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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26)] 91. 에콰도르(Ecuador)-2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26)] 91. 에콰도르(Ecuador)-2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 코토팍시, 5,897m (c)시사타임즈

3. 한국해외개발공사(KODCO)와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한국해외개발공사(해개공)는 우리 국민의 해외취업과 해와이주를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1976년 4월 20일에 한국해외개발공사법을 제정함으로써 탄생했다. 부지는 처음에 서대문구의 동교동에 자리 잡았으나 마침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가 완공되어 연건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관악 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정부로부터 무상 불하를 받고 그 자리에 자리 잡았다. 주요 업무는 해외취업과 해외이주 알선, 그리고 해외 여행객에 대한 소양교육과 신체검사였다. 당시에 출국하기 위해서는 소양교육을 하루 동안 받아야 했다. 해외여행 기본 에티켓과 반공교육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을 해외에 취업 또는 이주시켜 부지런한 우리 국민이 그 곳을 개발한다는 의미에서 한국해외개발공사라고 작명하였다니 참으로 장한 이름이다. 사실 해외개발공사를 통해서 나간 자들이 세계 도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그 나라 발전에 기여한 것을 보면 맞는 이름이기도 하다.

 

한국해외개발공사는 후진국에만 있는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기관이 있다는 자체가 자기 나라에 일자리가 없고 살기 어려우니 해외취업을 하여 타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라는 것이고, 해외이주는 땅이 좁으니 외국에 나가서 어떻게 살 길을 찾아보라는 것이고, 국민들 수준이 높지 않으니 출국 전에 소양교육을 받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우리나라 외화가 부족하여 투자 이민은 없고 연고이민, 취업이민으로 출국 시 외화 소지가 엄격히 제한되었다. 1984년 이후 투자이민제도가 생기고 그 한도액이 10만 불, 20만 불, 50만 불, 100만 불로 상향 조정되어 왔다. 우리나라가 발전되어 감에 따라 해외취업 희망자와 해외 이주자가 급감하자 정부는 해외개발공사를 1991년 4월 1일에 해체하고 동시에 한국국제협력단(협력단)을 창설하였다. 협력단은 우리의 개발경험을 개도국에 우리의 자금으로 전수시켜 개도국의 발전을 돕고 그들과 우호 관계를 증진 시키는 기관이다. 이는 선진국에만 있는 기관이니 해외개발공사와는 정반대의 기관이다. 나는 이 정반대 성격의 기관을 다 다녔으니 우리나라의 현대화의 발전과정을 몸으로 겪었다고 할 수 있다.

 

4. 에콰도르에서의 나의 업무

 

당시 에콰도르에서의 나의 주 업무는 취업 및 투자이민 수요 발굴과 초기 이주자들 정착 지원이었다. 가구당 투자 제한액은 20만 불이었다. 투자이민 전문 변호사와 협의하여 입국한 이주자들이 적법한 비자를 취득케 도와주고 적정한 곳에 투자하도록 정보를 수집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해개공 고문변호사 부부와 함께 (c)시사타임즈

일 년에 50여 세대가 이주해 왔다. 이주자들이 약속한 곳에 투자하지 않고 기회를 보다가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주할 의사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어느 나라고 자기 나라를 중간 기착지로 여기는 자를 좋아할 리 없다. 이민청에서는 이주자들이 투자한 증빙 서류를 제출해야 영주권을 주기 때문에 이주자들이 초기 정착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주자 입장에서는 타국으로 갈 의향이 없더라도 타국에서 섣불리 가져온 돈을 투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러한 자들이 이민경찰에 검거되고 해서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당시 이민전문 변호사는 세대 당 2,000불을 받고 비자 취득 지원, 투자처 정보 제공 등을 했다. 당시 우리 교민이 2,500명에 달했는데 지금은 1,000명 정도라 한다. 미국, 캐나다 등으로 떠난 것이다.

 

4. 내가 만난 사람들

 

(이민청장 Chiriboga 부부)

 

1933년 생으로, 스페인계 백인으로 이민청장 이었기 때문에 나의 업무 파트너였다. 한국에 우호적이고 나와 친분을 쌓은 후 나에게 도움을 많이 줬다. 이주자들이 경찰에 잡혔을 때 항상 그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 부인도 스페인계로 조금 통통한 편이나 애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우리 부부와 가깝게 지냈다.

 

▲이민청장 부부와, 1988년 (c)시사타임즈

Chiriboga부부와 함께 키토 근교 관광은 물론 콜롬비아도 같이 육로로 여행했다. 그 때 처음으로 육로로 국경을 통과하는 이색적인 경험을 했다. Chiriboga청장은 유치원에 다니는 규영이를 아주 똑똑하다며 박사라고 부르며 무척 예뻐했다. 당시 아영이는 너무 어려 관광이나 여행을 다닐 때에는 가정부와 함께 집을 지켰다.

