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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43)] 21. 헝가리(Hungary)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43)] 21. 헝가리(Hungary)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평화통일기원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 중 헝가리 평원, 강명구, 2017.10). ⒞시사타임즈
▲< 국기 >적색은 힘, 백색은 신념, 녹색은 희망을 상징. < 국장 >방패의 좌측 은색은 4개의 강, 우측에는 쌍십자가와 3개의 산과 그 위에 왕관. ⒞시사타임즈

 

 

 

< 국가 개관 >

 

헝가리는 중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이다.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EU, OECDNATO 회원국이다. 주민은 대부분 우랄족에 속하는 헝가리인이다. 국토는 헝가리 평원이라 불리는 평원을 중심으로 하여, 예부터 다양한 민족이 침입하여 정착하였다. 국토의 중앙에 다뉴브강이 관통하여 2등분하고 있다. ·헝가리는 1892년 조선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 우호통상조약 체결로 공식관계를 시작하였으나, 1910-89년 동안 제국주의, 동서냉전으로 관계가 단절되었고 1989.2월 외교관계를 복원하였다.

 

Hungary is a landlocked country in Central Europe. Its capital is Budapest. It is a member of EU, NATO, OECD. The official language is Hungarian. After 158 years of Ottoman occupation(15411699), Hungary was integrated into the Habsburg Monarchy, and later constituted half of the Austro-Hungarian dual monarchy (18671918). It was a great power until World War I. It was succeeded by an authoritarian regime, and then a Communist era (19471989). Upon collapse of Eastern Bloc in 1989, it became a parliamentary republic.

 

 

1. 국명(Country) : 헝가리 (Hungary)

2. 수도(Capital) : 부다페스트 (Budapest)

3. 면적(Territory) : 93,030

4. 인구(Population) : 9,942,000

5. 국민소득(GNI) : US$18,500

6. 언어(Language) : 헝가리어 (Hungarian)

7. 독립일(Independence) : 895

 

 

광시곡의 나라, 헝가리

 

유럽 한 가운데 위치하여

동서남북 일곱나라에 빙 둘려있네

바다는 언감생심

벌러톤호로 만족하네

 

다뉴브강 잔물결 천리를 흘러

부다페스트 가르고

국토를 양분하네

 

로마 몽고 오스만 오스트리아 나찌 소비에트

역사의 소용돌이 온몸으로 받았네

나라의 흥망성쇠

저 강이 알고 있네

 

망치를 버려라

자유경제 민주정치

우리의 갈 길이다

 

온 땅이 뜨거운 물

친구들아 다 와라

온천욕하자

 

헝가리 광시곡 15번을 틀어라

라코치 행진이다

힘차게 나가자

 

빨강 하양 초록 삼색기를 흔들어라

힘 성실 희망은 우리의 표상

 

힘차게 전진하자 라코치에 맞춰

평화와 자유를 향해

 

우리는 헝가리인이다 !!!

 

 

Franz List's Land, Hungary

 

Situated in the center of Europe

Being circled fully by seven countries

Sea is never theirs

Lake Balaton is only enough

 

Flowing down 415km, Danube ripples

Separating Budapest into the east and the west

Dividing the land into two parts, too

 

Rome, Mongolia, Osman, Austria and Soviet came here in turn

Hungary has directly faced the wave of history

Never ask up and down of this land

Only that Danube River has watched it.

 

Throw away hammers and sickles

Free market and Democracy

That's what we are heading for

 

All lands are full of hot springs

Friends, come to my land, all of you

Let's take a hot spring bath for healing, together

 

Listen to No 15 of Hungarian Rhapsodies

It's March Rakoczi

Let's march in strength to the tune of it

 

Wave our flag of Red, White and Green

Power, integrity and hope are our ideals

 

Let's forward in strength to the rhythm of Rakoczi

For peace and freedom

 

We’re Hungarians !!!

