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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꿈과 야망

[엄무환 칼럼] 꿈과 야망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지난 2002년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경기가 열렸을 때 TV를 통해 축구경기가 생중계되자 전 국민이 그 경기를 보기 위해 칼퇴근했으며, 밤잠을 자지 못하다시피 하는 등 모든 시선이 TV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국민의 뇌리에 각인된 하나의 문구가 있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꿈이란 우리나라 축구팀이 16강에 진출하는 것이었는데, 16강을 넘어 8강, 8강을 넘어 4강에 진출하자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우리 국민들이 맛봤던 그 환희와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4강 진출을 향한 매 경기마다 손에 땀을 쥐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한 마음이 되어 응원을 벌였지요. 광화문 광장에 모인 수백만 인파가 보였던 응원의 물결은 우리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꿈을 향한 우리 국민의 열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 국민들이 외쳤던 응원구호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짜짜짝짝짝” 4분의 4박자에 맞춰 경쾌한 운율로 노래하듯이 한쪽에서 외치면 또 한쪽에서 응답하는 모양새를 나타냈던 응원가입니다. 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경적을 4분의 4박자에 맞춰 울려댔습니다. 시끄럽다고 제지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신나했고, 모두가 흥겨운 잔치 한 마당을 연출하는 연기자들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동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월드컵 4강이라는 무대에 서기까지 치렀던 치열한 경기들은 스펙터클한 드라마나 영화 이상의 감동을 온 국민에게 선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8강 진출을 놓고 벌였던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와의 축구경기는 지금 생각해도 진땀이 나게 하는 승부였습니다. 경기를 하는 축구선수들은 물론이요 경기를 지켜보는 온 국민으로 하여금 천당과 지옥을 경험하게 만든, 그야말로 피 말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 경기를 잘 풀어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안정환 선수가 패널티킥을 실패하는 바람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탈리아에게 끌려가는 형국이 되었지요. 그러다가 이탈리아의 비에리 선수가 한골을 넣자 온 국민이 망연자실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이탈리아 감독은 우리나라를 한 수 아래로 보는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에리 선수 정말 무서운 선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 선수가 우리 팀을 공격했어요. 몸싸움에 좀처럼 밀리지 않는 최진철 선수가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밀렸고 우리 선수들이 패스미스가 자꾸 나왔어요. 그래서 그 모습을 보면서 역시 8강이란 꿈은 너무 부푼 꿈이었구나 하고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안정환 선수는 패널티킥 실패로 인한 심적 부담 때문인지 계속 실수를 하는 것 같았고, 이탈리아 선수들이 심한 몸싸움으로 우리 선수들을 압박하여 체력에 밀린 우리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고 넘어지고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우리의 꿈은 여기서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꿈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중단될 수 없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경기 종료 3분을 남겨두고 설기현 선수가 동점골을 넣은 것입니다. 그 때의 그 함성, 그 환호, 그 짜릿함, 그 감격의 물결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은 물론이요 온 국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러댔습니다. 집집마다 그리고 거리마다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패배의 기색이 역력한 상태에서 동점골을 넣었으니 어떠했겠습니까.

 

연장전이 되었습니다. 연장전에 들어가자 우리 선수들은 사기가 살아났지만 이탈리아 선수들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고, 반칙을 자주 했으며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수들은 오히려 침착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선수 한 명이 퇴장 당했습니다. 한명이 퇴장 당했지만 그래도 비에리 선수, 엄청 잘했습니다. 가슴이 조마조마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숨 막히는 경기였습니다. 그때마다 골기퍼였던 이운재 선수, 어쩜 그렇게 잘 막아낼까요. 그리고 마침내 패널티킥을 실패하여 전의를 상실했던 안정환 선수가 승부를 결정짓는 회심의 헤딩슛을 날려 교만했던 이탈리아를 무너뜨렸습니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하는 이변을 낳은 것입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역전의 감동드라마를 창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경기를 중계하던 신문선 해설자가 감격에 겨워 울먹였습니다. 너무 기뻐 온 국민이 부둥켜안으며 함께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그 누가 우리 한국을 약소국가라 했습니까. 아시아의 중국, 일본은 모두 경기에 떨어졌지만, 한국은 승리했습니다. 당당히 8강에 오른 것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8강에 오른 우리나라가 무적함대 스페인까지 침몰시키고 4강에 올랐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하여 2002년 월드컵은 우리 국민에게 “꿈은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각인시켜 준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꿈을 이룬 히딩크 감독은 우리 국민의 영웅이 되었고, 홍명보 황선홍 박지성 이을용 설기현 성종국 이영표 차두리 안정환 선수들이 외국의 유명 축구팀에 스카웃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삽니다. 그렇기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잠언 29:18).

