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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아스데네이아’라는 병을 아시나요?

[엄무환 칼럼] ‘아스데네이아’라는 병을 아시나요?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헬라어로 ‘아스데네이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병과 관련된 이 단어는 정확한 병명을 알 수는 없지만 사람의 몸을 계속해서 쇠약한 상태로 만들어 일상생활조차 하기 힘들게 하는 병적 요소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즉 ‘아스데네이아’란 인간의 건강과 행복한 삶을 파괴하는 불행의 요소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 동안 자리에서 누워 지낸 사람이 소개되는데, 이 분이 걸린 병이 바로 이 ‘아스데네이아’입니다.

 

문제는 당시 이 ‘아스데네이아’를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찾은 곳이 베데스다 못가입니다. 이 못에 천사들이 와서 물을 동할 때 가장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사람의 경우 어떤 병이든 치유가 된다는 전설이 나돌아 소문을 듣고 수많은 병자들이 이곳에 진을 쳐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각자 자기 병을 해결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38동안 ‘아스데네이아’에 포로가 된 채 죽음의 계곡을 향해 끌려가는 이 사람을 주목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이 사람,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취급했을 이 사람, 죽음 앞에 내동댕이쳐진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이런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에 대해 병자는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 말 속엔 병자의 관심이 오직 자신을 베데스다 못에 넣어줄 사람에게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먼저 내려간다는 절망적인 상황에 낙심과 비관적인 자신의 처지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이 말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알로스 프로 에무 카타바이네이’로 ‘당연히 먼저 내려가야할 나보다 감히 먼저 앞서서’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이기적인 생존 현실 속에서 뒤쳐지고 소외당해 절망 가운데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병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적 욕망을 여지없이 분출하고 있음을 엿보게 합니다. 이것이 ‘아스데네이아’에 걸린 인간의 삶의 현주소입니다.

 

작사가 반야월이 6·25 전쟁 당시 고향인 마산으로 피난 와서 마산 방송국 문예 부장으로 일하며 서울의 가요인들을 모아 ‘방송국 위문단’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마산 결핵 병원으로 위문 공연을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반야월이 무대에 올라 그의 대표곡인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렀는데, 우연히 객석 맨 뒷편에서 아름다운 얼굴에 창백한 그림자를 드리운 소복의 여인이 계속해서 흐느끼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에 그곳 직원에게 그녀의 사연을 물어 보았더니, 그 여인은 폐결핵을 앓는 중환자(重患者)로 병원 건너편의 ‘산장 병동’에 요양 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반야월은 꺼져 가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외롭게 살아가는 그 여인을 보며 지은 노래가 「산장의 여인」입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이 노래 가사의 주인공인 여인 또한 ‘아스데네이아’의 병에 걸린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사건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2박3일 제주도 가족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하루를 묵은 그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하고 호텔 주변을 잠시 산책을 하는데 공원 벤치에서 어르신 한 분이 이른 아침부터 안주도 없이 소주를 종이컵에 따라서 홀짝홀짝 마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어르신 아침부터 소주 드시네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가요?”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르신이 “인생이 쓸쓸해서요”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르신 앞에 앉아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어르신이 공군 정보장교 출신이셨습니다. 그래서 영어도 매우 잘하시고 아는 것도 많아서 다방면에 해박하신 자타가 인정하는 유능한 장교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다 훌륭하게 키우셔서 아들이 제주도 모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쓸쓸하시냐”고 여쭸더니 “나이가 일흔이 넘어가니 남은 게 쓸쓸함밖에 없는 것 같다”면서 “인생이 참 허무하다. 그래서 소주로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얘길 듣고 제가 그 어르신에게 “그렇다고해서 쓸쓸함이 해결되겠습니까. 허무한 마음이 달래지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안되지요”라고 솔직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제가 “그 쓸쓸함과 허무함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아시느냐”고 돌직구를 날렸습니다. “모른다”고 하시기에 제가 “인생을 칠십 년 넘게 사셨고 다방면에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계신 분이 어찌 인생의 쓸쓸함과 허무함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도 모르시면 어떡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야는 사실 종교적인 것과 연관된다고 했더니 어르신이 순간 “나는 무신론자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저는 지금도 그 사건을 잊지 못합니다.

 

38년 된 병자나 ‘산장의 여인’ 노래의 주인공인 이름모를 여인이나 제주도의 호텔 인근 공원에서 만났던 공군장교 출신의 어르신 등에서 공통점을 하나 보게 됩니다. ‘아스데네이아’ 병에 걸린 인생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어디 이들 뿐이겠습니까.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짊어진 병이 아닐까요. 즉 저를 비롯하여 이 땅의 모든 인간이 38년 된 병자나 산장의 여인과 같은 처지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젊다고, 돈이 좀 있다고, 권력을 가졌다고, 뭔가 하는 일이 있어 바쁘게 산다고, 주위에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자신은 38년 된 병자가 아니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게 아니냐는 물음표를 던지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붙잡고 있는 돈이 떠나면, 권력이 사라지면, 직업을 내려놓으면, 친구나 가족이 내 곁을 떠나면 그땐 어떨까요. 그 때도 38년 된 병자처럼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소외감과 외로움과 절망감과 비관에 사로잡혀 살아가지 않을까요. 이것을 견디기 어려워서 사람을 찾고 친구를 사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자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아스데네이아’라는 이 질병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아스데네이아)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죄로 인해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몸을 계속해서 쇠약하게 만들어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게 하여 결국에는 건강과 생명까지 잃게 만드는 ‘아스데니이아’를 완전히 제거하시기 위해서도 오셨음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인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심판이 떠났음은 물론이요 내 인생을 쇠약하게 만들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려는 ‘아스데네이아’ 역시 예수그리스도가 이미 해결했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혼자’만의 공간에 놓일지라도 ‘기뻐하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돈이 나에게서 떠날지라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 속의 ‘아스데네이아’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스데네이아’ 대신 기쁨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기쁨의 영이시며 평강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영향을 받아 이미 십자가에서 완전히 해결하신 ‘아스데네이아’ 병에 걸린 사람처럼 좌절과 낙심과 쓸쓸함과 외로움에 젖어 내가 뭘 할 수 있느냐며 무기력증의 노예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과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그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넘치며 마음의 평강이 충만한 삶을 누릴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 해야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기쁨과 평강’이 내 생각과 마음을 통치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럴려면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릎 앞에 나를 굴복시키는 믿음의 행진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가를 수시로 살피십시오. 내가 지금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돈 때문입니까. 내가 소유한 이 세상의 어떤 것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난 속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 때문이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더 이상 38년 된 병자가 아닙니다. 누워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일어나서 보무당당하게 믿음의 행진을 기쁨으로 걸어야할 것입니다. 더 이상 산장의 노래를 부를 이유가 없으며, 홀로 소주잔을 마실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내 안에 버려야할 쓰레기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발견할 때마다 폐기처분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한 동안 ‘아스데네이아’에 눌러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병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 저를 굴복시키려는 좌절과 낙망과 무기력증과 소외감과 쓸쓸함과 허무함이 내쫓김을 당했습니다. 이것들의 씨앗인 ‘아스데네이아’를 제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어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이 축복을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도 저처럼 매일 경험하는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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