 

1. 헝가리 약사

 

헝가리의 국토는 헝가리 평원이라 불리는 광대한 평원을 중심으로 하여, 예부 터 다양한 민족이 침입하여 정착하여 왔다. 고대에는 판노니아라 불리고, 판노 니아족 등이 거주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제국에 점령되었다.

 

헝가리인이 10세기 말 헝가리 왕국을 수립하여, 14세기부터 15세기경에는 주 변의 여러 왕국과 동군 연합을 맺고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을 때까지는 중 앙 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헝가리는 15세기 후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강 력한 압력을 받았다. 1526년에 헝가리는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패 배하여,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였다. 1541년에 부다가 함락되어, 그 결과 동남부와 중부의 3분의 2를 오스만 제국(오스만 제국령 헝가리), 북서부의 3분 의 1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에 의하여 분할 지배되어(왕령 헝가리), 양 제국이 충돌하여 만나는 최전선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군사적으로 후퇴 하자,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 따라 헝가리 및 헝가리 국왕령의 크로아티아와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에 할양되었다.

 

상당기간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왕국에서 이중군주로서 군림하였으나, 양국은 외교 등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정부를 가지고 연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에 헝가리는 제 국으로부터 분리독립(1918)하면서 공화국이 되었다. 1918년에 헝가리 최초 의 공화제국가인 헝가리민주공화국이 성립하여, 사회민주당계의 카로이 미하이 가 초대 대통령 및 수상을 맡았다. 1920년에 체결된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대의 왕국령 가운데, 면적 의 72%, 인구의 64%를 잃고, 헝가리인의 전인구 중 반 수 가량이 헝가리 국 외로 남겨지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를 대신하는 왕이 선출되지 않음에 따라, 192031일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으로서 통치하는 헝가리 왕국의 성립 을 선언하였으나,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후원 하에 1930년대 말 일부 영토를 회복하였다.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또한 나치 독일의 압박을 받아, 추 축국에 가담하였으나, 194558일의 패전까지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치렀 다. 패전에 의해 소비에트연방에 점령된 헝가리에서는 공산화가 추진되었다. 194621일에 군주제가 폐지되고, 헝가리 왕국은 명실 공히 붕괴하였다. 소비에트연방 점령하의 헝가리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 리 공화국(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98910월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청산하고 자유민주주의로 전환했다.

 

2. 헝가리에서 

 

 

 

▲(1849년에 건설되고 2차 대전 후 1949년에 재건설된 세체니 다리). ⒞시사타임즈

 

나는 1991년도 7월에 혼자서 비엔나를 방문한 적이 있다. 비엔나 호텔에 비치 된 안내지도를 뒤적이다가 비엔나에서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가 기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음 날 무작정 부다페스트행 첫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름다운 다뉴브강이 흐르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강을 끼고 부다 지 역과 페스트 지역으로 나뉜다. 페스트는 현대 도시의 상업 중심지로 오페라 하우스, 국회 의사당과 바치 거리 등 번화가가 밀집해 있었다. 나는 저녁 마지 막 기차로 다시 비엔나로 가야할 일정이 있어 마음이 급하였다. 페스트 시가지 를 주마간산으로 구경하고 세체니 다리를 건너 부다 지역으로 갔다. 세체니 다 리는 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9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다리이며 헝 가리 사람 들이 가장 좋아하는 다리이다. 다리 건설을 전적으로 재정지원하고 주도한 세체니의 때 늦은 효성이 담겨 있고, 서민을 사랑한 그의 정신이 깃들 어 있기 때문이다.