 

꿈은 꿈으로 끝날 땐 하나의 허상이나 망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꿈이 실제가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기 전만 하더라도 정말이지 우리나라가 16강에만 올라가도 소원이 없겠다는 게 당시 우리 국민들의 한결같은 꿈이요 열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월드컵이 시작되고 16강에 올라서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선수들에게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태영 선수는 코뼈가 부러지고 김남일 선수는 엉덩이 쪽에 부상을 입는 등 부상을 입지 않은 선수들이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결코 꿈을 향한 전진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올까요.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함께 벤치를 지켰던 정해성 코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친 것 같았어요. 미치지 않고선 그런 힘이 나올 수 없지요.”

 

미쳤다는 말이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돌적인 무소처럼 꿈을 향해 선수들이 죽을힘을 다해 사투를 벌였다는 뜻입니다. 꿈이 이렇게 만듭니다.

 

▶여기 꿈을 이루기 위해 위대한 행보를 내딛은 한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꿈을 이루시기 위해 상식을 벗어난 일을 저지르십니다.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았던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일이 그것입니다.

 

이 장면은 언뜻 보기엔 한 편의 코미디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질러댔습니다. 미리 알린 것도 아닙니다.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어떻게 보면 웃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인데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타신 나귀 새끼가 지나가는 길에 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무줄기를 꺾어 길에 깔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들이 외쳤던 한결같은 구호가 하나 있었습니다. 2002년에 우리 국민이 외쳤던 “대~한민국” 같은 구호입니다. 이들이 소리를 질렀던 구호는 “호산나”였습니다. “호산나~”

 

‘호산나’라는 말은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이처럼 환호하고 열광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구약성경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스가랴 9장9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수백 년 전에 활동했던 스가랴 선지자는 장차 한 왕이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 왕은 나귀 새끼를 타신다고 예언했었습니다. 그 왕이란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는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야=그리스도=구세주입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왕들은 말을 탔지 나귀를 타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나귀새끼를 탄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것이 왕이라는 표징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가 뭐냐. 성경에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 즉 그리스도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나귀새끼일까요. 성경에 나귀 새끼를 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말을 탄다고 했으면 말을 타셨을 것이지만 나귀 그것도 새끼를 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심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왕, 즉 분명한 메시아이심을 공식적으로 밝히신 사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고 환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는 하나님의 의도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그들은 당시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인류 구원이라는 꿈을 실현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이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걸어야만 했던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위에 세워졌던 그 십자가에서의 죽음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행보는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위대한 행보입니다. 바로 이 행보가 인간이 자고이래 현재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죄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문제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꿈과 하나님의 가슴에 품어진 꿈이 달라도 너무 다른 차이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꿈은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인데 반해 우리 인간의 꿈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지독한 에고이즘의 실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산나’ 하고 환호했던 이 사람들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야가 아님을 알게 되자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군중으로 바뀝니다. 인간의 야망,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위대한 행보는 하나님의 가슴에 품어진 인류 구원이라는 꿈을 실천하기 위한 행보입니다. 이 꿈은 에덴동산에서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범죄를 지은 그 순간 하나님의 가슴에 품어진 꿈입니다.

