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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06)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06)

노자는 “네가 가는 길이 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이제 어느덧 7월 말이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천지는 이슬에 덥혀있다. 새들도 울지 않고 개들도 기척이 없다. 10개월을 매일 새벽에 일어나 달렸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길 위에 섰다. 아직도 저 먼 곳, 기다림이 있고 설렘이 있는 곳, 새 시대로 들어서는 문을 향해 달려간다. 발아래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길이 어둠 속에 펼쳐져 있다. 하루하루 피로가 누적되는 가운데 사막의 무더위 속에서 몇 달을 달리다 보니 이제 기력이 많이 쇠해졌음을 느낀다. 눈을 뜨고 길 위에 나서는 것이 두려워진다. 오늘은 또 어떤 낯선 길에서 이 무더위와 체력의 고갈과 고독을 견디며 앞으로 나갈까? 지금 무위(武威우웨이)를 향해 달리면서 노자의 무위(無爲)를 명상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중국은 신실크로드의 전략구상인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의 일환으로 이곳 신장, 간쑤성 일대의 도로를 선진국 수준으로 잘 포장해놓았다. 도로는 선진국 수준인데 자동차문화가 오래지 않아 운전자들의 수준은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내가 달리고 있는 312번 국도는 상하이까지 5300km나 뻗어있는 중국의 척추와 같은 도로이다. 그 옆으로 고속도로도 잘 깔려있다. 그런데 고속도로 요금이 비싸니 중국의 화물차들이 거의 이 도로를 이용한다. 중국의 화물차는 그 어느 나라에서 본 화물차보다도 길고 큰 바퀴가 22개나 달린 공룡 같다. 대부분 트럭에는 여자가 같이 타고 있다. 장거리 여행 중에 밥도 해주고 옆에서 물도 따라주며 말동무도 해주는 부인일 것이다.

 

이 국도는 아직도 건설 중이어서 중간중간에 비포장도로로 연결되는데 이런 차들이 그런 길을 한번 지나가면 먼지구름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버섯구름보다도 더 고약하게 일어난다. 중국인들이 침을 뱉는 병은 결코 하루아침에 생긴 병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일상이 늘 이런 황사 먼지를 마시며 사는데 중국인들의 기관지인들 무사하지 않았으리라. 유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지엄해도 끊는 가래침을 입안에 담고 다닐 수는 없으리라! 점잖은 나마저 계속 침을 뱉지 않고는 달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뒤집어쓰고 들이마신 먼지는 그 이전의 것을 모두 합해도 모자랄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려야 할 화물트럭이 국도의 마을을 지나면서 울려대는 경적 소리는 저승사자의 노랫소리보다도 치가 떨릴 지경이다. 중국에는 전기 자전거와 전기 오토바이가 많이 보급되어 웬만한 서민들은 이것을 이용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달리면서 길 위에서 우주의 원기를 받아들여 그 기를 보존하고 신령한 기와 일체가 되도록 하는 정신수양과 몸의 수련을 쌓아 나 스스로 이제는 반(半)도인이 다되었다고 자부를 하는데도 저 화물트럭과 버스의 경적 소리에 치를 떠는 걸 보면 난 도통하기는 애초에 싹수가 노란 것 같다. 오히려 이런 일상에 아무 표정이 없는 중국인들이 다 도인들 같다. 아마도 이들에게 노자와 장자를 비롯한 훌륭한 스승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 이런 길 아무 데나 트럭을 세워놓고 웃통을 벗고 트럭 밑에 들어가 낮잠을 즐기는 모습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바로 저런 거구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창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고, 방패는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모순으로 가득한 나라 중국을 달리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다. 급속하게 자본주의의 길을 난폭운전하며 달리면서도 여전히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 길 어디에나 마을 어디나 사회주의적인 구호가 어지럽게 난무한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단어는 그곳에 다 붙어있지만 나그네에게는 영혼이 없는 해골처럼 으스스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저 앞에 마을 잔치가 벌어졌는지 간이 천막이 쳐졌고 많은 사람이 자리에 앉아서 떠들고 먹고 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다가가서 기웃거리니 한 사람이 손짓하며 부른다. 가까이 다가가니 바이주를 한 잔 건넨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꼿혔다. 나는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체면을 제일 중요하게 하는 이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모멸을 안겨주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고통을 당하더라도 체면은 지키겠다.’는 사람들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원샷으로 벌컥 들이마셨다. 우레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내게 바이주를 건넨 사람은 으쓱하여 한 잔 더 따른다. 멋지게 또 들이키는 것을 보더니 옆에서 구경을 하던 아주머니가 접시와 젓가락을 내밀며 음식을 권한다.

 

중국사람들은 참 먹는 걸 즐긴다. 이곳에서 식당과 주택의 숫자는 비슷할 정도이다. 사실 먹는 것을 즐기기도 하겠지만 이들은 같이 밥을 먹으면서 쌓아지는 신뢰와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것 같다. “사업을 하려거든 먼저 친구가 되라.”라는 말이 있는데 친구가 되려면 먼저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 중국인들에게 식사 자리는 단순히 밥을 먹는 자리가 아니라 조화와 질서를 실현하는 자리라고 한다. 꽌시도 밥을 먹으면서 형성된다. 중국인들도 우리와 같이 같은 고향 출신끼리 잘 뭉친다고 한다. 한 어머니의 젖을 같이 먹은 형제들이 친할 수밖에 없고 한 마을의 우물을 같이 먹은 사람들이 유대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이 술을 마시고 요기를 하고 취중 달리기를 한다. 나는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엄지 ‘척’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중국공산당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제3세계의 비서구적 가치관을 독자적 문명으로 개척하려는 실험을 했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을 통하여 인류 보편적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실현하겠다는 또 다른 실험을 하고 있다. 천민자본주의적 방식이 아닌 중국 인문정신 의한 새로운 인류 패러다임이 잉태되고 있는지 자못 기대가 되면서도 염려가 된다. 이곳엔 서구에 대한 열망과 함께 중화주의의 우월감이 기묘하게 공존을 하고 있다.

