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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친절

[엄무환 칼럼] 친절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전역한 한 병사가 민원 처리를 빠르고 정확하고 친절하게 해주신 분들에 대한 포상 건의를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군 운전경력 관련 서류가 필요해 발급을 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신 분들의 포상을 건의합니다.

 

1. 39사단 감찰부에 행정관님(○○○ 행정관님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 성함은 모릅니다.)께

제가 전역한 부대의 담당자의 연락처를 여쭸는데 대신 처리해주시겠다면서 직접 부대에 제 민원을 전달해주셨고 일의 진행 상황과 결과에 대해 몇 번 전화를 친절하게 주셨습니다.

 

2. 몇 가지 민원 처리 중에 오류가 생겼을 때 ○○○ 소대장님과 ○○○ 상사님이 빠르고 정확하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또 제 실수로 (정확하게는 프린트해주시는 선생님의 실수로) 민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바로 처리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3.최종적으로 민원을 다시 신청했는데 ○○○ 중대장님께서 직접 전화주셔서 직접 나서서 처리해줄테니 연락처를 알려주셨고 다음날 바로 연락드리니 바로 처리해주셨습니다.

 

4. 전역 후 사회에 나와 기간제 교사로 매년 임용시험을 보고 사립 시험을 보면서 여러 장의 경력서류를 떼면서 이렇게 친절하고 빠른 처리를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서류 한 장 떼주는 것이 무슨 칭찬거리가 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기본적인 것이 안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군대는 본인 업무를 수행하면서 민원처리를 바로 바로 할 여유가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가 언급한 간부님들은 본인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민원인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도움을 주셨기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민원이 접수되면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안되면 왜 안되는지를 파악해서 민원인에게 통보하고 민원인의 잘못으로 민원을 다시 처리하게 되었는데도 친절하게 대해주시고 더 나아가 전체 책임자가 나서서 화끈하게 처리해주시는 것에 감사합니다.

 

5. 기본에 충실하고 친절과 정확한 민원을 처리해주신 간부님들께 꼭 포상을 부탁드립니다.

 

이런 내용의 글입니다만 여러분들도 간부님들에게서 이런 친절을 경험해봤나요. 그리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나요. 그러면 모범간부님 추천을 해 주세요. 이미 연대군종을 통해 광고를 들었을 테지만 저희 교회가 모범 간부님 중에서 두 분을 선정하여 부부동반으로 2박3일 제주도 여행을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비행기 티켓과 호텔숙박비 등을 일체 제공합니다. 지난 주에 연대장님을 만나 뵙고 이 내용을 설명 드린 후 특별휴가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건의 드렸더니 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모범간부님이란 얼마나 병사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계시는 분이신가와 연관됩니다. 불친절한 간부님은 절대로 모범 간부님으로 선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범 간부님을 판단하는 잣대 중 하나가 친절하냐 안하냐라는 것이지요.

 

▶친절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대하는 태도가 매우 친근하고 다정함. 또는 그러한 태도”를 말합니다. 친절의 반대가 불친절입니다. 친절과 불친절의 차이는 한문으로 아니 불(不)자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여러분은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다는 평을 받습니까 아니면 불친절하다는 평을 받습니까. 이것은 평소의 삶의 자세나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압니다. 친절한지 불친절한지를 말입니다. 그런데 친절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지난 2005년 7월에 상영되어 3백만 명 이상이 관람한 '친절한 금자씨'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금자씨 역을 맡은 이영자 씨가 보인 친절은 친절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제목이 말해주듯 금자씨는 매우 친절합니다.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재소자로 수감된 교도소 안에서 금자씨는 같은 재소자들에게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친절은 자신의 마음에 품어진 복수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요 무기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친절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친절이라는 게 자칫 사람을 죽이는 수단이나 무기로 활용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친절을 베푸느냐가 중요하다는 게지요. 그래서 제 자신이나 제 주위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저도 그렇고 제 주위 사람들 중에 금자씨와 같은 마음으로 친절을 베푼 경우들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 친절을 베풀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때론 물질로, 때론 식사대접으로, 때론 선물공세로 친절을 베풀어 당시엔 너무 감사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어떤 목적 때문에 저의 도움이 필요하여 저를 이용하려고 친절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고선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친절을 베풀었던 것 같아요.

