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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11)] 노서아 가비


김탁환 저 | 살림출판사 | 254쪽 | 10,000원

 

 

고종독살 음모사건이 경쾌한 사기극으로 재탄생

 

고종은 커피 애호가였다.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베베르 공사의 처형인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의 권유로 처음 커피를 접한 뒤, 수시로 세자인 순종과 함께 커피의 향을 즐겼다. 허나 고종은 좋아하던 커피로 인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겨야 했다. 1898년, 아관파천 시절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세도를 부리던 역관 김홍륙이 권력을 잃고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보현당 창고지기인 김종화 등과 모의해 고종과 세자가 즐겨마시던 커피에 독약을 타 넣었던 것. 다행히 고종은 한 모금 머금었을 때 이상한 냄새 때문에 곧 뱉어내서 위기를 넘겼지만, 한 모금 마셔버린 세자 순종은 이가 모두 빠져버려 18개의 의치를 해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김홍륙과 공범인 공홍식, 김종화는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들의 시체는 순검들이 바지를 잡고 종로바닥을 질질 끌고 돌아다녀 백성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동안 방대한 역사 지식과 탁월한 스토리텔링으로 『불멸의 이순신』『나, 황진이』『방각본 살인사건』『열하광인』 등의 주목할 만한 역사 팩션을 선보여 왔던 김탁환은 이 고종독살 음모사건에 이야기꾼다운 상상력을 덧보태 경쾌한 사기꾼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고종독살 음모사건의 주모자인 김홍륙의 일화를 보고 영감을 얻은 그는 그 인물 옆에 러시아의 광활한 숲을 얼빠진 귀족들에게 팔아치우는 희대의 여자사기꾼이자, 고종황제의 모닝커피를 직접 내리는 조선최초의 바리스타가 된 ‘따냐’라는 매력적인 여주인공을 창조해내어 그 상대역으로 세웠다.

 

그 순간 우리는 러시안 커피처럼 달콤 씁쓸한 ‘맛있는’ 이야기 『노서아 가비』를 만날 수 있게 됐다. 평범한 역사적 사건에 불과했을 ‘고종독살 음모사건’을 이야기꾼 김탁환은 한국소설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여주인공 ‘따냐’를 창조해냄으로써 박진감 넘치고 읽는 재미가 살아 있는 ‘개화기 유쾌 사기극’으로 탈바꿈시켰다.

 

희대의 여자사기꾼이자 조선최초의 커피 바리스타 ‘따냐’

 

대대로 역관이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여주인공 따냐는 평안하고 유복한 삶을 누리던 중, 청나라 연행길에 수행역관으로 따라갔던 아비가 천자의 하사품을 훔쳐 달아나다 절벽에서 떨어져 즉사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누명임에 분명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천자의 하사품을 훔친 대역죄인의 딸이 짊어지게 될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로 국경을 뛰어넘어 광활한 러시아로 향하게 된다.

 

그 뒤로 따냐는 그림 위조 사기꾼인 칭 할아범과 동업해 가짜 그림을 팔아치우기도 하고 얼음여우 무리에 가담해 광대한 러시아 숲을 어수룩한 유럽 귀족에게 팔아치우는 ‘대업’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 대담한 여자사기꾼의 모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기를 치다 만난 연인 이반을 따라 조선으로 흘러들어와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바리스타로 변신, 아관파천 시 러시아 공사관 안에서 벌어지는 더 거대한 음모와 협잡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독자들은 러시아 평원부터 대한제국 황실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질주하는 따냐의 행적을 따라가며, 고종 독살 사건의 진범은 누구이고, 따냐의 아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는 누구인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완용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과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의 반전으로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숨 돌릴 틈 없이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노서아 가비 - 이야기의 힘

 

『노서아 가비』는 그렇듯 잘 읽히는 소설이다. 일단 손에 잡으면 주인공과 함께 말 타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게 되는 그런 소설이다. 대한제국 시대라는, 우리 민족이 거센 외세의 도전을 받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결코 무겁거나 둔중하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인 배경이 주는 무게 위를 미끄럼 타듯이 경쾌하게 미끄러진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무언가 한국소설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동안 한국소설은, 마치 소설이란 무릇 숨겨진 삶의 비의를 오롯이 드러내야 하고, 그 성찰은 진지해야만 하는 듯, 늘 어딘가 무겁고 어두웠다. 다분히 성찰적이고 내면의 깊이 있는 탐구가 주종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탄탄한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이야기는 좀처럼 나타나기 힘들었다. 독자들은 보다 더 발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일본소설들을 하나 둘 읽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우리 문학은 침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 ?에 비해 『노서아 가비』는 경쾌하고 가볍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하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

 

소설이 철학서나 논문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이런 ‘이야기’에 있다. 젊은 영화인들이 이야기의 힘을 되찾았을 때 한국영화의 중흥이 가능했듯이,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이야기의 힘을 되찾을 때 진정한 한국문학의 르네상스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탁환은 우리 문단에 소중한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문학을 전공한 김탁환은 그 덕분에 수많은 한문서적들을 섭렵했다. ‘아귀처럼 먹어치웠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정도로 작가는 읽고 또 읽었으며, 그 교양이 스토리텔링을 만나면서 조선조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팩션들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10년간 쉬지 않고 쓰고 또 쓰면서 김탁환은 18세기 백탑파 지식인들을 거쳐 개화기와 대한제국 시절에 도달했다. 『리심, 파리의 조선 궁녀』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여인이 가장 슬픈 방식으로 자살했던 이야기를 그려냈던 작가는 이제 『노서아 가비』를 통해 대한제국 시절 세상을 대담하게 속여 넘기는 여자사기꾼을 창조해냈고, 그녀와 함께 질풍 같은 이야기를 펼친다.

 

기존의 눈으로 읽으면 위험하다고까지 느껴질 만큼 거침없고 빠른 이야기 전개를 통해 이야기꾼 소설가 김탁환은 한국소설이 놓쳤던 독자들을 되찾으려는 도전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시도를 이 소설 『노서아 가비』를 통해 펼쳐놓고 있다.

 

 

 

작가 김탁환 소개

 

단정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기억과 자료를 가로지르며 작품들을 발표해 온 소설가 김탁환. 방대한 자료 조사, 치밀하고 정확한 고증, 거기에 독창적이고 탁월한 상상력을 더하며 우리 역사소설의 새 지평을 연 작가로 평가받는다.

 

1968년 진해에서 태어났으며, 창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87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1989년에는 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에 「길안에서의 겹쳐보기-장정일론」으로 당선됐다. 학부 시절 '문학예술연구회(약칭 문예연)'에서 동아리 활동을 했고, 1991년 대학원에 진학해 고전소설을 공부하면서 틈틈이 시와 소설을 습작했으며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노동문학회 '건설'에서 활동했다. 1994년 『상상』 여름호에 「동아시아 소설의 힘」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1995년부터 3년간 진해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서 국어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건양대학교 문학영상정보학부 전임강사,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의 조교수로 재직했다.

 

장편 소설로 『허균, 최후의 19일』, 『압록강』, 『독도 평전』, 『나, 황진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방각본 살인 사건』, 『리심, 파리의 조선 궁녀』등을 펴냈으며 『불멸의 이순신』과 『나, 황진이』는 KBS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소설집 『진해 벚꽃』, 문학 비평집 『소설 중독』, 『진정성 너머의 세계』, 『한국 소설 창작 방법 연구』, 『천년습작』 등이 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로 디지털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출처 =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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