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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육신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

[엄무환 칼럼] 육신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교회 안에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면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있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에 대해 바울사도는 ‘신령한 자(spiritual man-NIV)’라고 표현하면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람의 특징에 대해 바울사도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은사나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서 또 다른 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했습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영적으로 어린아이인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계속 영적인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모델이 구약성경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영어 문장에서 주어가 I(나)이면 1인칭 문장이고, You(너)이면 2인칭 문장이고, He(She)이면 3인칭 문장이듯이 내 삶의 주인이 나이면 육신적 그리스도인이고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면 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어가 내가 되면 육신적 그리스도인이고 주어가 하나님이시면 영적 그리스도인이라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내가 부지런히 수고하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뭔가를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전형적인 육신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즉 자기의 목적, 자기의 야망을 이루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중, 하나님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지만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뜻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기도도, 예배도, 헌금도 봉사도 자기에게 유익함이 되어야만 합니다. 자기가 손해보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안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더라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합니다.

 

이런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긴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부담이 될 뿐입니다. 믿음의 삶, 성령의 삶을 살기란 하늘에 별 따기처럼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적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리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리키고 기도훈련을 시키고 하여 은사가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난다할지라도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으며,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으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시켰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영적 그리스도인이 되질 못해 결국 광야에서 무덤을 파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져 요단강을 건넜고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영적그리스도인만이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을 소유합니다. 영적 그리스도인만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보화를 캐내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적 그리스도인만이 천국을 침노하는 삶,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삶을 삽니다. 영적 그리스도인만이 다윗처럼 승리의 삶을 살며 정복의 삶을 삽니다. 그래서 영적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인생의 결말을 맺었는지를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틀림없이 저들이 걸어갔던 전철을 밟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의 모델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신약성경 히브리서 3장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홍해가 갈라지는 등 그 어떤 민족도 경험하지 못한 무수한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했지만 그러나 항상 마음이 미혹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육신적 그리스도인의 영적 현주소입니다. 항상 마음이 미혹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여기서 ‘미혹되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플라논타이’로 그 뜻은 ‘방황하다’, ‘속다’, ‘잘못하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의중을 알지 못한 것은 단순한 무지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길’을 알게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가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혹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왜 미혹되었느냐 하면 그들의 시선이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필요한 것, 자기의 욕망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 여 동안 생활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적들을 눈으로 보았습니까.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최후의 성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습니다. 이 말은 사실 베드로의 진심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직격탄을 쏘십니다.

 

예수님의 이와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 생각에 빠져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어떻게 나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저 예수와 같은 패거리이지” 라고 말하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리고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자기 생각에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고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내 생각, 내 의지와 전혀 다른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자기 자원으로는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을 갈 수가 없으며,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육신적 그리스도인의 영적 현주소입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나 신학교가 이와같은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을 생산하는 공장과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문제는 이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을 교회나 신학교가 영적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이 부디 틀리길 바랍니다.

 

사실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리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제자훈련을 시키고 기도훈련을 시킨다한들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예수님과 3년여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훈련받은 제자들이 이러했다면 우리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구약성경 민수기 14:30절에서 하나님은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이 히브리서에서 언급한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아서 절대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요단강은 오직 믿음으로만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에서 살다가 죽을 뿐입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뭔가 되는 것 같아 보여도 어느 날 인생이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의 바벨탑을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야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열심이 대단합니다. 부지런합니다. 성실합니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는 꼴을 못 봅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합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결국 인생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은 오직 믿음으로만 건널 수 있습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질 못합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니 결국 광야에서 고생 고생하다가 무덤을 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인생 결론을 맞게 됩니다. 성경이 이 사실을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자기 신념은 강하지만 그러나 믿음이 없습니다. 영적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의중,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뜻, 그 말씀을 안다손 치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영적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자원으로 사는 삶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한 이 말씀을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 말씀은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에겐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은 더더욱 어렵게 여겨질 겁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의 경우 이 말씀은 하나의 글이 아닙니다. 삶 전부를 걸게 하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모르면 절대로 영적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사야 선지자나 호세아 선지자가 지적한 것처럼 무수한 예배나 기도 금식 봉사 등이 하나님에게 무슨 유익이 되느냐 너희가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라는 말씀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질이 없는 의식만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거 심판받습니다. 이게 무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나를 영적그리스도인의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영적 그리스도인은 요단강을 건넌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삶을 삽니다. 하지만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며 자기 욕심과 야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다가 무덤을 팔게 될 것입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내는 교회나 신학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나 교회가 지금보다 더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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