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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임도건 칼럼] 호혜적 이타주의 실험

[임도건 칼럼] 호혜적 이타주의 실험

 


▲임도건 박사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임도건 박사] 나와 무관한 불의는 참아도 사소한 불이익은 못 참는 세태.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중시하는 서양의 개체주의는 동양에 들어오면서 이기주의로 둔갑했다. 언제나 “나 뿐”인 사람이 나쁜 놈이라더라. 자기밖에 모르는 편협한 “이기”가, 내가 행복해야 주변을 행복하게 한다는 “애기”로 바뀔 때 이타주의가 가능하다. 근데 어디 쉬운 일인가? 훈훈한 미담보다 새로운 충격에 쉽게 반응하는 게 시대풍토인지, 인간미도 없고 정나미가 떨어지는 꼴불견마저 인권이란 이름으로 호도될 때는 혈압이 급상승한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자기만의 동굴에서 진화한 新인류는 성숙함과 영악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잘 줄타기하면서 생존해 왔다. 교양 있는 원시인이자, 행복한 저능아다. 아니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잠정적 조현病 환자일 수도 있다. 쉬운 말로 ‘망상장애’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증상은 ‘내공’이란 단어로 모두 해결했다.

 

그런데 요즘 의학계는 온갖 전문용어를 들이대며 야단법석을 떤다. 대국민 건강교육을 책임진다면서 자기네 밥그릇을 먼저 챙긴다. 순수 생체의학을 상업 자본주의나 의료산업화로 둔갑 시키고 있다. TV 건강 상식을 듣다보면 온전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1년에 한 번 건강검진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신뢰할 수 있는 첨단시설의 대형병원을 찾아야 겨우 안도하는 건강 염려증(hypochondria)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자기에게 신경 쓸 일이 많다보니 주변에 눈 돌릴 겨를이 없다.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공동체”는 사회복지계의 단골 메뉴일 뿐 일상에서 꽃피우기엔 아주 비현실적이다. 드라마나 문학에서나 가끔 만날 뿐이다.

 

그렇다면 나와 주변사람이 모두 잘 되는 호혜주의는 불가능할까? 피터 싱어(72세)의 답은 ‘NO’다. 성장배경을 보니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체험적 고백에 가깝다. 호주 멜버른에서 출생해 옥스퍼드에서 공부했고, 현재 프린스턴대학의 응용윤리학 교수다. 실용윤리 전문가이자 공리주의를 선호하는 그는 무신론자인데 종교인보다 더 윤리적이다. 세계시민주의라는 신조어를 낳으면서 해외봉사 활동을 강조한다. 가장 파격적인 주장은 “쾌고 감수능력”, 이른바 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락과 통을 느끼는 만큼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 프린스턴대학교 홈페이지 (c)시사타임즈

 

현재로선 새로운 ‘학설’ 수준이지만 조만간 세계적 트렌드로 자리 잡을 기세다. 자본주의 발달과정에 있는 우리에겐 시기상조로 들리지만, 결코 남 얘기가 아닌 현실이다. 흔히 급진학문은 통상 유럽에서 시작되고 미국의 실용주의를 거쳐 한국에 수입된다. 유럽이론을 직수입하기엔 역사와 문화 격차가 너무 크다. 싱어는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영국 식민지, 호주에서 태어났고 미국의 실용주의까지 담아내 보편화했다.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자신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는 이가 있다. 내가 볼 때 사랑에 값싼 자존심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그건 상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좇는 건, 달인가 6펜스인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와 남을 배려하는 이타주의. 이제는 상대를 먼저 챙김으로써 나까지 혜택을 보는 호혜주의 시대다. 단기적으론 이기주의가 유리하지만 중장기적으론 호혜주의 혜택이 더 크다. 필자도 벌써부터 알았지만 전문용어로 담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학문의 식민지성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권 선진국에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이번 주를 고비로 더위와 휴가철이 끝난다. 25도 에어컨에 빚진 마음으로 A. 스미스의 명언을 되새겨 본다. “우리가 매일 아침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농부와 파티세의 고귀한 헌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돈을 벌려는 저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인간행위의 모든 연원을 자기본위的 성향에서 찾는다. 이기심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전형이다. 이기심 자체를 옹호한 것이라기보다 그 이기심이 생산과정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는 옳았다. 그가 말한 자유방임은 다원주의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었지만 (자유주의자의 기대와 달리) 시장원리는 본질상 재산권 토대의 권리행사만을 보장하기 때문에, 삶의 유지에 따른 다양한 가치분배의 기준이 되지 못할 뿐더러 개인의 어떤 정치적 행위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한 마디로,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다. 필자가 인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다.

 

글 : 임도건(Ph.D) 박사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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