 

부다 지역에는 부다 왕궁, 마차시 교회, 어부의 성채 등의 볼거리가 많았다. 나는 시내를 조망하기 위하여 겔레르트 언덕을 올랐다. 마침 거기에 한국 관 광객인 듯한 5명이 정장차림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요즈음은 유럽 여행객중 제일 많은 이가 한국인이지만 1991년만 해도 동양인은 90% 이상이 일본인이 었다. 나는 반가워 그 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그들은 평양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반가워 나는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다 .” 라며 적극적으로 말을 건넸다. 1991년은 헝가리가 민주화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였다. 상대는 5명이고 나는 혼자였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경원시 하 며, “일 없스다.” 하면서 나를 피하여 저쪽으로 급히 가버렸다. 내가 해외에서 만난 첫 번째 북녘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후 해외에서 북녘 사람들을 가끔 만 났는데, 그때마다 나는 반갑게 적극적으로 그들을 대했다. 같이 근무하는 안기 부 참사관이 나에게 혼자서 북녘 사람들 여럿을 만날 때는 피하라고 조언했지 만 나는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대했다. 그는 나에게 납북될까봐 걱정했지만 나는 걱정치 않았다. 남북 개인 접촉이나 방북을 금하는 우리 정부였기에 나는 북녘에 자발적으로 갈 용기는 없었으나. 납북당할까 하는 두려움은 없었다. 힘 들겠지만 우리 조국의 나머지 반쪽을 경험할 좋은 기회일 테니까......

 

야경이 매우 아름다운 부다페스트를 나는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2시간을 유람선을 타고 다뉴브강을 따라 관광하였다. 그리고 굴라쉬로 저녁을 먹고 겨우 마지막 비엔나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아쉬운 심정으로...... 언제 다시 가족과 같이 와서 여유를 갖고 헝가리 산천을 둘러보고 온천욕도 하고 .....

 

2. 헝가리를 달리며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 헝가리 평원에 눈부신 평화의 햇살 >

 

▲(헝가리 평원의 하늘, 2017.10). ⒞시사타임즈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로 넘어서는 길은 산도 없고 강도 없고 햇살만이 들판에 축복처럼 가득하였고 거미가 햇살에 날리는 거미줄이 수도 없이 얼굴에 와서 걸리곤 하였다. 또 하나의 국경 너머에는 얼마나 다른 삶이 펼쳐질지 자못 기대가 된다. 1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은 헝가리어로는 두나강이라 불리는 도나우강과 평행을 이르며 뻗어있다. 국경을 넘어서자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친근하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인들 같은 체격이 아니라 갈색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이 더 귀엽고 예뻐 보인다. 마을 앞에 여러 형태로 서 있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도 어디서 많이 본 듯 친근감이 간다.

 

어쩌면 그들의 선조가 마자르족이기 때문이리라. 마자르족은 우랄산맥 동쪽에 살던 아시아계 유목 기마민족이다. 아직 학자들이 증거를 찾지는 못 했지만 마자르족이 우리가 아는 말갈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우리의 북쪽에 이웃하며 살며 말갈족으로 불리다가 여진족으로 불리다가 만주족으로 불리던 그 사람들 말이다. 마자르인들은 유럽 역사 속에 한번도 묻히지 않고 아틸라 때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고, 국명도 훈족의 후예임을 명시하며 훈족(Hun)의 영토(Gary)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최고의 기마 전사들이었던 선조들을 그리워하며 판노니아 대평원에 정착하며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이곳 도나우강 중, 하류에서 시작되는 유라시아 초원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쪽 몽고까지 이르는 8,000km에 이르는 지상 최대의 초원을 일컫는다. 이 광대한 초원에서 모든 생명은 살아남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하여 저마다의 생생한 음표를 변주곡(變奏曲)으로 찍어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들이 나그네의 마음을 기분 좋게 자극하여 두나 강물처럼 넘실거리게 한다. 끝없는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노루들이 나를 저 멀리서 보고 놀라 질주하는 모습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간혹 놀란 토끼들도 보인다. 평화로운 초원에 침입자가 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초원은 고대 인류의 문명이 오고간 고속도로와 같은 곳이다. 지금껏 밟아보지 못했던 거대한 초원의 서쪽 끝에 서니 좁은 땅에서 바둥바둥 살았던 삶 자체가 드넓게 펼쳐지는 것 같고 가슴이 찌지직 펼쳐지면서 내 자신이 거인이 된 것 같다. 거친 땅 초원에서는 유목민, 가축, 야생동물 모두가 강인한 것들만 살아남아 세대를 이어간다. 점심에 들어간 식당에서 메뉴판을 뒤지다 붉은 색깔의 뜨거운 국물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주문하였다.

