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07)
그때 나는 두 지도자의 무림의 대결을 상상했다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오늘은 우웨이에서 하루 쉬었다. 이곳도 실크로드의 중요 도시이고 역사도 깊어서 유적지도 많지만 나가서 구경할 기력이 없다. 하루 종일 잠자리에 누워있어도 도무지 몸이 상쾌하지 않다. 푹 온종일 자고 나면 좋겠는데 온몸이 각성이 된 상태라 잠도 깊이 안 든다. 나가서 밥 사 먹는 것도 귀찮아서 호텔 방에서 아침은 라면 점심은 지난번 교무님들이 사 온 곰탕 국물을 데워 먹었다. 한 일주일 쉬면 좀 나으려나 모르겠다. 아마도 석 달 열흘은 쉬어야 좀 피로가 가실 것 같다.
우웨이는 하서회랑의 주요 길목이다. 이 길목을 장악하는 민족이 서역과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전쟁 끝난 뒤에는 이긴 쪽의 문화와 종교가 이곳에 펼쳐진다, 그래서 이곳은 인종과 문화와 종교의 전시장이 되었다. 서방 문화와 북방문화, 중화와 혼합되어 실크로드의 문화를 역사적으로 잘 보전하고 있는 곳이 우웨이 지역이다.
‘뢰대한묘’는 명나라 때 세워진 천둥의 신에게 제사지낸 도교의 도관이었다는데 1969년 벽돌 무덤 2기가 발견되었고 이 고분을 뢰대한묘라고 부른다. 제1호 무덤은 장씨 성을 가진 무관 부부의 합장묘로 알려져 있는 데 이 안에 99개의 청동 조각이 웅장한 모습으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39필의 말과 14대의 전차, 17명의 무기를 든 병사, 28명의 노비가 행차하는 대열이었다. 이 대열 맨 앞에서 선도하듯이 서있는 것이 마답비연(马踏飞燕)이다.
뢰대고묘(雷台古墓)에서 동한 시기 청동 천리마 형상의 문물인 마답비연(马踏飞燕)이 출토되었다. 후한의 땅 무위의 북쪽 레이타이(雷臺) 지역의 묘에서 1969년 공사를 하던 중 청동마상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선두의 말이 제비를 뒷발로 밟고 나르는 모양의 마답비연(馬踏飛鳶)상은 단연 중국 조각사에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동상은 현재 간쑤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간쑤성은 이것을 성의 상징으로 진품을 확대하여 주요거리에 세워두었다. 또한 이 비마(飛馬)가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라는 국가전략 아래 웅비하는 현대 중국의 상징이 된다.
말은 오늘날 지구를 하나의 마을처럼 만든 정보 통신 혁명과 같은 것이었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 대륙간탄도미사일급 무기였다. 몽골은 800년 전에 인터넷 네트워크대신 말이 달리는 그물망 같은 네트워크를 완성해 유라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였다. 마답비연(馬踏飛鳶)상이 미술사뿐 아니라 역사학계에서도 주목받는 것은 흉노에게 시달리던 한무제가 꿈에도 그리던 한혈마이기 때문이다. 장건은 서역을 여행한 후 천리마라고 하는 한혈마를 발견하고 한 무제에게 보고했다. 한혈마는 키가 크고 힘이 센 말로서 천마(天馬)라고도 하는데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우수한 말인데, 흉노에게 시달리던 한의 무제는 이 한혈마를 탐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무제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대완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한의 사신들의 오만한 태도에 대완국의 왕은 대노하여 제의를 거절하고 되돌아가는 사신을 습격해 참살하고 대완마를 사기 위해 보냈던 보물도 빼앗아버렸다. 한 무제는 이에 기원전 104년 이사장군 이광리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보내 대완을 정벌하고 마침내 한혈마를 얻게 되었다. 한 무제는 한혈마를 얻은 후, 감탄하여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짓게 하였으며, 한혈마를 천마(天馬)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뢰대한묘(雷台漢墓)에서 나온 청동으로 된 마답비연(馬踏飛燕)은 이 한혈마를 모델로 만들었다. 말이 제비를 밟고 하늘을 나는 듯하다고 마답비연이다. 말이 고개를 쳐들고 앞으로 달리는 듯이 세 다리를 솟구치며 난 다리로는 하늘을 나는 제비를 딛고 선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금방 감동의 나래를 펴려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관우의 명마 적토마도 이 한혈마의 일종이다. 삼국지나 옛 중국영화를 보면 전면전이 벌어졌을 때 쌍방의 처참한 피해를 피하기 위하여 장수끼리 일합을 겨루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때 무술이 우수한 장수보다 훌륭한 말을 탄 장수가 백번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웨이는 고구려 출신 당의 장군 고선지가 자란 곳이기도 하다. 그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唐)나라 장군이다. 고선지는 스무 살 때 장군이 되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에 의해 AD 668년 패망하고 만다. 당은 고구려의 지배층과 백성 3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사막 지역 우웨이로 강제 이주시켜 버린다. 