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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4)]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3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4)]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3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3. 내가 만난 사람들 (1)

 

(Shumarov Gyrat :우즈벡 세계언어대학교 총장)

 

▲가이랏트 총장과 아내와 함께, 2003.9 (c)시사타임즈

 

1943년 생으로 169cm에 63kg의 크지 않은 전형적인 우즈벡인이다. 첫 만남은 세계 언어대학교에 배정된 한국어단원이 교체되면서였다. 새로운 단원을 배속시키기 위하여 세계 언어대학교를 방문했는데, Gyrat 총장이 직접 만나자고 했다. 첫인상에서 깐깐한 학자라는 느낌을 받았고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 학교에 벌써 5년째 총장직에 재임 중이라 했다. 나는 단원의 정착 과정에 총장의 배려를 부탁하고 자리를 떴다.

 

그 후에 그 대학으로부터 컴퓨터 교실 지원요청서가 접수되었다. 당시는 외환위기로 사업이 위축된 때였지만, 다행히 본부의 승인을 받아 컴퓨터 교실을 세계 언어대학교에 개설했다. 규모는 크지 않았다. 협력단이 컴퓨터 20대를 기증하고 학교 측에서 교실과 책걸상 등을 지원한 게 전부일 정도로 소규모였다. 그러나 총장은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그 후에 Gyrat 총장은 나에게 한국학에 대한 강의를 부탁하였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라고 적극 사양했지만 총장의 거듭된 부탁에 계속 거부만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고, 또 이것도 나의 개발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 무보수 조건으로 승낙하고 일주일에 두 시간씩 강의를 했다. 강의라기보다는 한국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줬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단군설화를 시작으로 한국 역사, 처용가에서 시작하여 김소월의 시에 이르기 까지 한국문학, 새마을 운동 등 한국의 경제 발전 등에 대하여 체계 있는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강의했다. 나는 한국학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강의해 본적은 전혀 없었고 당시 일인사무소로 처리해야할 업무 때문에 강의 준비는 불가능한 형편이었다고 핑계 아닌 핑계를 스스로 해본다. 그저 한국 사람이고 한국에서 대학교육까지 마쳤기에 그들보다 한국에 관하여 더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Gyrat 총장이 저녁 식사를 초대하더니 학생들 설문조사에서 나의 강좌가 최고로 유익한 강좌라는 결과가 나왔다면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2003년 9월에 동 대학으로부터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문을주 선배의 대학 동창인 조은상 영재(주)사장이 고려인을 돕고 싶다고 하여 우즈벡 세계언어대학교에 컴퓨터교실을 지원하도록 연결해 주었다. 동 대학은 조 사장의 후원으로 영재 컴퓨터교육센터를 개설하고 2005년 4월 조은상 사장 가족을 초청하여 그에게 경영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나와 김용표 소장도 초청되어 우리는 기꺼이 동행하여 조 박사의 학위 취득을 축하했다.

 

Gyrat 총장은 2004년 4월, 내가 우즈베키스탄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온 이후에도 후임인 김동호 소장과 유사선 봉사단장에게 나의 안부를 항상 묻고 나를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총장은 2007년 1월에 교육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2011년 12월까지 재직하는 동안 한국에 공식 방문을 여러 차례 하였고 그때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내가 외국에 근무 중이어서 성사되지 못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유라시아 16,000km 횡단 마라톤 중에 딱 절반인 타쉬켄트를 2018.4월 통과할 일정이었다. 나는 그때 강명구의 열렬한 응원자였고 후원회가 준비하는 8,000km 돌파 기념 타쉬켄트 평화대동제 준비위원장이었다. 나는 KBS를 열심히 교섭하여 KBS는 마침내 유지향, 최진영 이정태 특별 취재팀을 파견하여 평화마라토너의 타쉬켄트 통과와 기념 평화대동제를 취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출발 전 날 유지향 기자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긴급 입원하게 되어 정연욱 기자로 대체되었다. 그때 Gyrat 장관과 허선행 타쉬켄트 세종학교장 두 분이 타쉬켄트 대학생과 고려인을 500여명 동원하여, 타쉬켄트 번화가를 경찰 싸이트카 호위를 받으며 3km를 평화행진 했고 바브르 공원 안에 있는 서울공원에서 평화대동제를 KBS와 UTV가 취재하는 가운데 성대하게 열었다. 또한, Gyrat 장관은 강명구 평화마라토너와 나를 우즈벡 3개 대학에 초청하여 대학생들에게 한국의 발전과 도전을 특강하게 주선하였다.