 

헝가리에는 아시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곳엔 우리의 육개장과 비슷한 음식인 굴라쉬가 있다. 음식에 다양한 마늘과 고추가 사용되는 것도 신기하다. 고추는 우리 고추보다 더 맵다고 한다. 음식점에 들를 때마다 쌀밥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굴라쉬를 시켜 빵과 함께 먹는다. 김치 대신 저린 양배추로 만족한다. 길거리 음식으로는 랑고스가 있다. 기름에 뛰긴 빵 위에 사워크림과 치즈를 올려서 먹는데 식당을 못 만나는 날에 길거리에 이것이 보이면 두어 개 사 먹으면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 내가 랑고스를 사들고 게걸스럽게 먹자 옆에서 먹고 있던 한 소녀가 멋쩍게 웃음을 보내준다. 함께 랑고스를 먹으면서 생긴 우정의 표시이리라! 나도 웃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가 헝가리 평원의 가을바람에 살랑거렸다. 약간 다갈색 피부, 특히 비취색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그녀는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신기한 양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곳이 그 옛날 훈족들의 말발굽 먼지가 천하를 덮을 것 같이 일어났던 곳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유목민에 관한한 그것은 맞지않다. 그들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승자는 그들이었지만 역사는 그들이 얼마나 무섭고 야만적이었는지를 묘사한 것이 전부이다. 헝가리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조차도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으니까. 다만 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쓸 때 성을 먼저 쓰고 연월일 표시도 그렇고 주소도 우리와 같은 순서로 쓴다. 음악도 우리와 같은 5음계로 구성되어 우리의 전통가락과 비슷한 음률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끝없이 초원길을 따라 이동하며 자손을 낳고 그 자식들이 이어서 서쪽으로 이동해왔을 뿐이다. 다만 중국의 만리장성이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설이 전해질 뿐이다.

 

중국 북쪽에는 끊임없이 중국을 약탈해 역대 중국 황제들의 골칫덩이였던 민족들이 있었다고 전해질 뿐이다. 진시황은 흉노(匈奴)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한무제는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곽거병 같은 장군을 파견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이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었다.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지구에서 사라졌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듯하다가 4세기 중반 이라는 이름으로 서양 역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온 그들이 어떻게 초원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4세기 말 서양문명의 경계인 도나우강까지 뻗어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대륙에서 민족대이동의 단초를 만들었다. 공포에 질린 게르만 민족은 밀물처럼 로마국경으로 쫓겨 간다.

 

 

이를 막아내지 못한 서로마제국은 결국 종말을 고하고 만다. 게르만족의 이동은 신의 채찍이라 불리며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으로 기록된다. 당시 로마는 몰락(沒落)의 길을 걷고 있었고 406년 로마는 훈족과의 충돌을 막기 위하여 볼모를 보내기로 하고 조공도 바쳤다. 훈족은 당시 세계 최고의 기병대였다. 그들은 먼 거리에서 엄청난 활을 쏟아붓고 순식간에 적을 초토화시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서에는 그들을 언급하기를 꺼려했지만 유목민족들은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질러 인류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그들은 문화의 전파자였으며 한때 세계를 지배하고 지금은 중앙아시아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흉노는 기원전 4세기에 처음 중국 역사에 등장한다. 이 중앙 유라시아 유목민들이 세계 문명을 형성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 거대한 세력은 흉노족으로, 튀르크 족으로, 몽골족 또는 스키타이족으로 알고 있지만 문화 복합체 성격을 띠고 있다. 단지 주도세력이 흉노냐, 튀르크냐, 몽골이냐의 문제였다.

