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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일반

역사의 모순 ‘야스쿠니신사’

역사의 모순 ‘야스쿠니신사’


 

[시사타임즈 보도팀] 일본 도쿄[東京]의 한가운데인 지요다구[千代田區]황궁 북쪽에 있는 신사(神社)로서 8만여 개에 달하는 일본 전역의 신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사 중의 신사로 불린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69년 막부(幕府)군과의 싸움에서 숨진 영혼을 호국의 신으로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되었다.

  



야스쿠니신사 (자료사진) ⒞시사타임즈

 

건립 당시의 명칭은 도쿄 쇼콘샤[招魂社]이며 일본 전역에 세워진 쇼콘샤 가운데 황실이 직접 납폐하는 으뜸 신사였다. 이후 쇼콘샤는 일본의 대외침략과 발맞추어 국가신도의 군사적 성격을 대표하는 신사로 자리잡았고 세이난[西南]전쟁 2년 뒤인 1879년에 현재의 이름인 야스쿠니신사로 바뀌었으며 말 그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호국신사이자 황국신사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몰자를 호국의 영령으로 제사하고 여기에 천황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전쟁 때마다 국민에게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하고 이를 침투시키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 전몰자들은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생전의 잘잘못은 상관없이 신(神)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았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장으로 떠났을 만큼 모든 가치의 기준을 천황에 대한 충성 여부에 두었다. 따라서 야스쿠니신사의 제신(祭神)원리는 국민의 도덕관을 매우 혼란하게 만들었다.

 

천황을 위한 죽음은 대부분 명분없는 침략전쟁에서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는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신화의식을 조작해 야스쿠니신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총사령부는 야스쿠니신사의 호국적 성격을 알고 단순한 종교시설과 순수한 전몰자 추도시설 중 하나를 택하라고 일본에 강요하였고 일본은 종교시설을 택하였지만 야스쿠니신사의 특수한 기능인 전몰자추도시설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하였다.

 

1947년 일본은 신헌법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한 뒤에도 야스쿠니신사가 종교시설이자 전몰자 추도시설임을 인정하였고 1960년대 말부터는 야스쿠니신사를 국가의 관리 아래 두자는 법안을 계속 제출하였다. 1978년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전범 14명이 합사되는 일이 발생하자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보수 우파세력은 A급전범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군국주의의 부활을 부채질하였으며 일본정부 역시 후생성이 중심이 되어 민관합동기구가 결정한 일일 뿐이라고 발뺌하였다. 1985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한 이후 주요 요인이 공식 참배하는 등 일본군국주의의 망령을 부활시키고 있어 주변국 뿐 아니라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2013년 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총 246만여 명의 전몰자가 안치되어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상징인 흰 비둘기가 평화를 의미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시물들은 전쟁과 전투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어 전쟁박물관인지 신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1978년 야스쿠니신사에 도조 히테키 전 총리 등 A급전범14명의 위패가 합사(合祀)된 이후 일본총리나 각료의 공식참배여부가 주목을 받게 되면서 일제침략을 받은 한국과 중국 등 피해국가들은 총리 등 각료가 전범의 위패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고 거세게 항의하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문제는 국가 보호유지, 총리 등 각료의 공식참배, A급전범 합사문제 외에 신사의 역사적 성격과 국가·정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다루느냐 등 많은 미(未)해결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최근 일본의 우경화 현상에 대한 우려도 한 몫하고 있다.

 

시사타임즈 보도팀(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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