(참조 :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38214)

 

(사마르칸트외국어대학 총장, 김인태 한국어학과장, 김미화 교수)

 

Mamatov Muhammad(1950년생), 김인태(1963년생) 한국어학과장, 김미화(1978년생) KOICA 단원 교수는 사마르칸트에 한국어 붐을 일으킨 삼총사이다. 사마르칸트는 ‘티무르’라는 영웅이 14세기에 중앙아시아를 통일하고 수도로 정하여 번성한 도시이다. 지금도 종교 문화 천문 과학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관광객이 줄을 잇는다. 티무르 대왕은 파란 빛을 좋아하여 도시 전체가 파란 빛이 감돌고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김인태 교수, Mamatov 총장과 김성환대사, 2003.9 (c)시사타임즈

 

김인태 교수는 1995년 사마르칸트외국어대학을 방문, 대학을 설득하여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치기 시작했고, 1998년에 드디어 한국어과를 설치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김미화(1978년생) 봉사단원은 2002-2004년까지 한국어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한국어 연극 공연을 기획하고 감독을 맡았다. Mamatov 총장과 전임 Abdullaev Nigmatovich 총장은 두 김 교수를 믿고 한국어과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다. Mamatov 총장과 Nigmatovich 총장은 전형적인 학자로 한국의 발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우즈베키스탄이 한국과 관계를 모든 면에서 증진해야 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Nigmatovich 총장은 2003년 6월, 나에게 ‘한국의 발전과 우즈베키스탄에 주는 교훈’이라는 주제로 특강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그런 주제라면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김성환 대사가 더 적격이라고 하며 대사를 추천했다. 김 대사는 바쁜 일정 중에도 강의 특강요청을 흔쾌히 수락하고, 강의 자료를 열심히 스스로 준비하여 2003년 9월에 특강을 실시했다. 사마르칸트 외국어대 측은 김성환 대사에게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김인태 교수와 마마토프 사마르칸트 외국어대히교 총장 (c)시사타임즈

 

2003년 8월에 새로 부임한 Mamatov 총장은 한국학 특강을 나에게 요청했다. 나는 우즈벡 세계언어대학교에서의 강의를 한 경험을 살려 중요한 내용만 정리하여 특강을 실시했다. Mamatovich 총장은 나에게도 명예정치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독신이었던 김인태 학과장은 사마르칸트에 단기 봉사하러 온 미모의 KBS 작가와 만나 서로 첫 눈에 반하여 바로 결혼하고 지금은 부인을 닮아 예쁜 딸만 셋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한국을 그렇게 배우고 싶어 했던 Mamatov 총장이 2005년 7월에 작고했다는 비보를 나는 서울에서 들었다.

 

“Mamatov 총장님, 가난도 시련도 없는 그 곳에서 이제 편히 쉬소서. 총장님의 후학들이 뜻을 받들어 한국 못지않은 우즈베키스탄을 만들 겁니다.”