소련이 1937년에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20만 명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과 동일하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군에 편입되어 하서군의 4진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 어려서부터 사막 지역에서 자란 고선지는 당나라에서 사막전과 고산 전투의 최고 전략가가 된다. 서역 원정에서 보여준 고선지의 뛰어난 군사 전략은 후대에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 기술과 나침반 등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 동서 문화 교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741년 톈산산맥 아래에 위치한 달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고선지는 2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그는 비단길과 서역 지역을 관리하던 안서도호부에서 두 번째로 지위가 높은 장군이 된다. 그는 서역을 경략하고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까지 두 번씩이나 진출한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최고사령관이 된다.
고선지는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그는 이 마침내 파미르를 넘어 지금의 파키스탄, 소발률국은 물론 서역 일흔두 개 나라에서 항복을 받아 내었다. 고선지의 승전 소식에 당나라의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천축국까지 진출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가 당대 최고의 전략가이며 용장이었겠지만 그가 탄 말이 한혈마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내가 얼마 전까지 밀고 다니던 유모차의 이름도 나는 한혈마라고 붙였다.
이른 아침 공원에는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무리 지어 사교댄스를 추는 사람들도 보이고 삥 둘러서서 제기차기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무술은 주먹이나 발, 칼, 간혹 관운장이 휘둘렀을 청룡도도 보이고 봉을 휘두르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들은 싸우려고 무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서 무술을 연마한다. 우슈는 이제 태권도와 함께 올림픽 종목이 되었다.
그런데 무술이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을 무술영화나 무술소설이라 하지 않고 무협영화나 무협소설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협객과 관계가 있다. 서양에 기사가 있고 우리에 화랑이 있고 일본에 사무라이가 있으면 중국에는 협객이 있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기존 질서에 굴종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약자를 돕고 세상의 불의와 싸우면서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중국인들은 불합리한 현실에서 살면서 느끼는 불안과 좌절, 불만을 이런 비범한 협객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얻고는 했다.
내 학창시절 싸우던 생각이 났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이기기 위해서 싸운 건 아니었다. 지켜야 할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건 정말 간혹이었다. 겁이 많은 나는 결코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누가 나를 앞 잡아보고 싸움을 걸어오면 나는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 나는 굉장히 떨었다. 누가 좀 말려줬으면 좋으련만 아무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불구경과 싸움구경처럼 재미있는 것이 또 어디 있겠나? 얻어터져 피터지고 멍들기 일쑤였지만 자존심을 지켜냈다. 누구도 나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간 자기들도 일정 부분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은 그때 내가 싸움을 앞두고 떨었던 것보다 더 떨고 있을 것이다. 세계 유일의 미국과 맞짱을 뜨겠다고 작은 나라가 그것도 분단된 반 토막으로 덤비겠다고 나섰으니 얼마나 떨고 있을까? 강대국이라고 자처하는 중국과 러시아마저 꼬리를 내리고 영국, 프랑스, 이태리 등은 아예 미국의 애견같이 꼬리를 살랑이며 시키는 대로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것은 지켜야 할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5천 년 피땀 흘려 지켜온 것이다. 당대 지구상에서 최고의 슈퍼파워였던 수나라와 당나라와 맞짱떠서 이겼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떠나기 직전 2017년 8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은 전 세계가 지금껏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중장거리 전략 탄도미사일 화성 12형으로 괌도 주변에 대한 포위 사격을 단행하기 위한 작전 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공포 속에서 남북한 시민들은 살아야 했다. 그것이 어떻게 남북한 시민뿐이었겠는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소름이 확 끼친다.