 

나는 그에게서 에콰도르를 배우고 그에게 한국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줬다. 당시는 88 서울 올림픽으로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한국을 더욱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곳 근무를 마친 후 지금까지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거의 90대 노인이 되었을 터인데…….

 

“Chiriboga청장님, 그 때 제 전화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 투자이주자들 많이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규영이는 박사는 아직 못 되고 저와 같이 협력단에서 일하고 있답니다. 코로나가 진정되면 조만간 에콰도르에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Paulina)

 

1963년 생으로 스페인계 백인이며 우리 사무소 비서이다. 영어, 타자에 능숙하여 비서로서 손색이 없었다. 박종옥 소장이 선발하였다. 함영훈 사장이 윤종천 총무부장과 함께 에콰도르를 1988년 4월에 방문했을 때, Paulina가 전 일정을 수행했다. 함 사장이 그녀를 대사관 수석 비서를 해도 손색이 없겠다고 칭찬했다.

 

▲Paulina와 N.Y, 1992.10 (c)시사타임즈

해외개발공사 본부의 함영훈 사장이 귀국 후 퇴임하고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전윤수 사장이 부임하였다. 전 사장의 업무 방침은 회사의 적자운영 탈피였다. 그래서 사무실을 좁게 쓰게 하고 사무실 임대, 주차장 유료화를 하더니 해외사무소 철수 조치로 에콰도르사무소를 폐쇄하고 나를 서울로 발령을 냈다. 함 사장한테서 3년을 보장 받고 왔는데 2년 만에……. 그러나 조직의 명령이니 어쩌겠는가? 나는 속히 자동차를 매각하고 사무실을 정리했다.

 

물론 비서에게 해고 통지도 했다. 그랬더니 Paulina가 나에게 미국 비자 신청서에 보증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물론 관광비자이나 돌아오질 않을 생각이라면서. 나는 고민했다. 우리 형편상 해고하여 직장을 잃었으니 도와 주어야할 텐데……. 미국 불법 이주자를 방조도 아니고 협조를 해달라니 공인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를 고민하다 Paulina에게 말했다. 불법 체류를 할 생각이라니 공인으로서 내가 보증은 서 줄 수가 없고 네가 오늘 까지 KOICA 사무소에서 비서로 5년 동안 아주 성실히 근무하고 있다고 서한을 써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서한을 작성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비자를 받았는지 결과를 모르고 키토를 떠났다. 그리고 Paulina를 잊고 지냈다.

 

그리고 4년쯤 흘러 나는 미국 뉴욕에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허드슨 강의 유람선을 타기 위하여 승선권을 사는 줄에 서 있는데 누가 “세뇨르 송”하고 부르기에 돌아 봤더니 Paulina가 아닌가? 세상은 참 좁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천만이 넘는 세계 최대 도시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다니…….

 

사연을 들어보니 그때 내가 작성해 준 서한으로 관광 비자를 받아 뉴욕에 와서 불법체류하며 어렵게 지내다 3년 반 만에 영주권을 받고 정식으로 UNESCO 비서로 취직하였단다. 그래서 어머니를 며칠 전에 초청하여 오늘은 허드슨강 유람을 시켜 드리려고 이곳에 왔다는 거였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나와 Paulina는 전생에 무슨 연이 있는 것 같다고 아내가 말했다. Paulina는 우리 애들이 몰라보게 자랐다고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영이가 그 때는 3살이었으나 이제 7살이 되었으니……. 우리는 주소를 주고받았다. 지금이라면 이메일 주소를 받고, 구글톡을 주고받았을 텐데. 우리는 그 뒤 편지를 서너 번 주고받다가 언젠가 끊겼다. 누가 답장을 안했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나는 언젠가 Paulina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와 그녀는 전생의 연이 있다고 아내가 말했으므로…….

 

(이세명 사장)

 

▲침보라소산 4800m 지점에서 (c)시사타임즈

1947년생이며 태권도 사범으로 에콰도르에 1979년에 이주해 왔다. 173cm에 68kg 정도의 체구이며 장동건을 능가하는 미남이다. 이민 온 후 한동안 키토에 있다가 과야낄에 정착했다. 태권도장 운영과 무역업을 겸하고 있었다. 둘 다 시원찮다고 하지만 열심히 생활한다. 과야낄 한인의 대부로 모든 어려움은 그에게 모이고 또 대부분 해결해 준다.

 

나는 그와 함께 이 나라 최고의 산 침보라소산을 등정했다. 침보라소 산은 지구 중심에서 가장 먼 지점으로 유명하며 산세가 웅장하다. 평지에 6310m 높이의 산봉우리만 하나만 우뚝 서있으니 얼마나 장대한 모습이겠는가? 우리는 4400m까지 차로 오른 후에 등정을 시작했다. 5000m에 도달하니 만년설이 있었다. 두 세 시간 오르니 숨쉬기가 곤란하고 힘이 들어 5400m 높이에서 아쉽게도 정상 등정을 포기하였다.