 

(김성 전 고려인예술인회장)

 

김성 회장은 1936년 생으로 1살 때 엄마 품에 안겨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스탈린에 의한 강제 이주를 당했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산 증인이다. 165cm의 작은 키에 66kg의 단단한 체구를 지녔다. 타고난 달변가이며 예술가이다. 소련연방시절에는 재 소련 조선인 회장을 역임하여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독대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언변이 좋은 절세의 호남아로 통일에 대한 집념이 강하여 그가 1994년 7월에 의문사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김영삼 대통령과 좋은 결과를 가져 왔을 텐데 하며 무척 김일성 주석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김일성 주석 사후인 1996년부터 북한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우리 대사관과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항상 북의 보복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2003년 10월쯤 당시 대사관에 있었던 우리 사무실로 나를 찾아 왔다.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한지 1년 반이 지나서야 영사로부터 협력단의 존재를 알았다는 거였다. 아마 영사에게 무슨 부탁을 하니 협력단을 찾아 가보라고 한 모양이었다. 나에게 고려인 가무단의 활동지원금과 한국에 초청공연을 주선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나는 협력단의 이념과 사업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고 그러한 일은 우리 협력단의 사업 대상이 아니고 재외동포재단이나 국제교류재단의 업무에 속한다고 안내해 주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간곡하게 여러 건을 나에게 요청했으나 협력단 사업과는 맞지 않아 협조해 줄 수가 없었다. 그의 집요하고도 간곡한 부탁에, 나는 사비로 그 고려인 가무단에 장구, 북, 징, 꽹과리 등의 사물놀이 한 세트를 서울에서 주문하여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 회장은 2004년 9월 중부대학교 대학원장 이재천박사의 초청으로 서울에 왔다. 나는 아내를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우리 집에서 식사 대접을 했고, 우리 어머니에게 인사까지 하게 했다.

 

2012년 3월, 이재천 박사를 만날 기회가 있어 김성 회장의 안부를 물었더니 벌써 몇 년 전에 타쉬켄트에서 괴한의 칼에 의해 살해당했단다. 그것이 단순 강도인지 그가 항상 경계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 그는 한 많은 고려인으로 태어났으나 타고난 언변과 강단 있는 기질로 한 시대를 나름대로 주름 잡았고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로 생을 풍미하며 지냈다. 고려인가무단장인 딸이 그의 예술가 자질을 이어 받아 활동 중이며 그녀의 아들 그러니까 김 회장의 외손자가 2003년 당시 7살 이었는데 가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데 그는 특히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잘 불렀다. 몸짓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애를 리틀 마이클 잭슨이라고 불렀다. 지금쯤 24세 청년으로 성장하여 좋은 가수가 되었을 텐데……. 김성 회장은 특히 그 손자를 귀여워했다. 한번 보고 싶다. 그의 춤과 노래 그리고 그 얼굴에 있을 김성 회장의 희미한 모습이라도…….

 

(정기호 한인회장)

 

▲박사학위 받는 정기호 회장 부부와 누크스 대학 총장 (c)시사타임즈

 

정기호 회장은 1955년생으로 광주고등학교 출신이다. 160cm를 갓 넘는 키에 70kg은 너끈히 상회하는 당당한 체구이다. 얼굴은 그야말로 잘못 떨어진 메주 덩어리 같다. 아들 희완이와 딸 수이는 타쉬켄트 국제학교에서 모범생이었고 후에 미국 보스톤 대학과 뉴욕대학교에 각각 진학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가 우즈베키스탄에서 TOW(Top of World)를 창업하여 성공한 기업인으로 2002년도 당시 한인회를 5년째 일사불란하게 화기애애하게 이끌고 있었다.

 

2002년도 가을, 그리고 2003년도 가을에 있었던 교민 체육대회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수준, 열기, 재미가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의 운동회보다 더 했다. 교민을 청백 두 조로 나누어 한 달 전부터 모여 연습을 했다. 운동회 날은 교민 대사관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우즈베키스탄이 내가 네 번째 주재하는 나라인데, 전에 주재하던 곳에서는 교민회 체육 대회에 극히 일부의 교민이 참여했고 그저 족구나 배구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은 축구, 남녀 배구, 족구, 농구, 달리기, 계주, 줄다리기, 후프……. 그리고 양 팀의 응원전도 연고전을 방불케 했다. 장훈 대사나 김성환 대사도 교민회 체육대회 등 단합된 모습을 두고두고 칭찬했다.