 

그 때 이후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하나님의 가슴에 품어진 그 꿈은 결코 사산되지 않았습니다. 인류 구원, 하나님이 가슴에 품어진 이 꿈의 성취를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하나님의 꿈을 성취하시기 위한 행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행보는 십자가의 죽음을 겨냥한 행보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너머엔 부활의 아침이 있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심이라는 그 다음 순서들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과정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품으신 인류 구원의 꿈속엔 이것들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여 동안 동거 동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이 품으셨던 영혼 구원의 꿈을 함께 품고 그 꿈의 성취를 위해 삶의 행보를 하겠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야망을 성취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건 그들 자신도 알지 못했던 사단의 교묘한 속임수였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십자가라는 거대한 가름막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들 안에 품어졌던 꿈이 예수님이 품으셨던 동일한 꿈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품었던 꿈은 ‘호산나’하며 환호했던 사람들이 품었던 그 야망과 똑같은 야망이었습니다. 무너진 자신들의 야망 앞에서 그들은 부끄러움과 허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다시 예전의 삶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 마음에 품었던 야망 대신 예수님이 품으셨던 영혼구원의 꿈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삶의 행보가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이 고기잡이 어부 베드로가 맞아?” 너무 놀란 나머지 벌린 입들이 다물어지질 않습니다. 이들의 변신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변화시켰을까요. 예수님이 품으셨던 꿈이었습니다. 영혼구원이라는 그 꿈 말입니다.

 

이 꿈이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청년 속에 잉태되자 역시 180도로 다른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가 변해도 ‘영혼 구원’이라는 이 꿈이 품어진 사람들마다 동일한 역사와 열매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꿈은 하나님에게서 온 꿈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삶을 책임지십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품어진 꿈이 예수님이 품으셨던 꿈과 동일한 꿈인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인생 행보를 십자가 앞으로 이끄시는지 이해가 됩니까. 십자가 사건 앞에 서야만 판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 십자가 사건은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 예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품으셨던 그 꿈과 다른 나의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배신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음이 나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제자들이 경험했던 그 부끄러움과 허망함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잡으러 세상의 바다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내 속에 품어진 꿈이 예수님의 꿈과 동일하다면 십자가 사건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행보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 믿음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사건들이 잠재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제자들처럼 우리가 스스로 야망을 포기하지 않아 어느 날 인생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철저하게 인생이 무너질 때 바로 그 시간이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오시는 시간표라는 겁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없이 예수님께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지만 내가 듣지 못했습니다. 내 야망의 소리에 너무 몰두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야망이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문 두드리는 소릴 듣게 됩니다. 그렇기에 “무너져야 하리”라는 찬양가사처럼 우리의 야망이 무너지는 그 날이 반드시 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꿈이 내 속에 품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선택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처럼 다시 찾아오셔서 내 속에 반드시 예수님의 꿈을 심으시고야 마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리하시고야 마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그러했으며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러했습니다. 저도 그 은혜를 입은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태양은 지금도 찬란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야망이라는 구름이 그 은혜와 사랑을 차단하고 있지만 십자가의 거대한 쇠망치가 나의 야망을 박살내는 그 날 내가 죽었다고 인식되는 그날, 부활의 찬란한 새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패키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가슴에 잉태시켜 주신 이 꿈을 여러분의 가슴에도 잉태시켜 주시려는 것 말입니다. 이 꿈 때문에 제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꿈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이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 꿈 때문에 교회가 여기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꿈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꿈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누가 이 꿈을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지금 제게 품어진 이 꿈을 우리 군종들에게 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병사들에게 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꿈이 잉태된다면 대박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받은 인생은 영혼구원을 향한 위대한 행보를 내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행보는 오직 예수님이 품으셨던 동일한 꿈을 품은 자만이 내디딜 수 있는 행보입니다. 제가 지금 이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쁨이요 감사요 행복입니다. 제가 얼마나 이 삶을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과하게 하셔서 법관이 되려고 했던 저의 야망을 무너뜨려주시고 제 가슴에 영혼 구원의 꿈을 잉태케 해주신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에게라도 이 꿈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꿈이 잉태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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