 

훈족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로마로부터 조공(租貢)을 받고 로마의 장군의 아들 아이티우스는 훈족에 볼모로 가 살게 된다. 볼모로 훈족들과 함께 살면서 훈족의 왕세자인 루빌라이와 친하게 지냈다. 성인이 되어 볼모에서 풀려난 아이티우스는 훈족과 동맹을 맺고 훈족의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했다. 433년 그는 전쟁 때 도와준 대가로 훈족에게 정착할 땅을 주었다. 그곳이 헝가리이다. 헝가리의 국명도 에서 유래를 했다.

 

이제 훈족은 약탈하고 조공을 받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더 이상 불안정한 유목 생활은 필요 없어졌다. 그들은 안정된 정착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아틸라는 더 이상 동방에서 온 약탈자의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황제였다. 이제 훈제국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아랄 해, 서쪽으로는 대서양 해안에 닿았고 남쪽으로는 도나우 강, 북쪽으로는 발트 해까지 이르렀다. 아틸라가 죽자마자 네 명의 왕자들이 왕위를 놓고 싸우고 피지배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훈족은 분열했고 분열된 나라는 오래가지 않았다. 훈족은 이제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훈족이 헝가리나 유럽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훈족은 그곳에 녹아들어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 다시 칭기즈칸의 기병대가 대초원을 가로질러 세계로 돌격하여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를 넘어 독일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제 마음껏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다. 지금의 거대한 러시아나 중국, 인도의 경계가 그의 통치 시절 만들어졌다. 칭기즈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유럽은 아시아를 몰랐고 아시아는 유럽을 몰랐다. 그는 실크로드를 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놓았다. 이 길을 통해 물자만이 아니라 문화와 지식과 종교가 왕래하게 됐다. 실크로드는 지극히 현실적인 길이였지만 지금은 국가이기주의의 음습함 습기 때문에 전설의 이끼를 벗지 못한 채 현실의 길이 되지 못하고 있다.

 

몽골의 말발굽을 벗어나자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왔고, 또 다시 오스트리아 제국이 수탈과 억압을 자행했다. 오스트리아 동맹국으로 불가피하게 참가한 1차 대전과 히틀러가 헝가리의 옛 영토를 회복해준다는 약속하여 치룬 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패전국이 되어 경제는 파탄에 빠졌는데 이번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진주해 들어왔다. 헝가리는 그렇게 피멍이 들어왔었다.

 

헝가리에서 둘째 날 묵은 곳은 죄르이다. 죄르는 부다페스트에서 비엔나로 가는 중간 무역지로 번영을 누리던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한 조그만 도시이다. 마자르인들이 정착을 시작하던 곳이며 마자르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이 녹아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죄르 대성당은 헝가리 최초의 국왕인 이슈트반 1세의 명령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였는데 내부에 헝가리 국왕 중 가장 존경받는 라슬로 1세 국왕의 무덤이 안치(安置)되어있다고 한다. 이곳이 오스만 튀르크가 오스트리아로 진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이용하던 슬픈 도시이기도 하다.

 

우리의 민족 정서가 한이라면 헝가리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살률이 한국 다음으로 2위이고 알코올중독자 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건물은 지으면 파괴되고, 그 잔해 위에 다시 지었고 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치면 우리보다 몇 곱절 더 할 헝가리의 하늘에 이젠 전쟁의 먹구름이 싹 가신 청명하고 평화로운 가을 하늘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 이들에게는 이제 슬픈 역사를 끝내고 평화를 구가(謳歌)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도 평화협정이 빨리 체결되고 조속히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막는 모든 조치가 하나씩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평화의 성지(聖地)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유라시아 대륙 16,000km 횡단 대장정, 강명구, 2017.10). ⒞시사타임즈

 

(22번 째 세르비아 이야기로 계속)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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