 

정 회장의 부인은 이점순이다. 이름은 부군 외모처럼 아주 촌스럽다. 나는 부인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다만 정 회장보다 15년은 어려 보인다. 163cm에 50kg 이하의 몸매에 중국의 서시나 양귀비를 뺨치는 미모와 자태를 지녔다. 그러니, 정 회장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한국적으로 말하면 영구 부부요, 중국적으로 말하면 수호지에 나오는 반금련과 무대 부부요, 서구적으로 말하면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모습이며, 그리스 신화로 말하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대장장이 못 생긴 헤파이토스의 모습이다. 나는 두 부부가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자못 궁금했다.

 

그래서 2003년도 정 회장 자택에서 열렸던 연말 송년회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물어 봤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어떤 이가 대신 대답했다. 정 회장의 돈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정 회장의 입에서 나왔다. 결혼 당시 거의 무일푼이었으며 은행의 말단으로 근무하다 작정하고 우즈베키스탄에 이민 와서 처남과 같이 창업하여 겨우 몇 년 전에야 오늘의 부를 이루었다고. 보통 결혼은 그만 그만한 수준에서 맺어지는 것이 통상이다. 유유상종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아니었다.

 

정 회장은 내가 결혼을 잘 했다고 5배는 남는 장사를 했다고 칭찬인지 야유인지 만날 때마다 나를 놀려 댔다. 누가 돈에 밝은 기업가 아니라고 할까봐 아주 수치까지 들먹이며……. 그래서 오늘, 정 회장에게 그동안 당한 앙갚음을 한방에 다 해주기로 작심했다. 김성환 대사 내외, 전임 서건이 대사, 교민 간부가 다 모인 그 자리에서 밝혔다. 정 회장 말대로 내가 아내와의 결혼으로 5배 남는 장사를 했다면 정 회장은 10배 남는 장사를 한 것 아니냐고 좌중에게 동의를 구한 것이다. 그랬더니 모인 모든 사람들이 정 회장 부부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내말이 틀렸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교민회 임성수 부회장이 일어서더니 “정 회장은 이점순 여사와 결혼함으로써 10배 남는 장사를 한 게 아니고 평소 그의 영업 수익이 그렇듯이 최소 100배 이상 남는 계약을 한 것이다.”라고 말하자 나를 포함 모두가 동의하는 의미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나는 데도 정 회장 부부는 금슬이 참 좋다. 사업과 교민회 일로 그렇게 바쁜데도 토요일 오후면 둘이 운동을 한다. 운동하는 부인의 모습을 보면 어느 LPGA 선수도 그녀의 유연한 폼과 의상, 자태를 따르지 못할 것만 같다. 마치 천상에서 노니는 선녀 같다. 가끔 그들은 이민 후 죽마고우가 된 정순진, 이성희 사장 부부와 함께 라운딩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우리 모든 교민이 저 정도의 여유를 갖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한 정 회장 부부가 교민사회에 봉사하는 모습은 충직한 청지기였다. 새로 오는 교민, 교도소에 있는 교민, 사업으로 고민하는 교민, 고려인까지를 모두 주인 모시듯 한다. 그러니 교민회 체육대회가 그렇게 화합적이고 모든 교민이 다 모이는 것이다.

 

정 회장의 기업인으로서의 성공과 대학 지원의 공을 인정하여 누크스 국립대학교에서 명예 경제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고 나도 그 자리에 대학 측으로부터 초청되어 대표 축사를 하였다.