이때 나는 두 지도자가 전면전이 일으킬 쌍방의 처참한 피해를 피하기 위해 말을 타고 무림의 결투를 하던지 황야의 결투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치사하게 서로의 시민들의 등 뒤에서 변죽만 올리면서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지 말고 두 지도자가 무림의 대결을 펼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우의 청룡언월도나 여포의 방천화극을 들고 일합을 벌이던지 황야의 결투를 벌이려면 스미스&웨건 M66 권총을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권련을 한 대씩 나누어 피우며 한판 승부를 벌인다면 세계적인 이벤트로 오히려 환호를 받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기면 북한이 핵 폐기 먼저하고 평화협정 조인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이기면 평화협정 먼저하고 미군철수하고 핵 폐기하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 무술에서 최고의 경지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굳이 싸우지 않고도 평화를 유지한다면 그게 최상의 경지에 이른 것이리라! 한자의 무(武)자에는 그친다는 지(止)자가 있다. 원래 무(武)자는 싸움을 그친다는 뜻이다. 진정한 무공을 갖춘 자는 싸움을 그치게 하는 능력을 갖춘 자이다.
중국의 현대 두 거물인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대결은 무(武)에 의해서 결정 났다기보다는 문(文)에 의해서 이미 결정 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45년 8월 10일 중국의 동북지역에 진입한 소련 홍군이 일본의 관동군을 궤멸시켰다. 일본의 패망으로 중국은 전승국이 되며 모든 불평등 조약은 폐기되며 단숨에 5대 강국의 하나로 국제적 지위가 상승하였다. 국공 양당이 합작해 치른 중일 전쟁 8년 동안 공산당은 세력을 확장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보내 전시수도였던 충칭에서 회담할 것을 제의했다.
중칭에 있는 동안 마오쩌둥은 회담만 하지 않았다. 그는 심원춘-설(沁園春-雪)이라는 시 한 편을 써 자신의 존재감을 중국 전역에 알렸다. 얼마 전까지도 장정 도중 걸린 무좀 치료를 위해 수백 년 묵은 마오타이주(酒)에 발을 밖는 산적 두목 정도로 알던 사람들 대부분은 놀라움에 가득 찼다. 장제스도 그가 시를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충칭 담판은 실패한 회담이었지만 마오쩌둥은 누가 더 매력적인 미래의 지도자인지 보여주는 성공한 회담이었다. 한 편의 시가 중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두 지도자가 무림의 대결 대신 시 대결을 펼치면 더욱 좋을 것이다.
「沁園春 - 雪(심원춘-설)」
북국의 풍광 천리에 얼음 덮이고 만리에 눈 날리네
바라보니 장성 안팎은 망망한 은세계여라.
도도히 흐르던 황하도 별안간 그 기세를 잃었구나!
산은 춤추는 은색의 뱀이런가
고원은 줄달음치는 흰 코끼리,
저마다 하늘과 높이를 겨루네!
이제 다시 날이 개이면
붉고 흰 옷차림의 모습은 유난히 아름다우리
강산이 이렇게 아름답기에
수많은 영웅도 다투어 허리 굽혔더라
아쉽게도 진시황, 한무제는 문재 좀 모자랐고
당태종, 송태조는 시재가 무디었느니
하늘의 아들 칭기즈칸도 독수리 쏘는 활 재주밖에 없었더라
그러나 모두가 지나간 일
정녕 영걸을 찾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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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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