 표방하고 있다. 수행에 정려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재가(在家)의 애욕생활로부터 떠나 출가하여 독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조조(早朝)에 촌락이나 도시에서 탁발걸식(托鉢乞食)하여 얻은 얼마 만큼의 음식물로 만족하고 정오 이후에는 아무 것도 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의복은 항상 삼의(三衣)를 걸치는 것뿐이었다. 음식물이나 의복을 획득하여 저장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세속적인 직업에서 떠나고 점(占)·주술(呪術)·마법 등도 금지되어 있었다.

 

타인에 대한 태도로서는 타인을 존중하라, 타인을 경시(輕視)해서는 안 된다. 타인과 싸움해서는 안 된다.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에 대하여 자비(慈悲)를 베풀어 주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수행을 실천한 비구는 번뇌를 소멸해버려 근심에서 떠나고 마음은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현세도 내세(來世)도 원하지 않는다. 훼예포폄(毁譽褒貶)에 마음을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 심경은 청랭(淸冷)한 호수와 같이 그 정적의 경지를 즐겼다고 한다.

 

이번 불교스님들로 인해 발생한 사태가 단지 불교만의 사태고 문제라는 현실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등 요즘 우리 대한민국의 종교계는 종교가 원래 지니고 갖추어서 세상에 행해야 할 그 기능과 역할이라는 중요한 종교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연간 수 만 건에 이르는 세속적 범죄에 한국종교계가 노출되어 있으며 정교분리가 그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세력화까지 추구하는 등 급격하게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불교사태를 통해 대한민국의 종교계가 세상에서 본질적인 종교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정화가 범종교계와 국민들이 함께 동참하여 새로 태어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신수식 정치학박사(sss123kk@hanmail.net)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종합지 -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