 

이런 친절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거나 더 이상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 싶으면 언제 그런 친절을 보였나 싶을 정도로 태도가 돌변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수상과의 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해 11월 5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특별비행기편으로 도쿄에 있는 미군기지에 도착하여 미군 장병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미일 동맹관계에 대해 강조했어요. 그리고 일본 가와고예시에 위치한 골프장으로 가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베 수상과 골프를 치며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날 일본 NHK 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이 가와고예시 골프장으로 가서 오찬회에 앞서 아베가 선물한 흰 모자에 “미일 동맹관계를 더욱 튼튼하게”라는 글씨를 남겼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수상과 일본 직업골프선수 마쯔야마의 안내하에 골프를 쳤습니다. ‘골프외교’를 통해 양국의 신뢰관계를 돈독히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지요. 이처럼 아베수상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모든 정성을 다해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아주 친밀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난 2일 세계일보는 “트럼프, 아베와 '브로맨스' 차갑게 식은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베 일본 총리가 올인했던 트럼프 대통령과의 ‘브로맨스’(brother와 romance를 조합한 신조어로 남자와 남자 간의 애정을 뜻하는 단어로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의미한다)가 깨져 궁지에 몰리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즉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베프’(베스트 프렌드)라는 평가를 받아왔으나 두 사람 간의 관계에 금이 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트럼프와 아베가 수시로 통화하고, 이번 달 중순에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별장인 플로리다주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다시 만날 예정이지만 이는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미·일 통상 현안이나 북한 문제 등 핵심 현안을 처리하면서 아베 총리에게 연거푸 굴욕을 안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신문 보도 내용에서 보듯 아베가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인 친절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에게 베푼 친절은 각자 자국의 유익을 위해 베푼 친절이었기 때문에 그 유익에 반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가차없이 등을 돌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친절한 금자 씨가 보인 친절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친절이 어떤 계산된 목적 하에 베풀어지는 것이라면 그건 친절이 아닙니다. 그 친절은 오히려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심지어 해를 끼치는 무서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친절해야 하나요? 이거 어려운 문제입니다. 친절해도 문제가 될 수 있고 그렇다고 불친절하게 대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어떤 분이 한국인은 왜 백인에게 친절한가요?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분들이 이런 답변들을 했습니다.

 

“한국인은 왜 백인에게만 친절한지 모르겠네요. 보통 거의 대부분 한국인들은 불친절합니다. 인정하시죠? 남에게 별 관심 안가질 뿐더러 극소수를 제외하면 서로 차갑게 대합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백인들. 아주 그냥 잇몸 미소가 자동으로 나옵니다. 뭐 영어를 잘 못하니 당황해서 웃는 건 아는데 역겨울 정도로 빌빌대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네요. 이렇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씁쓸하긴 하지만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인, 영국인, 이탈리아인 등 서양 사람들을 보면 친절하게 환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반면 베트남인, 필리핀인, 방글라데시인 등 동남아시아 계통 혹은 저개발국가 국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하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대체적으로 선진국인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편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친절을 베푸는 것도 사람에 따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보다 뭔가 나아 보인다 싶으면 비굴할 정도로 깍듯이 친절을 베풀지만 반대로 나보다 나은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다 싶으면 불친절하게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까. 아니 여러분은 친절합니까 불친절합니까.

 

▶친절도 너무 과한 친절을 과잉 친절이라고 합니다. 과잉친절을 베푸는 사람의 경우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사람이고 두 번째 부류는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둘 중 심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은 후자 쪽입니다. 심리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의 내면에는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받고 싶은 보호와 관심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친절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올 호의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면서 과잉친절을 베푼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속성을 보면 상대방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 경우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보답하는지를 지켜보는 무서운 속성이 있습니다. 즉 오른손이 한 일에 대해 왼손이 보답받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상심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내가 친절을 베풀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순전히 상대방이 자기가 좋아서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놓고 내가 그 친절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 싶으면 “그동안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냐”며 화를 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말씀은 친절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줍니다. 보아스라는 사람을 통해서 말입니다.

