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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타임즈 = 엄무환 목사]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집에서 자동차를 운전하여 약속 장소를 향해 가다가 우측 신호 깜박이를 켜고 끼어들기를 했다. 충분히 끼어들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뒤 차 운전사는 기분이 상했는지 “빵”하고 크랙션을 울려댔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마치 내가 무슨 대단히 잘못을 범한 죄인인양 느껴졌다. 그래서 평소 오가던 교통 루트대로 가던 길을 포기하고 핸들을 우측으로 돌려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은 좀 복잡한 길이었는지라 잘 이용하지 않는 길이었지만 한시라도 뒤 차 운전사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핸들을 우측으로 돌렸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길은 신호등도 많아 차량 운행을 더디게 만들었으며, 게다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도로 차선을 제대로 식별하여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노선 변경이 많은 도로여서 그러했다. 왕복 5차선의 도로 중 왼쪽 두 개 차선은 좌회전 도로이었고 우측 1차선은 우회전 도로였다. 난 직진 차선을 따라 가야했기에 중간 2차선과 3차선 도로를 따라 운전하여 갔다. 그런데 문제는 사거리를 지나선 우측 45도 방향의 길로 우회전을 해서 가야 했기에 2차선을 따라 가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거리를 지나게 될 경우 4차선 도로에서 4차선과 3차선은 직진 차선이요 2차선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과 연결되는 도로였고 1차선은 90도 각도로 꺾어지는 우측통행 차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잘 식별하지 못했던 난 3차선을 따라 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직진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대로 직진을 할 경우 약속 시간에 늦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할 수 없이 2차선으로 끼어들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측 길로 들어서는 순간, 교통경찰이 손을 들어 차를 세우라고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내 가슴이 덜컹거렸다.
교통경찰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신분증을 요구했다. 난 순순히 나의 신분증을 건넸다. 교통경찰은 차선위반으로 벌점 없이 3만 원짜리 범칙금을 부과하겠다며 딱지를 끊었다. 졸지에 생돈 3만원을 국가에 바치게 된 것이었다. 3만원이면 나흘 분 점심식사비다. 나에겐 거금인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할 경우 시간당 6천원으로 계산하면 5시간 동안 수고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가 교통법규를 위반했다는 사실이 심적으로 괴로웠다.
그동안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교통법규를 위반하여 교통범칙금을 국가에 바친 일이 적지 않았다. 나의 경우 교통범칙금을 내게 된 주된 이유는 속도위반이었다. 시속 60km로 가야 하는데 80km로 갔다든지 또는 시속 80km인 도로에서 100km로 주행한 탓으로 속도위반에 걸려 집으로 날아온 교통범칙금 용지를 받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내로부터 교통법규를 좀 잘 지키라는 훈계를 여러 번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교통법규를 잘 지키려고 매우 조심하여 운전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교통법규를 어기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도 차선위반으로 교통범칙금을 문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선지 3만 원짜리 교통범칙금을 물게 된 이번 사건이 나에게 준 마음의 생채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사건으로 부각되는 것이었다.
‘아 그때 끼어들기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늘 다니던 그 길로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설령 끼어들기를 했다 손치더라도 그냥 평소대로 운전해서 갈 것이지 왜 우측으로 핸들을 돌렸던가.’ 하는 아쉬움과 후회스러움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내 가슴속으로 밀려들어왔다. 평소에 다니던 그 길은 너무나 익숙하여 교통법규를 위반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 길은 2차선 도로로 교통경찰이 없을 뿐 아니라 교통법규를 위반할 이유도 없는 길이었다.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무리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난 다 둔 바둑을 복기하듯 이번 사건이 내게 준 메시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내 속에 숨겨진 나의 마음과 정신 상태가 보였다. 즉 이번 사건이 내 속에 묻혀 있었던, 그러나 나도 잘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마음과 정신 상태를 수면위로 드러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난 나를 향한 어떤 비난이나 손가락질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게 됐다. 특히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그것에 대해 책망이나 꾸중, 심지어 비난을 들을지라도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나를 바꾸도록 해야 함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난 오히려 이런 것들로부터 피하려는 아주 못된 성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회피할 경우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말처럼 더 큰 화를 초래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난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 무엇인지, 정직이 무엇인지가 깨달아졌다.
‘아 겸손이란 자기 죄를 인정하는 거구나. 정직도 마찬가지로 자기 죄를 인정하는 거구나. 난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도, 정직하지도 않은 참 교만하고 거짓된 사람이었구나.’
그러면서 다윗이 생각났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자신의 신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 다윗의 죄를 추궁하였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자기 죄를 지적하자 그대로 인정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12장에 이 내용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다윗이 비록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범했지만 그러나 다윗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요 정직한 사람이다.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다. 자기 죄를 신랄하게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의 준엄한 책망을 듣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다.”고 솔직하게 인정했으니 말이다. 이게 쉬운 일일까.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내 죄를 인정하는 것. 그때 하나님의 용서가 부어진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가 축복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나 보다.
난 끼어들기를 하여 뒤 차 운전사가 “빵”하고 크랙션 한번 눌렀는데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그만 도망치듯 우측 차선으로 핸들을 돌리는 바람에 결국 3만 원짜리 교통범칙금을 떼고 말았지 않았는가. 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나에게 쏟아질 무언의 비난을 면키 위해 행한 정직하지 못한 행위로 인해 빚어진 결과란... 참으로 부끄러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난 겸손하지도, 정직하지도 그리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실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난 나를 목회자라는 가면으로 위장하고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포장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 모습은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니다. 비겁하고 교만한 사람, 이것이 나의 실체요 참 모습이다. 그러므로 나의 인격이란 형편없는 수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부르셔서 당신의 종으로 삼으신 것일까. 도대체 왜?
찬송가 작사자가 지은 노래가 생각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아담이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밥 먹고 하는 일이란 오직 죄짓는 일밖에 없다. 심판받을 짓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말씀하고 있다.
죽음과 심판은 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인생 결론이요 운명이다. 이를 그 무엇으로 해결하겠는가. 아무리 학문이 출중한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법 없이도 살 정도로 도덕적 윤리적으로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일지라도 죽음의 문제, 심판의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세상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저 무수한 영웅호걸들과 세상의 모든 난제를 다 해결할 것 같이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지식자랑을 했던 수많은 철학자들, 그리고 대 재벌가들의 인생 결론이 무엇이었던가. 결국 죽음이 아니었던가. 왜 인간은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는가. 왜?
성경은 분명히 못을 박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렇다. 문제는 죄다. 그런데 자기 죄를 인정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난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날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됐다. 이 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죄에 대해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됐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6장9절의 말씀이 그것이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여기서 나란 예수님을 말한다. 그러니까 죄란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는 거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내가 목회자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니 난 목사이지만 예수님을 정말로 믿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맞다. 난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 물론 성경 지식적으론 예수님을 안다. 하지만 지식적 앎과 믿는 것은 다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런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장36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가 되실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그렇다. 난 나의 죄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완전히 해결하셨다. 이것을 내가 받아들일 때 내 죄는 해결된다. 아울러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되시게 하는 바로 이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3만원의 교통범칙금이 내게 준 메시지는 결코 적지 않았다. 내가 겸손하지도 정직하지도 용기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 아니 근본적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것도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으니 말이다. 그 결과 난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는 모든 사건과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시며 내 삶의 주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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