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 저 / 문학의문학 /
2009년 5월30일 발행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섬세한 문체와 선 굵은 역사의식으로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를 견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별아 작가가 또다시 가열 차게 벼린 내공 풍부한 역사소설을 들고 컴백했다.
“그들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소설적 관심의 방향이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움직이는 가운데, 문득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변방에서 태어나 변방에서 살아가길 소원했기에 역사의 변방에서 재티에 묻힌 채 외로이 반짝이는 그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곰곰 따져보노라면 모든 일이 우연이자 필연이다. 필연일 수밖에 없는 우연이다”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듯, ‘일본 천황가 폭탄 투척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조선 청년 박열(1902~1974)과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어나게 만드는 가슴 절절한 치명적 사랑을 그린 『열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국경과 사상과 죽음을 뛰어넘은 세기적 러브스토리는 “그간 몇몇 매체를 통해 단편적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아나키즘에 대한 대중적 이해가 얕고 아나키즘운동사의 연구 또한 성창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의 삶은 다만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그의 일본인 아내’로 정형화되어 근대사의 변방에 붙박여 있었”기에 역사에 희생됐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날카로운 세계 인식을 통해 현대적 의미를 복원해 내는 데 남다른 재주를 보이고 있는 작가의 예리한 상상력의 촉수에 의해 생생히 되살아났다.
왜 지금 박열과 후미코인가?
이 책의 여주인공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서는 이미 책으로도 소개되었고 방송으로도 다루어졌다. 그녀는 제국주의 일본, 한창 번영하던 일본의 전성기에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음에도 그 혜택의 영역 밖에서 살아야 했던 여인이었다. 철저히 가부장적이며 남성에게 여성이 종속된 시절의 일본에서 호적에조차 올려지지 못한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의 어린 시절은 처참했다.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잦은 재혼으로 여기저기 떠돌며 불안정한 유년을 보내던 가네코는 9살이던 1912년에 조선에 살고 있던 고모 집으로 팔려온다. 이후 가네코 후미코의 일생은 운명적으로 조선과 얽힌다. 현재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인 그곳에서 가네코는 소학교를 졸업한다. 가네코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최악이었다. 고모집의 식모와 다름없었던 그녀는 모진 학대와 핍박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한다.
가네코는 그런 의미에서 조선을 지배한 일본제국의 일원이 아니었다. 가네코는 일본 안의 또 다른 식민지였다. 가네코는 조선을 떠나기 직전 3.1운동을 목격한다. 그때 가네코의 나이 열일곱. 이때의 기억이 이후 가네코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권력에 대한 저항 정신과 약자에 대한 연대 의지를 가네코는 모두 그 현장에서 배운다. 혁명가가 지녀야 할 모든 덕목을 그 자신의 불행한 삶으로부터 스스로 체험해 간 것이다. 결국 그녀의 불행이 그녀를 성숙시킨 셈이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 후미코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로 성장해 간다. 그 과정에서 박열을 만난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공동 투쟁은 시작된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근대사상사에서 매우 기이한 존재다. 일본 근대정신의 모델은 언제나 서구였다.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구로 진입하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일본이 동아시아 식민 전략에 나서는 가장 큰 명분은 아직 서구화되지 못한 동양을 자신들이 주도해 개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해방자로 생각했으며 그것이 바로 그들이 동아시아에 대해 갖는 선민의식의 실체다.
이는 결코 제국주의자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일본의 근대정신 자체가 바로 그 탈아입구(脫亞入歐)론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바로 그 지형의 정반대편에 가네코 후미코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식민지의 남자’인 박열에게 “나는 당신에게서 내가 찾는 것을 발견했다” 고 선언한다. 이는 단지 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로만 향해 있는 일본 정신의 물줄기를 정반대의 지점으로 바꾸어 놓은 하나의 혁명적인 전환인 것이다. 바로 그 점이 가네코 후미코라는 여인이 갖는 사상사적 의미다.
특히 박열과 후미코, 이들의 순연한 사랑은 바로 국경, 이념, 죽음까지도 초월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인류의 숭고한 가치인 휴머니즘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아나키스트이면서 허무주의자이고, 테러리스트이면서 시인이고, 한 여자를 지극히 사랑했으나 결국 잃어버려야 했던 남자가 있다. 학대당한 유년의 상처 때문에 고통과 절망 속에 몸부림치다, 마침내 한 남자 속에서 삶과 사랑이 하나 되는 것을 발견했던, 그러나 가장 빛나는 그 순간에 새벽이슬처럼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여자가 있다. (……)
박열은 그저 ‘조선인 독립운동가’일 수만은 없는 열혈한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유의지는 결코 ‘일본인 아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질 수 없다. 1926년 봄, 도쿄의 대심원 대법정에 울려 퍼졌던 일갈은 민족과 성별까지도 모두 뛰어넘는 인간성의 절규였다.
그들은 젊고 치열했다. 아나키즘의 상징인 검은 색처럼, 세상의 모든 불순한 빛을 흡수해 청정한 새 빛으로 부활하고자 했다. 그들은 불가능한 꿈을 꾸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실수까지도 끝내 책임졌다. 그토록 아름답고 순결하고 찬란한 사랑의 빛에 어찌 홀리지 않을 수 있을까.
대한제국-식민지 조선의 ‘이식된 근대’야말로 수많은 빛깔의 보석을 품은 채 파묻혀 있는 거친 원석과 같다. 어떤 시대 아무러한 상황에서도 일상은 있다. 뭉뚱그려 ‘저항’일 수밖에 없는 저항들 속에도 차이는 엄연하다. 그것들을 좀 더 세분화하는 가운데 생동하는 ‘시간’과 ‘인간’을 복원하는 것이 나의 관심사이며, 소설『열애』는 그 지난한 시도의 일부분이다.
박속심 기자 (aptcf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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