 

이세명 사장은 내가 그곳을 떠난 후에도 서울에 오면 꼭 나를 만나고 간다. 그를 만나면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2000년 이후에는 내가 주로 해외에 근무하고 있어 그 후로는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 사장님, 과야낄에 그럴듯한 태권도장 건립이 꿈이셨는데 이루셨나 요?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세요.”

 

(강찬석 사장)

 

1950년 생으로 서울 출신이다. 내가 에콰도르에 있을 때 이주자 1호로 입국하여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오자마자 사진관을 열어 영주권도 쉽게 취득하였다. 비디오 대여가게도 겸했다. 어머니는 일찍 여의고 아버지를 초청하여 모셨다. 사진 기술이 좋아 손님이 많았다.

 

내가 한 번은 몹시 앓았는데 문병을 왔다. 나는 이제 다 나아가는데 입맛이 없다고 했더니 뭘 먹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무심코 개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다음 날 개를 한 마리 잡아 가지고 우리 집에 온 것이 아닌가? 아내가 기겁을 했다. 사실 나는 개고기를 아주 좋아하나 아내는 전혀 입에 대지 않을 뿐 아니라 개고기 요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찬석 사장은 자기 누님을 불러 보신탕, 수육 등 요리를 해주게 했다. 나는 정말 강찬석 사장 덕에 몸보신을 하고 기운을 차렸다.

 

▲강찬석 사장과, 1988.3 (c)시사타임즈
▲다윈이 ‘종의 기원’을 연구한 Galapagos 섬, 에콰도르 해안에서 965km (c)시사타임즈

 

우리 가족이 갈라파고스 여행 계획을 세우니 강 사장이 자기는 바빠서 못가니 자기 부친을 모시고 같이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사실은 자기도 가고 싶으나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74세 된 아버지만 보내는 그 효심을 나는 알았기에 쾌히 승낙했다. 그 갈라파고스에서 물개 구경을 하는데 할아버지는 물개 한 마리 한 마리를 자세히 봤다. 내가 “무얼 그리 열심히 보세요?”하고 물으니까, “다 암컷이야. 해구신은 하나도 없고만.” 물개는 수컷 하나가 암컷 100여 마리를 거느린단다. 그래서 해구신은 최고의 정력제란다. “할아버지, 누구 주시려고요?” “누구는 누구여? 내가 먹어야지.” “에그, 할아버지…….”

 

에콰도르를 떠난 후 나는 강찬석 사장을 만나지 못했다. 지금도 키토에 사는지? 남들처럼 미국에 갔는지? 나는 모른다. 그 해구신 아버지도 살아 계신지? 아마 하늘나라에 계실 것 같다. 살아계신다면 106세? 기적도 있다니 한 번 뵙고 싶다.

 

5. 에콰도르 근무를 마치고

 

3년 예정이었던 에콰도르 근무가 본부의 사정으로 2년 만에 사무소 문을 닫고 귀국하였다. 아쉬웠지만 첫 해외근무를 무사히 마쳤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다행히 걱정했던 큰 지진은 없었다. 강도 5.8의 지진이 한 번 있었는데, 귀국을 며칠 앞두고 나를 위한 환송골프 행사 때였다. 12번 홀에서 퍼팅하고 있을 때 지진이 발생했다. 그린이 출렁 거렸다. 나는 내가 현기증이 난 줄 알았는데 지진이란다. 다음 날 신문에도 그 지진 규모 5.8이라고 보도되었다. 사망자는 없었다.

 

▲미국 그랜드 캐년 (c)시사타임즈

또한, 나나 가족 모두가 고산병에 무탈한 것도 다행이었다. 몇 해 전에 우리나라 수산청장이 이곳 방문 중에 죽은 일도 있어서 부임 시에 내심 걱정했던 터였다. 2,850m이니 백두산보다도 높은데……. 황영재 대사는 고산병이 심하여 주말이면 꼭 저지대로 내려갔다. 그리고 6개월을 못 버티고 귀국하여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다가 2년 후에 세상을 떴다.

 

후임에 정해융 대사가 부임했다. 1987년 레바논에서 KAL기를 폭파한 김현희를 체포할 때 현지 대사로 진두지휘하여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치하를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황영재 대사의 선배로 나이가 많아 고산병을 걱정했으나 기우였으며 업무는 물론 골프도 즐겼다. 고산병은 사람 체질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나는 서울 귀임 길에 미국에 들려 그랜드 캐년과 라스베가스를 둘러보며 미국 자연의 웅대함과 인간의 의지를 몸으로 느꼈다. 그랜드 캐년은 자연 그대로이고 라스베가스는 인간이 살지 못하는 사막에 완전 인공적으로 개발된 도시이지 않은가?

 

나는 나의 첫 해외근무지인 에콰도르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92번째 나라 콜롬비아 이야기로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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