 

 

그때 축하객으로 온 누크스 고려인회장이 나에게 누크스 고려인회를 지원해 달라고 하였다. 사연인즉, 누크스 고려인회가 지방 정부를 설득하여 무상으로 경작지를 70만평 임대 받았는데 종자 구입 등 1년 치 영농비 5,000불을 지원해주던가 빌려 달라는 거였다. 나는 협력단 사업으로 지원하기가 어렵다고 하자 고려인 회장은 실망했다. 그러자 정 회장이 나에게 제안했다. 우리 둘이 사비로 지원해 주자, 우선 빌려 주는 형태로 하고 1년 후 갚는 다면 영농기계 구입 등 적절한 방법으로 그들을 다시 지원하자는 거였다. 그의 의로운 제안에 나는 협력단 소장으로서 거부할 수 없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나는 한국으로 왔고 누크스 고려인회가 그 경작지를 성공적으로 영농하여 우리에게 빌린 돈을 정 회장에게 갚았는지, 그 뒷이야기를 모른다. 다만 힘들게 살아온 누크스 고려인들이 그 돈을 종자돈으로 하여 자립의 발판을 만들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무실 일 때문에 나는 정 회장을 그 뒤로 만나지도 못했다. 아마 사업일 교민 도와주는 일로 여전히 바쁘게 지낼 것이다. 그러나 토요일이면 그 선녀와 운동은 계속 하겠지…….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녀와 못 생겨도 아주 못 생긴 나무꾼!!!

 

(김태봉 경공업성 차관)

 

▲우즈벡 경공업성 김태봉 차관과 송소장 부부 (c)시사타임즈

 

1957년 생으로,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갑을방직(주)에 입사하였다. 175cm에 70kg. 누가 봐도 잘생긴 한국인이다. 그가 과장 시절, 갑을방직이 우즈베키스탄에 첫 방직공장을 건립할 때였다. 그는 부장으로 진급하여 갑을방직이 세운 세 곳 공장을 총괄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바쁜 일과로 웬만한 교민이 즐기는 골프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인 기술자에게는 물론, 만 명에 육박하는 우즈벡 근로자들의 복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나는 장관이나 타쉬켄트 시장, 대학총장들을 만날 때마다 김태봉 부장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2002년 9월, 그가 우즈베키스탄 경공업성 차관에 임명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면화재배가 주인 농업국이며 중공업은 없다시피 하고 면화를 바탕으로 한 경공업이 최대 산업이다. 그는 물론 러시아와 우즈벡어를 잘 했지만 국적은 여전히 한국인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김태봉 부장의 기술 공장 설립 및 운영에 대한 경험, 우즈벡 근로자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카리모프 대통령이 초법적으로 외국인을 차관으로 임명했다는 거였다. 물론 카리모프 대통령이 독재자라고 국내외의 비난을 받고 있지만 김태봉 부장의 차관 발탁을 보고 경공업육성에 대한 그의 열정과 순수함을 알 수 있었다.

 

김태봉 차관은 임명된 후에 내 사무실에 세 번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첫 번은 현대적 방직 공장을 설립하는데 협력단의 지원을 요청했다. 나는 성격상 무상원조 보다는 유상원조에 가까우니 경제담당 참사관과 협의하라고 안내했다. 그 후 한 달쯤 뒤 다시 찾아 와서 방직 기술자를 한국에 보내 연수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이것은, 이 나라를 위해서도, 한국인 차관의 입지 강화를 위해서도 지원해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규정에 따른 제안서를 제출 받아 본부에 보고하여 시행했다.

 

김 차관은 1년 남짓 경공업부에서 차관으로 근무한 뒤 사직했다하며 다시 우리 사무실에 찾아 왔다. 사연인즉 대통령의 의지를 받들어 의욕적으로 일을 하려 했으나, 위로는 장관 밑으로는 국과장들 하고 의견이 다르고, 예산의 뒷받침이 없어 어떤 일도 추진할 수 없었다고 하며 능력 부족을 느꼈단다. 우즈베키스탄 실정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십분 공감하고 이해했다. 그날 저녁, 술도 못하는 나였지만 2차, 3차까지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우즈베키스탄의 앞날을 함께 걱정하며…….

 

(우즈베키스탄 이야기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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