 

보아스가 처음 만난 룻이라는 한 여인에게 베푼 친절은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친절입니다. 아무런 계산이 없는 친절이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베푸는 친절은 친절이 아닙니다. 비즈니스를 위한 모종의 선물공세일 뿐입니다. 이걸 끈달린 친절이라고 말합니다. 친절한 금자씨가 재소자들에게 베푼 친절이 그렇습니다. 이 친절은 내 목에 밧줄을 묶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나를 옭아매는 밧줄 말입니다. 요런 친절은 받으면 안됩니다. 자칫 인생 망칩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것처럼 사심이 없는 친절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그리고 내가 뭘 바라고 베푼 친절이 아니건만 이자까지 후하게 붙어서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남편이 없는 과부로서 당시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 이삭줍기였던 룻의 처지에서 이삭을 마음껏 주울 수 있도록 밭주인이 허락해 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줍는 동안 주위 남자들이 룻에 대해 어떤 해꼬지도 하지 못하도록 보호막을 쳐주고 목이 마르거든 물까지 마실 수 있도록 조치를 해준 보아스의 이 친절함은 가히 룻의 마음에 폭풍감동을 몰고 오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아 보입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보아스에게 한 말이 이를 증거합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유대인도 아닌 이방여인인 룻이 베들레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근본적으로 이방인에 대해 거리를 둡니다. 말도 잘 섞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는 선민의식이 강해서입니다. ‘우린 너희와 달라’라는 특권의식 말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하면 야만인과 같다는 의식이 유대인 사회에 팽배했습니다. 그러니 이방인을 무시하는 태도가 몸에 베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룻이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베들레헴의 부자인 보아스라는 사람이 이방여인인 자신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다니 이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풍 감동이며 감격입니다. 더욱이 자신은 과부입니다. 그 시대에 과부는 거지와 동급의 신세였습니다. 별로 관심의 대상이 못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달랐습니다. 룻에게 너무나 살뜰하게 너무나 자상하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 친절은 룻의 힘겨운 삶을 만져준 친절이었습니다. 그것도 무엇을 바래서 베푼 친절이 아니었습니다. 끈달린 친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심이 없는 친절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룻은 이 친절에 몸둘바를 모를 정도입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지 도무지 영문을 몰라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절하며 감사를 표하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이방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룻의 질문에 보아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남편이 죽은 후 얼마든지 재가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와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고 있었던 룻에 대한 좋은 소문이 베들레헴 안에 퍼졌고 그 소문이 보아스의 귀에도 들려 보아스가 룻의 얼굴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룻의 평판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고 룻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는 게지요. 그 마음이 보아스로 하여금 룻에 대해 친절을 베푸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보아스가 룻에게 이런 축복까지 빌어줍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이 감격하여 말합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룻은 자신이 이런 친절을 받을만한 자격도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방여인에다가 과부라는 처지가 베들레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룻이 온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아스의 친절은 룻이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해 마치 무슨 보상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식사시간이 되자 보아스가 룻에게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보아스가 볶은 곡식을 줍니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나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룻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자상하고 디테일한 친절을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마음이 그렇게 따뜻해질 수 없겠지요. 그리고 그 친절 평생 마음에 간직하며 살지 않을까요. 이런 친절을 받으면 가는 곳마다 친절을 베풀어준 그 분을 얘기할 겁니다. 그리고 뭔가 아낌없이 그 친절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보아스의 이 친절은 결국 룻과의 결혼으로까지 승화되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남는 삶의 결과를 낳게 했습니다.

 

그런데 룻이 보아스로부터 이런 친절을 받게 된 이유가 뭔가요? 이미 살펴봤지만 룻이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좋은 평판이 가장 주된 요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룻의 신앙고백과 함께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일평생 죽음 이외에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단으로 베들레헴까지 오게 되었고 그래서 시어머니를 깍듯이 봉양한 룻의 아름다운 삶의 평판이 베들레헴 사회에 알려지면서 보아스의 귀에도 들려 보아스로 하여금 룻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게 한 것이었습니다. 보아스의 이 친절은 앞이 보이지 않았던 룻의 삶에 큰 용기와 함께 희망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룻의 인생에 하나님의 손길이 간섭하고 계심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기억하십시오. 우린 심은 대로 거둡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베푼 친절이 보아스로부터 이자까지 붙어 갑절의 친절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슴 깊은 곳까지 울리는 폭풍감동 친절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룻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신앙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4~40).

 

친절한 금자씨와 같이 나의 어떤 목적을 위해 베푸는 끈 달린 친절이 아니라 보아스나 룻처럼 사심이 없는 친절을 베푸는 삶의 주인공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람에게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에게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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