 

중국의 길을 달리며 노자의 평화의 길을 생각한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노자는 끊임없이 우리가 가는 길이 길이 아니고, 우리가 아는 그 이름이 옳은 이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거기가 길이 아니다’ 내가 달리는 이 길이란 본래 허허벌판이었을 것이다. 그곳에 말이 달리고 낙타가 지나다니고 언제부터인가 아스팔트 도로를 깔았을 뿐이다. 사물을 이름으로 한정해버리면 더 이상 본래의 그것이 아니다. 본래의 무한한 그것을 한정시켜버리게 된다.

 

길이 아니라 하니 가는 길을 되돌릴 수 없어도 자꾸 되돌아 생각하게 된다. 더 좋은 길은 없을까? 이 기나긴 여행 중에 누구를 만날지, 무엇을 배울지, 무슨 생각을 할지, 이 여행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 또 어떤 사랑을 할지,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소년으로 돌아간다. 네가 가는 이 길이 실크로드라 하지 말자! 피스로드(Peace road)라고도 하지 말자! 이 길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미래의 소통의 길이 될 것이며, 최고의 여행 노선이 될 것이며, 모험과 사랑을 담아내는 길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최선을 다해 한발 한 발 내딛는 일 그것만 하자!

 

도교와 유교는 중국의 사상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갈래의 물줄기이다. 도교가 카오스(chaos)적이라면 유교는 코스모스(cosmos)적이다. 도교가 예술적인 자유에 관심을 두었다면 유교는 엄격한 사회적 예절과 도덕에 관심을 두었다. 도교가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여성적이라면, 유교는 완고하고 강하며 남성적이다. 하나가 민초들의 생각이라면 다른 하나는 지배계층의 논리를 대변한다.

 

노자가 바라는 이상 국가는 서로 얼굴과 이름을 알고 살 수 있는 작은 나라이다. 지방분권이 잘 된 지구촌공동체를 의미한다. 노자의 평화는 오로지 백성들이 맘 편히 살 수 있도록 위정자들이 백성들을 위한다는 면목으로 무언가를 하겠다고 일을 벌이고 전쟁을 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노자가 꿈꾸던 이상적인 공동체 국가는 학식이 중요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 살 것이라는 의식주 여건이 좋아지고 그래서 문화와 풍속이 좋은 평화로운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것이다.

 

2천5백 년 전 노자는 지금껏 누구도 가지지 못한 최고 성능의 네비게이션을 가지고 “네가 가는 길이 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끊임없이 “평화의 길”로 가라고 진심을 다해서 간절하게 소리친다.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하이패스만 끊으면 ”평화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고속도로는 언제든지 달릴 수 있는 데도 그러하지 않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노자가 창안한 네비게이션은 오랫동안 동아시아에서 각광을 받던 최고의 기종이고 지금이야말로 더욱더 유용할 기종인데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노자의 네비게이션은 끊임없이 비우고, 아래로 흐르고, 부드러운 것이 강함을 이기고, 겸손하며 싸우지 않는 그리고 자기 것을 비워 남을 사랑하고 함께 나누는 길로 인도한다. 이 천지의 도(道)는 이로울 뿐 해로움이 없고, 이 성인의 도는 억지로 하지 않고 다툼이 없다. 이것이 노자 사상이다. 노자가 말하는 ‘평화의 길’이란 인간이 지식을 버리고 욕망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된다. 물질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오늘날 비행기로 한나절이면 지구 끝에서 끝까지 날아갈 수 있는 이때 14개월이나 걸려서 죽을 고생을 사서하면서 달려가는 나에게 환호하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일까? 현대문명이 강요한 가치관을 되돌아볼 때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는 전쟁 없이 평화롭게 잘 살기 위한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노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는 그야말로 전쟁이 일상이던 시대였다. 노자가 그리던 평화나 중국 민중들이 염원하던 평화는 임금이 누구인지, 마을 원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아무 간섭 없이 농사를 짓고 가족과 함께 등 따뜻하게 먹고 마시며 격양가를 부르는 ‘무위의 평화 상태’이다. 이러한 ‘무위의 평화 상태’를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실현하면 ‘무위의 평화 공동체’가 이룩되며, 이게 잘사는 것의 요체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평화란 원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희망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땅 위에 길은 없었다. 지금은 중장비로 쉽게 길을 내지만 예전에는 사람의발걸음이 길을 냈다. 한 사람이 지나고 그 뒤를 이어서 도 다른 사람이 지나고, 그렇게 발걸음이 이어지면 당에 길이 생긴다. 그러나 발길이 끊어지면 금방 길은 없어진다.

 

노자의 평화 사상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생태 위기, 자원 고갈, 인종갈등, 사회 분쟁, 정신적 불안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현실적인 깨달음을 주고 있다. 달리면서 나는 끊임없이 이 길이 아닌데, 아닌데 끝없이 번뇌하며 평화의 길을 모색한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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